Exemple

• 본문: 마 5:1-3
9/19/2021 주일 낮 예배

오늘부터 몇 달간에 걸쳐서 마태복음 5-7장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 설교’(Sermon on the Mount) ‘산상 수훈’(Beatitude)라고 일컬어집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4명의 기자가 조금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 복음서(Gospel)인데요 복음서 중의 진주는 마 5-7장에 기록된 “산상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마태 복음은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5개의 강화(설교)문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 그 5개의 설교문 중 첫 번째가 마 5-7장에 기록된 “산상 설교”입니다.

산상 설교는 왕이신 ‘예수님의 취임 연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의 백성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NIV Study Bible)

* 5:1-12 팔복, 축복의 선언 5:13-20, 6:1-7:23 구제, 기도, 금식,물질에 대한 윤리적 교훈 5:21-48 유대 율법적 전통과 대조하여 가르치심

8복을 구분하면 “가난한 사람들(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의 겸손에 관한 세 가지 복,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에 관한 세 가지 복,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화평케함, 의를 위하여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함)에 관한 두 가지 복”으로 묶어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스캇 맥아트)

산상 설교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 1)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너무 높아 실현 불가능한 것(이상주의적 관점)이다. 2)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시대(천년왕국)에 실현될 미래의 규범이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 3) 제자들만을 위한 것(알버트 슈바이처) **4)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요 법칙이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산상 수훈 설교집의 제목을 ‘기독교 대항 문화’(Christian Counter-Culture)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어거르지고 거스러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좇지 말고, 천국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레 18: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대항하여 살아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본받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모습을 본받지 말아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해두고 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6:2-18 참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가르침)

• 복에 대하여
한자 복(福)을 파자(破字)해 보면, 보일 시(神을 의미)+한 일+입구(한 사람)+밭 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미는 신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밭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동양적인 의미로 볼 때 복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자기 몫의 밭(분복, 기업)이 있음을 알고 만족하며 살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니 너무 큰 욕심을 가지지 말고 자신의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 때 행복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질려고하고,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세상의 성공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은 물질의 복, 무병장수의 복, 자녀 성공(출세)의 복, 명예와 권력의 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객관적인 기준에서 많은 부를 소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빈곤감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이미 많은것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적인 복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복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창 1:28) 또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 가운데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실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b)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으로 삼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믿음의 후손)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벧엘로 돌아와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이름 야곱->이스라엘, 후손의 축복, 땅의 축복), 요셉을 통해서(임마누엘의 축복, 형통함의 축복,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b))흘러 넘칩니다. (성경적 개념의 복은 내가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요 이웃을, 공동체를 복되게)

시편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 말씀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아쉐레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2편 마지막 절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3-6),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받게 된 죄사함의 축복(7-12), 마지막으로 구원과 우리가 받을 기업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축복(13-14)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령한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복의 개념에 대해, 누가 그 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는 당시 종교적인 의미 외에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였습니다. (축복된(blessed), 운좋은(fortunate), 행복한(happy))
산상 설교 본문에 기록된 복(마카리오스)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happiness)과는 다른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happen(우연히 일어나다)에서 유래되었는데, 마카리오스는 우연히 얻게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3절에서 그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임을 말씀합니다. 3절과 10절(8th 복)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복들은 미래 시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현재 이 세상에 살아 가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리며, 경험하며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 심령의 가난함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첫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가 복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흔히 가난하다는 말은 경제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이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교만함과 자기 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속에 영적 교만과 자기 의로 가득 채워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물질을 의지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중심에(사상에) 하나님이 없다하며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ex. 다니엘서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의 최후, 행 12장 헤롯 아그립바 왕)

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으며, 자기 의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음을, 인생은 안개와 같으며 먼지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호흡을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다스리시고 영벌의 심판과 영생의 축복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혼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ex.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아이, 운전하는 아빠 신뢰)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 18:1)에게 경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대표)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라고 합니다. (상대적인 의를 자랑, 판단하는 눈, 외적인 경건, 율법의 행위 강조, 자신은 의인이라 여김)

반면에 세리(매국노 취급 받는 사람, 불의한 자의 대표)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함,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함,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만 구함, 죄인임을 인정)

예수님의 판단: 누가 의로운 자인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8:14)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예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세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인물들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 받지 못한 인물들이 몇명 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 빌라도, 부자 관원은 자기 의와 세상 지식, 권력과 물질로 인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그들의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여 영생을 얻었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의와 지식과 과거의 추악한 삶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통회하는 마음,겸손한 마음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 중에 과거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 아십니까?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을까요?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간음죄, 살인 교사죄, 분노(나발), 교만(인구조사)) 요셉, 다니엘, 사무엘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인간적인 연약함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 듣고) 눈물로 침상을 띄울 정도로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백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4,7,9,17)

다윗은 자신의 죄를 주님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고 죄 용서를 구합니다.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broken spirit), 통회하는 마음(contrite heart)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처럼 ‘깨어진 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그러지고 거스러진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따르지 말고, 이 세상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세리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다윗처럼 영적으로 가난한 자, 겸손한 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인 교만과 자부심과 자기 의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만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셔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 본문: 마 4:23-25
9/12/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 기간 중 행하실 3가지 사역을 요약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심(teaching), 전파하심(proclaiming), 고치심(healing)입니다.

23절.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사” :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갈릴리 호수 인근에 204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2백개가 넘는 도시와 마을을 걸어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 가르치심 (teaching)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회당(synagogue)은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로서 그곳에서 예배, 재판, 율법 교육등이 이루어졌습니다. 회당이 생기게 된 것은 포로기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드릴 수 없게된 유대인들이 흩어진 곳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세운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10명 이상 모여 사는 곳에는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회당을 찾으셨습니다. 이후 사도 바울도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고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되심과 구주 되심을 전하였습니다.

‘가르치다’라는 뜻의 헬라어는 ‘디다스코’인데 ‘교훈적인 설교를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 에스라서에 기록된 율법 학자요 제사장인 에스라는 2차 포로 귀환시에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영적 개혁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뛰어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결심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에스라 7:10)한 것입니다.

3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로 쓰임받았던 총독 느헤미야도 성벽 재건 이후 제사장 에스라를 불러 예루살렘에서 큰 부흥 집회를 인도하게 합니다. 그 때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고, 백성들 사이에 선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들에게 율법서의 의미들을 해석하여 그 뜻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느 8:8) 이것이 바로 가르침의 사역이었습니다. 말씀의 선포와 더불어 가르침의 사역이 함께 이루어질 때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9)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백성들의 마음속에 찔림이 있었고 눈물의 회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준 말을 밝히 앎이라”(느 8:12) 말씀이 깨달아지고 이해가 되니까 모든 백성에게 큰 즐거움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 ‘디다스코’는 헬. ‘다오’에서 유래된 동사입니다. ‘다오’는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즉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함을 의미합니다. 잘 배우는 사람이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배우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give attention to the words of the Laws)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하였고”(느 8:13-14)

공동체의 리더들이 솔선수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해서 학사 에스라를 찾아왔습니다. 배울려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에스라에게 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They found written in the Law) 그들이 오랫동안 율법서에 기록된 초막절 절기를 지키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배울려는 마음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눅 4장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 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기독교 교육학자 루이스 쉐릴(L. J. Sherrill)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표현이 신약 성경에 47회나 나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칭호도 전도자나 설교자보다는 ‘선생’이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음서 42회)

예수님은 탁월한 교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Parables)를 통해 가르쳤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무려 28개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 비유: 눅 15장 탕자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은 흔히 ‘천국 비유장’이라 불립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롯해 6가지의 비유를 통해 천국의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청중들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고 진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데 사용되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훈련 방법의 핵심은 “삶을 통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가르침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무시며 생활하면서 살아있는 지식을 전수하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우선 순위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관계가 사역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대조적인것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행하지 않으면서 율법과 전통을 지키라고 가르쳤던 반면에 예수님은 “내가~행한것처럼 너희도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가르치신 주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로마 군병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포로 귀환 시대에 영적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안에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많이 세워져서 진리의 말씀을 성도들과 불신자들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지식의 전달 차원을 넘어서 삶을 통해 제자를 양육하는 “제자삼는 제자”가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전파하심(Proclaiming)
예수님의 두번째 사역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선포)하심이었습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논증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파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케루소”입니다. 원래 의미는 전령관(messenger)으로서 왕의 공적인 명령을 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는 것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권위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그 권위를 가지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였을 때 무리들은 서기관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권위로 인해 놀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 기간동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4:23,24)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9:35) 예수님은 걸어서 온 갈릴리 마을들에 다시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소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여 로마에 가서 재판을 기다리며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2,3차 전도 여행의 총 거리를 합산해 보면 약 13,400 Km 가량 됩니다. 그 먼거리를 사도 바울은 걸어서, 배를 타고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주로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청중이 듣고 순종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한 메세지를 듣기를 싫어한 왕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거나 메세지를 왜곡되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메세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가 전한 메세지로 인해 사람들로 부터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말씀 선포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불붙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his word is in my heart like a fire)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10)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힌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진리를 선포하기를 열망하는 “불타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불타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령(messenger)은 왕의 명령을 신속히 백성들에게 선포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그 책임을 망각한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할 전령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전령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파수꾼(watchman)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파수꾼은 적의 동향을 살피다가 적이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알리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흔히 “전쟁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계(파수)하는 일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서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에스겔에게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6-7)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선포)해야할 메세지는 무엇이겠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시대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1:9)고 하였습니다.

죄악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그 아들의 영광스런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고치심(healing)
전체 복음서의 약 1/5이 예수님의 치유와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모두 72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27회는 개인의 질병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5-7장 산상 수훈 이후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8-9장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 장모, 귀신 들린자, 병든자, 귀신들린 두 사람, 중풍 병자, 혈루증 여인, 소경, 말 못하는 사람)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가르치시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의 질병, 특히 불치의 병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좇아 내어 주셨습니다.
23절.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튜 헨리는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가장 쇠약한 질병인 중풍병와, 정신적으로 가장 악한 병인 간질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큰 재난인 귀신들림을 고쳐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병, 모든 약한 것, 각종 병에 걸려 고통당함을 외면치 않으시고 친히 그들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전인적인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백성되도록 복음을 선포하셨고(영혼 구원), 사람들이 실존적으로 겪고있는 질병와 약한 것들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육체 구원)

예수님은 굶주린 영혼들과 병든 자를 보실 때 긍휼의 마음(compassion)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4) 이 말씀 이후 예수님은 저녁 먹을 시간이 되도록 먹지 못한 채 빈들에 모인 수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의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구한말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복음을 전한 서양 선교사들이 걸어서 말을 타고 한반도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펼친 사역은 의료 기관 설립과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조선의 수 많은 백성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의료 기관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으로 살았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근대식 교육을 통해 계몽되어 수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배재학당, 경동학교, 경신학교, 이화학당, 연희 전문대, 세브란스 병원등)

지금도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서 하는 사역들 중에 교회 개척과 제자 양육과 더불어 고아원을 운영하고 유치원과 학교를 세우고 병원/클리닉을 세우는 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출 15) 히브리어 “라파”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수선하다’ ‘다시 세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감싸 싸매시어 회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치유하는 광선”을 비추시어 우리의 질병과 약한 곳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원래 상태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든 것을 짊어지셨습니다.”((마 8:17. 사 53:4 재인용)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무너진 우리의 인생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허리케인과 지진과 같은 인생의 시련을 만나 절망하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무너진 우리 인생의 집을 다시 세워 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것은 육신의 질병에서 나음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노예됨으로 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치의 병에서 나음을 얻었더라도 예수님이 구원자되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은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마 9장에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친구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시기 전에 죄사함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서기관들이 이를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였을 때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음을(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치유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그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세 가지 사역,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우리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 잘 배우며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왕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내어 영광스러운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메신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여호와 라파)하나님께 나의 모든 연약한 부분을 내어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치유의 광선”을 비추셔서 우리의 모든 질병이 나음을 얻고 연약한 육체가 회복되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Read More →
Exemple

• 본문: 마 4:12-22
9/5/2021 주일 낮 예배

•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의 시작 (12-17)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은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였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시험이었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험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마귀로 부터 오는 이 세가지 시험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4:7)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는 ‘성령의 검’과 같은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순종함으로 영적 전투에서 날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곳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자라나신 곳은 갈릴리 부근에 있는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는 갈릴리 호수 인근 마을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버나움이 사역의 본거지(base camp)였습니다.

갈릴리 서북안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세리 마태가 부름받은 곳이며,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이며, 귀신들린 사람들과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곳입니다. 현재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5세기에 지으진 바실리카식 교회당이 서 있고, 4세기의 회당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살면서 사역을 하게 된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서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으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사 9:1-2절 인용)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북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앗수르의 입장에서 볼 때 요단강의 서쪽에, 즉 ‘요단강 저편’에 있습니다. ‘해변길’은 갈릴리 해변 지역을 가리키는데 가버나움은 해변 마을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표현은 가버나움이 속한 갈릴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갈릴리는 과거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방화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이 이방인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지역 중심으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갈릴리 지역은 흑암이 지배하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소외받고 천대받던 그 어두운 곳에 큰 빛이 비칠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거하시면서 큰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마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우리의 삶 또한 이방의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처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심으로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 중에 복음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첫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침례 요한의 첫 메세지와 동일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태복음의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4회/32회 언급)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요 온 인류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 왕국’이 실현되었습니다. 귀신이 쫓겨가고 눈 먼자가 눈뜨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가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서,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고 물위를 걸어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흑암의 권세’아래 있던 백성들에게 ‘기쁨 소식’을 전하심으로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영생의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가지 조건이 있는데 회개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악을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 숭배하던 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나오는 것을 의미하며,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거짓말 하던 자들은 그 악한 행실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받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선포하였을 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들은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물었을 때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우리 마음 속에 회개가 일어납니다. 마음속의 뉘우침은 행동의 변화로 연결됩니다. 과거의 악한 행실들과 습관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회개하는 자들은 천국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심으로 천국이 가까이 다가옴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마음 속에 주님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신 성도님들은 날마다 주님앞에 나아갈 때 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실 줄 믿습니다.

• 제자들을 부르심 (18-22)
갈릴리 호수 인근 지역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우선 순위를 두시고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란 의미는 유대인의 스승인 랍비에게서 ‘배우는 자들’이었습니다. 랍비에게서 율법과 탈무드를 비롯한 유대 전통을 배우고 익히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나라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짐을 가르쳐줍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혼자서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실 수 있고, 천사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천국을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는 ‘소수 정예’의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지만,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 열 두명의 제자들을 양육하시는데 집중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6:21 “이때로부터”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이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제자들에 포커스를 맞추어 ‘제자도’(discipleship)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십자가 지는 삶’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삶’ ‘서로 발을 씻기는 겸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명의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신 4명의 제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은 갈릴리 해변입니다. 어촌 마을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지식인들과 비교하면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을 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평범하고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기후에 대처하는 유연함과 강인함,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보통 그러하듯 그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명의 제자들 중 첫 제자 4명을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시험을 치르고 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여 선발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르심’(calling)에는 3가지 종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우리를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섬김에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주신 은사(달란트)에 따라 봉사하고 섬기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특정 사역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부름받은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구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종(사역자)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흔히 말하는 풀타임 사역자(목사, 전도사, 선교사) 뿐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의사, 교수, 교사,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포함됩니다. 의료 선교사, 컴퓨터 기술 선교사, 농업 선교사, 언어 선교사, 교육 선교사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목회 영역도 세분화 되어 전문 목회자(어린이, 음악, 행정, 선교, 실버, 설교)가 각광 받는 추세입니다.

예수님께서 4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1) 모두 갈릴리 어부들이었고 자신의 일(어부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이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4:18)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4:21) (ex. 모세, 다윗:목자, 아모스:농부, 예레미야/에스겔:제사장 가문)

2) 예수님은 명령하셨고 그들은 순종하였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4:19)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20)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부르시니”(4:21)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22)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실 때 다른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단지 제자들이 할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원어: 사람의 어부)로 만드시는 일이었습니다.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생선을 잡아 삶을 연명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아 그 후로는 “사람의 어부”, 즉 영혼을 구원하는 제자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동일합니다. “곧” 즉시로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과 재산과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았고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ex.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예수님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 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려면 문자적으로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버려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도 아내가 있었고, 바나바도 사유 재산이 있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 삶의 목적이 바뀌어야 함을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음으로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3) 예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일생의 사명’(life mission)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주신 일생의 사명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기에 그들은 평생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험이 오고 환난이 닥칠 때에도 사명은 그들을 붙잡아 주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낙심,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과 대화하시며 음식을 나누어 드시며 그들에게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생선이나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갈릴리 어부’로 살지 말고 ‘사람들의 어부’로서 살아야 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 가운데 헤매며 목적 없이 살던 우리를 찾아 오셔서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주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기억하며 붙들고 사는 성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길 힘은 사명을 회복하고 사명에 충실함에 있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조건에서 보면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이었으나 주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셨고, 그들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들의 어부”로 만들어 주십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즉각적으로 온전히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제자로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사명을 기억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는 천국의 일꾼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Read More →
Exemple

•본문: 마 4:1-11
8/29/2021 주일 낮 예배

믿음 생활하다보면 시험에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시험, 사람과의 관계로 인한 시험, 육신적인 연약함으로 인한 시험등 각양 시험으로 인해 믿음에서 흔들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라고 하는 단어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시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시험, 영어로는 test, trial 로 표현하는 시험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시험(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예가 욥이라는 인물이었죠.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는데 사탄이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의 풍성한 소유물을 치시면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욥의 재산과 가족을 빼앗아 가게하고 그의 몸도 상하게하는 엄청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욥은 그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서도 ‘그를 단련하셔서 순금 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며 흔들림없이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는 일꾼이 됩니다.

야고보서에는 시험을 이긴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시험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욥처럼 믿음으로 시험에서 승리하여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두 번째 시험은 영어로 유혹, 미혹을 의미하는 ‘temptation’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서 받으신 시험은 바로 두 번째 시험, ‘유혹’이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두 번째 시험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1)하나님은 시험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아무도 죄에 빠지도록 미혹하지 않으십니다. 죄에 빠지도록 미혹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사단의 이름의 의미가 ‘미혹하는 자’(tempter), ‘고소하는 자’(accuser)입니다.

2)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악(사단)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신 본문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미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에 빠지도록 마귀가 시도했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3)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험’은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test, trial)이라기 보다 우리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시험’(유혹, temptation)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안에 자리잡고 있는 욕심(탐욕)은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죄가 자라나서 결국 사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원자(메시아)임을 증거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귀에게 시험 받으심과 그 시험을 물리치심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자 사단의 궤계를 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첫번째 아담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함으로 실패한 인생이 되었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이기심으로 모든 인류의 구원자의 자격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 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히 4:15)가 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들처럼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시험 받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시험 받을 때에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면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서 3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한가지씩 살펴 보면서 시험의 의미와 시험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육신의 정욕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 성도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신 것은 이 세가지 시험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입니다. 3절 말씀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매우 허기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 인간이셨기에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육체의 모든 한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피곤함, 허기짐, 슬픔, 십자가의 고통)

마귀는 예수님의 약한 부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필요한 육신의 문제, 원기를 회복시켜 줄 빵을 가지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원래의 의미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돌을 명하여 빵이 되게 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이것은 마귀의 교묘한 전략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사용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은 더군다나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허기지고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때문에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빵으로 그들의 허기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전하기 위해 행하신 이적이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약점을 간파하고 예수님을 미혹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류의 조상 하와가 어떻게 마귀의 시험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단이 간교한 뱀의 모양으로 나타나 하와에게 속삭입니다. (창 1:1-6)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의 대답입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원래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1:16-17))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약점을 사단은 교묘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사단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는 사단의 꾐에 넘어가고 맙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자리 잡게 되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 스럽게 보이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금단의 열매가 탐스러운 열매로 바뀐 것입니다. 죄가 자리 잡은 하와의 마음속에 세 가지 죄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습니다.

1)먹음직 스럽게 보임(육신의 정육) 2)보암직하게 보임(안목의 정욕) 3)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임(이생의 자랑)

사단이 예수님께 던진 첫번째 시험은 “육신의 정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돌을 명하여 빵이 되게 하여 너의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던진 첫번째 시험은 우리 크리스찬들을 유혹하는 강력한 시험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물질이 제일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Money matters, Show me the money!

성경은 우리에게 물질이 악하다거나 살아가는데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이 더 중요한 가치,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맘몬을 너의 주인으로 삼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 (예화. 물질적으로 성공한 이민자의 실패)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예수님은 떡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먼저 채우는 것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물질 중심의 삶을 살라는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은 연약한 육체를 가진 존재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코에 생기(하나님의 영)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육적인 필요가 다 채워져도 영적인 필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아니하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필수적인 영적 양식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책망과 교훈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등이요 빛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예수님은 신명기 8:3 말씀을 인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인생의 주인되심과 공급자 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의 존재 근원은 떡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 하나님 자신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물질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라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들(먹을것, 마실것, 입을것)을 채워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생의 자랑
두번째 마귀의 시험은 “이생의 자랑”의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마귀는 시편 91편을 인용합니다. 마귀도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합니다. 시편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명하여 너를 보호하여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때 천사들을 보내 죽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고도 마실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출 17:3)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출 17:6)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시험한 행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의 궤계를 꿰뚫어 보시고 신명기 6:16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두 번째 사단의 유혹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과 같은 유혹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때 천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보호하여 몸의 상함이 없이 사뿐이 지상에 내렸다면 사람들은 박수치며 환호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며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웅적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입증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세울려는 줄 아시고 무리들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내 이름을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명예를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명함에 각종 직함을 넣기를 좋아합니다. 감투를 얻을려고 합니다. 하지만 허영과 권력을 쫓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면 안됩니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겸손함으로 나를 낮추는 삶, 나의 유익을 먼저 구하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 무엇보다 나를 자랑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안목의 정욕
마귀의 세번째 유혹은 “안목의 정욕”에 해당하는 유혹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르되 만일 네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통치권, 소유권)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께 속삭이기를 지금 네게 엎드려 경배하면(절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을 손쉽게 얻게 해주겠다는 유혹입니다.

마귀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소유한 자도 아닙니다. 마귀에게 경배한다고 해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단지 거짓말로 유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 궤계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 지름길을 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신명기 말씀(6:13)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섬김의 대상, 경배의 대상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우상들을 내어 던져 버리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의 고백처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마귀의 유혹은 “안목의 정욕”(보암직스럽게 보이는)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고후 5:7) 보암직스럽게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면 살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안목의 정욕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미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귀는 순간 순간 속삭이며 유혹합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아라라고 미혹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마귀의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지켜 행함으로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하여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욕구을 채우는 것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신 세상의 영광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사탄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Read More →
Exemple

•본문: 마 3:13-17
8/22/2021 주일 낮 예배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 4권을 ‘복음서’(Gospel)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3권을 ‘공관 복음’(Synoptic Gospel)이라 부르는데,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 본다는 의미입니다.

마태 복음이 다른 복음서인 마가, 누가, 요한 복음과 다른 특징을 몇가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태 복음은 주 독자층이 유대인들이어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 유대인이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로 선포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쓰였기 때문에 제일 앞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구약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약속과 성취’로서 두 시대(구약과 신약)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그래서 마태 복음에는 구약 성경을 다른 신약의 책보다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의 130번) 마태 복음에 자주 사용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졌다’라는 구절은 9번에 걸쳐 등장하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3. 마태 복음은 다섯 개의 위대한 강화 (discourses)를 중심으로 짜여있습니다. (5-7장 산상 수훈, 10장 제자들을 가르치심, 13장 천국 비유들, 18장 제자도, 24-25장 감람산 강화(종말))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열한 것인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구절로 매 설교(강화)가 마무리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태 복음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것은 마태가 모세 오경의 구조를 모델로 했음을 암시합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새로운 토라(율법)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위대한 모세’로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4. 마태 복음은 ‘교회’를 언급한 유일한 복음서(16:18, 18:17)이며, ‘하늘 나라’라는 구절이 32회나 등장하는데-‘하나님의 나라’는 4회-이는 유대인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뿐 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도 동일하게 침례 요한이 유대 백성들에게 외친 첫 복음의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한 첫 메세지도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theology of the Kingdom of God)은 구약 성경 창세기 부터 신약 마지막 성경 요한 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파괴와 구속,회복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많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속박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그 날을 소망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하늘 나라, 천국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국가를 이루는 세가지 요소를 주권, 국민, 영토라고 합니다. 1)주권은 국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체, 권력의 힘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2)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영토는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정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국민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즉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곳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 나라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며,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곳 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천국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그 왕국의 시민들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첫 메세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멀리 보이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죄로 부터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함께 읽은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공생애 부분부터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기 이전에 공생애의 첫 사역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왕의 즉위식’이라 붙였습니다.

‘즉위식’은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요 새로운 왕이 왕권을 이어받고 왕정을 시작함을 모든 사람 앞에서 선포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 ‘대관식’이 있습니다.
대관식(戴冠式)(Coronation)은 기독교 문명을 근저로 하고 있는 유럽 황실에서 왕이나 여왕이 즉위할 때, 기독교의 사제가 그 머리에 왕관을 씌어주는 의식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왕관을 머리에 얹어 준다고 하여 영어로 Coronation, 한자어로 대관식이라 칭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중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대관식 대신 즉위식 (卽位式)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황제는 천제(天帝)라 생각했기에 그 머리에 누군가가 왕관을 씌어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는다고 하여 즉위식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하신 일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마치 유럽 황실의 왕이, 중국의 황제가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모든 백성에게 공포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되심과 그 아들의 구속 사역이 시작됨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왕의 즉위식과 같은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며 인정하시는 왕의 즉위식이요 왕의 출정식과 같은 장면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침례의 의미에 대해 상고해 보기를 원합니다.

1. 모든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세례(침례)에 대한 성경적 기원은 구약의 결례(정결 의식)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자신의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 예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전통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유대교인이 될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는데, 할례 받은 후 상처가 아물면 그 사람을 데리고 강으로 가서 흐르는 물에 씻게 하고 물 가운데 세워 율법을 읽어 주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와 죄사함을 상징하는 의식이었고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요단강까지 친히 내려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 하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기에 침례 주기를 꺼리며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침례 요한은 스스로 말하기를 “너희로 회개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 부터 성령과 불로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침례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을 의미합니다. 침례 요한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구원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침례를 주는 순종의 행위가 결국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알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이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던 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순종함으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나의 생각과 이해력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라면 겸손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의 죄를 대신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시기에 회개나 죄 씻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할 구원자로 오셨기에 인간의 죄와 실패와 완전하게 동일시하시기 위해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들과 동일한 존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에 기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고, 종의 형제를 가지셨고,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높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스스로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고, 죄 없으신 주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례받으심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 메시아의 도래와 사역의 시작을 공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요한복음 1:31에서 침례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침례를 베풀므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구원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은 또 말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 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 1:33-34)고 말합니다. 침례 요한은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령이 비둘기 처럼 예수님 위에 내려 앉는 것을 보고- 확실히 알았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침례 받으심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왕의 출정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았던 소박한 의식이었지만,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4.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은 침례를 통해 회개와 죄사함의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친히 침례를 받으셨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되는 성도들이 지켜야할 의식으로 침례를 명령하셨습니다. (마 28:18-19) 그 명령을 주신 분이 스스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침례의 의미는 나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공중에게 증거하는 예식입니다. Baptism (수침례)을 지키는 우리는, 물 속에 들어갈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물 속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침례는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구원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4-5)

침례 받을 때 나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침례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주신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6-17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왔을 때 나타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현상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 보시는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형상이 비둘기 형상을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온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온 지면에 물이 감한 것을 전하여 준 동물이 비둘기였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증하는 현상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사 61:1-2 인용)

두번째 현상은 하늘로부터 음성(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기독교 이전의 메시아를 가르키는 말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는데, 예수님을 우리 죄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종으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사 42:1-7 말씀은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의 사명을 담당하실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례 현장을 하늘에서 지켜 보고 계셨고, 성령을 비둘기처럼 보내셨고, 친히 음성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구원자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 1년 이상의 시간을 통해 마태 복음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번째 일로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으로부터 침례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침례 받으심의 의미는: 1)모든 의를 이루는 것 2)우리 죄를 대신할 구원자이심을 증거 3)메시아의 도래와 사역의 시작을 알림 4)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심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겸손하게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침례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 거하며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Read More →
Exemple

• 본문: 행 1:8, 2:42-47
8/15/2021 주일 낮 예배

제가 2019년 이곳에 와서 이 지역을 다니면서 보고 놀란 것은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저희 가족이 살았던 북가주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로 부터 반경 2마일 안에 제가 차 다니면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20여개는 되는 것 같은데 아마 그 이상 될 것같습니다. 마치 과거에 한국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곳이 김포 국제 공항이었는데, 밤에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서울 시내를 낮게 가로 지를 때 비행기 안에서 시내를 내려다 보면 사방에 빨간 네온사인 불빛의 십자가가 가득한 것을 보고 많이 놀라곤 하셨을 겁니다.

대한 민국의 개신교회가 5만 5천여개가 된다고 합니다. 치킨집, 편의점 보다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저희 교회가 속한 미국 남침례교(SBC) 교회가 현재 4만7,500여개가 되며, 미주리에는 1,800여개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 많은 교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 교단이 왜 그렇게 많은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죄악에 가득한 세상 가운데 수 많은 교회가 존재함으로 인해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세상에 소망이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지난 1년 7개월 가량에 걸쳐 사도 행전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시작과 확장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존재하는 수 많은 교회의 뿌리가 되었던 2천년전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와 유럽에 세워진 초대 교회의 모습을 살펴 보면서 과연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인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인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구별되는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해 처음 말씀하신 때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전에 교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신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종반부에 제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말하자면 ‘제자 훈련’에 집중하셨는데,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이 다가오심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고난 받으실 것과 십자가 지실 것,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세워질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주님은 “내 교회를 세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주신 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초월적 능력과 권세였고, 또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 열쇠는 기도의 열쇠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이 후에 주님께서 이 땅에 남겨 두신것은 제자들과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헬. ‘에클레시아’인데요 ‘부르심을 받은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교회’입니다. 화려하게 지은 건물,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엡 1:23)입니다. 인간의 모임도 아니요 화려한 건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는 곳, 그리스도의 영이 머무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주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입니다. 요 15장에 기록된대로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가지된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입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엄청난 죄의 댓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목적이 우리를 교회로 삼기 위함임을 말씀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교회입니까? 독생자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교회, 그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 사신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 행전을 일년 7개월가량 자세히 공부하고 강해 설교하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사역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도 행전을 중심으로 강의하실 때 두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1) 교회가 이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는가? 2)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는 존재하는가? 저는 이 질문에 감히 yes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가고 혼란 가운데 있을지라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교회의 영향력이 약해져간다 할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소망임을 믿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는 존재하는가? 사실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큰 교회, 영향력 있는 교회들이 존재하지만 이상적인 교회라 부르기에는 주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니지만 과거에, 약 2천년전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가 존재했는데, 그 교회가 바로 사도 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는 지금부터 2천년전에 존재하였던 과거의 교회이지만, 오늘날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할 교회의 원형(prototype), 교회의 모델입니다.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바로 그 교회”(the Church)의 모습을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1. 초대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 행전을 흔히 “성령 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행전에는 거의 모든 장(chapter)마다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빼고는 사도 행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 시작된(잉태된) 교회입니다. 사도 행전 1-2장에 보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자세히,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1:2)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1:8)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집(마가 요한의 집으로 추정)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명의 무리가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 충만하여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사도 바울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구제 사역을 담당할 일곱 집사들의 자격 요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은 빌립을 이끌어 광야로 이끄시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그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 전도에 확신이 없었던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명하사 의심하지 말고 형제들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을 때 그가 순종함으로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명에 순종하여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기를 멈추고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복음을 전함으로 유럽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분도 성령이시고 교회를 성장케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사람을 세우는 분도 성령이시고 사람을 파송하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고난 중에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도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늘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성령의 열매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초대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기도의 일생이었던것처럼 초대 교회도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된 것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 순종하여 마가의 다박방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던” 120여명의 무리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제비 뽑을 때에도 기도하였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침례를 받은 삼천명이 넘는 사람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가 풀려 난 이후에도 두려움 없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주된 일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이었고,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도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기도하였는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습니다.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 갈때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 주셔서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갖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헤롯이 그를 잡아 처형할려고 한 그 전날 밤에 주의 사자를 옥에 보내어 그를 감옥에서부터 이끌어 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한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큰 지진이 나며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매인 쇠사슬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그는 사역의 고비 고비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역경을 이기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초대 교회 교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빌 1:19)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려야합니다.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자의 기도를 제일 두려워한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지만,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 교회의 모범을 따라서 기도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강건케 되어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과 명령의 말씀이 사도행전 1:8 말씀입니다.

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조건) 2) 너희가 권능을 받고(준비됨) 3)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사마리아와<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복음의 증인됨)

성령이 임하시면 하늘로 부터 권능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힘, 권세, 권능, 강력함, 재능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 ‘다이나믹’ ‘다이너마이트’ 단어가 ‘두나미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눅 4:14) 병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함께 하셨습니다.(눅 5:17) 예수님은 열 두제자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눅 9:1)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설교할 때에도 증거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행 10:38)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병 고침의 역사로, 담대한 복음 전파로, 유무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 4:2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바로 초대 교회였습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믿음으로 나음을 얻기도 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술주정뱅이가 예수님 앞에 꼬꾸러뜨려져서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족 중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전혀 없던 가정에 한 사람을 통해 복음이 들어가서 온 가족과 식구들, 친척들까지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 기도하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십시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고,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연약함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초대 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공동체였을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칭찬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다”(골 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살전 1:3)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행 2장 42절부터 47절까지, 4장 32절부터 35절까지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자발적 나눔)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려운 성도들을 서로 도왔다는 의미입니다.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radical) 나눔과 헌신의 공동체였습니다.

공산주의를 시작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 구절을 근거로 빈부의 격차가 없는 이상적이고 평등한 사회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때 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탐욕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제도와 권력으로 ‘유무상통’하는 사회를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서로 돌보고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 종과 주인이 함께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편견과 차별이 없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품고 용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그들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전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습니다.

우리 웨인즈빌 침례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기도하며 특별히 연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5. 초대 교회는 선교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선교 공동체입니다. 사도 행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 충만받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천국 복음을 전파한 기록입니다.

‘증인’(메르튀레스)은 ‘순교자’(martyr)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과 제자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법정에서 사실대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 믿고 깨달은 것을 회당에서나, 유대인들 앞에서나, 이방인들 앞에서나, 로마 관리들이나 왕 앞에서나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공회 앞에 섰을 때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엄하게 경고하기를 이제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타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고, 빌립 집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자 사울을 찾아 오신 주님은 그를 변화시켜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고, 그를 통해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 큰 획을 긋은 사건은 바로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최초로 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일입니다.(행 13) 그 두 명의 선교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큰 희생을 감내하고 두 명의 지도자에게 안수하고 파송함으로 세계 선교의 장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큰 희생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큰 부흥을 허락하십니다.

지난 주 오후 예배 때 말씀드린 것처럼 모라비안 공동체는 성도 열 두명 중에 한 명 꼴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24시간 연쇄 기도 모임을 백여년간 지속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계 선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땅 끝까지 갔고(go),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았고(make disciples),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었고(baptize),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teach) 지키게(keep)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말씀으로 양육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변화되어 그들이 나가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 행전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꿈꾸는) 교회의 모델인 초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능력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대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웨인즈빌 침례교회도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이 시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받는 교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본문: 사도행전 28:16-31
8/8/2021 주일 낮 예배

우리는 작년 1월부터 사도 행전 말씀을 통해 초대 교회의 설립과 확장의 생생한 스토리를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교회에게 주시는 영적 도전과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행전의 마지막장 마지막 내용입니다.

사도 행전의 주제 구절은 행 1:8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 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어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에 전파되었고, 빌립 집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전해졌고, 사도 바울을 통해 온 아시아와 그리스 지역,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셋집)에 일차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자유의 몸이 되어 4차 전도 여행을 갔는데, 그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서바나(스페인)까지 갔으리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은 강력한 생명력이 있기에 극심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인종과 문화, 종교와 신분, 사회 경제적 상황과 국경을 뛰어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듣고 깨닫고 믿는 자마다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로마 시민권자인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수 개월의 거친 항해끝에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요 제국의 중심지로서,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정교하게 건설된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사방 팔방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도시처럼 로마도 이방 신전이 가득한 도시여서 카피툴린 언덕 위에는 주피터와 주노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여 로마의 남쪽에 위치한 압비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자신을 마중나온 로마 교회의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격려를 받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이 머물게 된 곳은 실제 감옥이 아니라 자신의 비용으로 세를 얻은 집(28:30)이었습니다. 바울은 중범죄자도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인물이 아니어서 자신이 살 거처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 같습니다. 가택 연금 상태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제한된 자유를 누리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시위대)이 24시간 교대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셋집에서 2년간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먼저 복음을 전한 대상은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다닐 때 먼저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교육, 문화, 종교의 센타였기에 회당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바울을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족 유대인들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하였습니다. 로마서 9-11장에 걸쳐 유대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영적 무지)되겠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마음속에 큰 근심과 끊임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고 하였습니다.

로마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원했기에 유대 공동체의 리더 몇 사람을 자신이 갇혀있는 셋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셋집에 거주한지 ‘사흘 후에’ 유대 지도자 몇명을 초청한것으로 미루어 바울의 선교 열정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길 정도로 힘든 여정을 보내었기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올에서부터 로마까지 여러날을 걸어서 왔기에 몸은 많이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복음을 전하기 원했기에 도착한지 삼일 후에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한 것은 그들이 유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셋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었는데 유대 공동체 리더 몇 사람을 먼저 만나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변화된 그들을 통해 복음이 로마에 있는 유대 사회에 급속토록 전파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20절까지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한 복음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유대인들이 자신을 로마 당국에 고발하여 죄수가 되었고, 로마인은 자신을 심문하여 무죄함을 알고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자신이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이나 법을 어기거나 로마법을 어긴것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증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으로 인해 심문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것,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구약 성경에서 반복해서 예언하고 있는 오실 메시아(구원자)에 대한 것입니다. 영원한 왕,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년동안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모든 고통에서 해방하여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시골 동네 나사렛 출신의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유일한 소망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을 듣고 유대 지도자들은 중립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당신의 고발과 재판에 관해 유대에서 온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바울에 대해 나쁜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단지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지 듣기 위해서 왔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전도 활동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마음 문을 열지 않은 채 자신들은 직접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도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유숙하는 집에 찾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였는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셋집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뿐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군인들(시위대, palace guard)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자신을 지키고 황제의 궁전을 호휘하는 수 천명의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로마의 중심부, 로마 황실에까지 전파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 셋집에 있을 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변화된 사람중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영적 리더였던 빌레몬의 노예였으나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로마 셋집에 있던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바울의 심복(심장)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것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서신서가 신약 성경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해 주었고 그를 종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형제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 자료에 의하면 그로부터 약 50년 이후에 오네시모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대표적 교회인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몬 1:10)이라고 칭합니다. 바울은 감옥과도 같은 곳에서도 영적 재생산 사역을 하였습니다. 제자 양육에 매진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디모데처럼 영적인 아들과도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심복(심장)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갇혀 있었으나 ‘쓸모없이’(useless) 보이는 한 영혼을 ‘쓸모있는’(useful)한 존재로 변화시켰습니다.

30절 말씀대로 바울은 2년간 로마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지식인이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나 군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재판 결과를 기다리면서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복음 전파를 위해 한 일은 4권의 성경을 집필한 일입니다. 소위 ‘옥중 서신’이라 일컬어지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여 편지로 남겼습니다.

쓰여진 순서대로 보면, 골로새서는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인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에바브라가 교회내에 침투한 이단의 문제를 가지고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 왔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서신서입니다.

빌레몬서는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쓴 사적인 편지로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두라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쓰여진 에베소서는 3년동안 눈물로 사역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두기고와 오네시모 편으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교인들에게 보내고, 빌레몬서를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전달케 합니다.

빌립보서는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서 빌립보 교회에서 파송한 에바브라디도편으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혀지내는 바울을 섬기도록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일꾼인데, 큰 병에 걸려 죽을 뻔 하였으나 완쾌되어 이 편지를 가지고 빌립보로 돌아갔습니다.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의 시간을 보낸 바울에게, 재판 결과를 기다리며 로마 셋집에서 보낸 감방같은 2년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 2년간의 시간이 허송세월하는 wasting time/killing time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를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로마 시위대 군인들과 황실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오는 제자들을 양육하는 시간이 되었고 오네시모와 같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갇혀 있는 동안 초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기록한 서신들 중에 4개를 신약 성경에 포함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로마 셋집에 매여 있었으나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두번째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인 디모데 후서에 기록한 바와 같은 의미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세상의 권력이 전도자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그의 손과 발에 쇠사슬을 채울 수는 있어도, 바울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쇠사슬로 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하지만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순교의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면서 믿음을 지켰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육체를 제어하는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기 보다 영혼을 멸하실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복음은 더욱 힘있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 방방 곡곡에서 교회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정부에 의한 핍박, 이슬람이나 힌두교인들에 의한 핍박,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핍박,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한 핍박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불타고, 선교사가 납치되어 고문 당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들에 의해 가족들이 목숨을 잃고 집을 잃기도 합니다. 고향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합니다. 직장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는 핍박 중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조차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고 감옥을 넘어, 전쟁의 상흔을 넘어, 인종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 세상 끝까지 전파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사도 행전의 마지막은 두 단어로 마무리되고 있는데요, ‘메타 파세스 파레시아’(boldly, ‘아주 담대하게’), ‘아콜루토스’(without hindrance,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입니다. 이 두 단어는 사도행전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외적인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핍박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아주 담대하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힘있게 전파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권력을 이기는 능력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고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주 되심-을 ‘담대하게’ ‘거침없이’(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전파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 행전은 30-31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이 셋 집에서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갑자기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고 무죄로 석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도 않고, 그 이후의 바울의 사역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습니다. 왜 누가는 갑자기, 조금은 어색하게 사도 행전을 끝마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로마에 전파된 복음은 그 누군가에 의해 그 이후로 계속 전파 되었고, 계속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복음은 지금도 땅끝까지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말하기를 사도 행전 29장(Acts 29)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가 써가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은 사도 행전 28장에서 마무리 되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멀리 나가지는 못해도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삶의 현장에서 아내로, 남편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섬기는 교회에서 사도 행전 29장을 써내려가는 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써 내려가는 사도 행전은 주님께서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welcome),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모든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하고 가르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 본문: 행 28:1-15
8/1/2021 주일 낮 예배

지난 7월 20일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존 창업자의 회사인 Blue Origin이 개발한 상업용 발사체가 지구 상공 100마일 우주에 다녀온 일이었습니다. 파일럿 없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발사체에 민간인들만 4명이 탑승하였고, 우주에서 몇 분간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캡슐을 타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7월 20일을 상업 우주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잡았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달에 최초로 발을 내딛은 날이 1969년 7월 20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거대한 로켓 새턴 V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3명의 우주인들이 탄 아폴로 11호는 발사한지 4일만에 고요의 바다(Sea of Tranquility)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3명의 우주인들 중에 최초로 달 표면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Neil Armstrong이었습니다. 닐 암스트롱이 귀환 후 방송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한 사람이 내딛은 하나의 작은 발걸음, 인류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도약)

저는 사도 바울의 로마행이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수개월의 거친 항해 끝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하였던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마침내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로마 입성은 너무나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인채로, 초라하게 로마 땅을 밟습니다. 그를 주목하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도착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로마 입성은 장차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이 위대해서라기 보다 바울이 그토록 전하기 원했던 복음의 능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문화와 종교, 언어, 국경의 장벽을 뛰어 넘습니다. 신분을 초월하고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관습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전염병처럼, 산불처럼 급속하게 전파되어 복음을 믿는 자들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실제로 바울의 로마 선교로 시작된 작은 발걸음(small step)이 어떻게 세계 선교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사건이 되었을까요?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로마로 가기를 원하는 자신의 염원을 담아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기록한 서신서가 로마서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이끌어 가는 탁월한 영적인 지도자는 없었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등을 서로 돌아가면서 읽고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하며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여러곳에 퍼졌습니다. 롬 1:8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들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어서 온 세상에 전파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 일행이 탄 배가 시칠리아 섬 수라구사를 거쳐 이태리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레기온에서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을 타고 보디올이라는 항구 도시에 도착하였을 때, 로마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바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백부장의 배려로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일주일간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바울은 로마에 셋집에 거하면서 찾아 오는 로마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였을 것이며 그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온 세상에 계속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셋집에 거주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그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 1:13)

사도 바울은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낸 2년 동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결과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이미 복음이 시위대 안에 들어갔고 로마 황실 사람들 중에도 회심자가 나왔으리라 짐작됩니다.
이후 로마 황제들에 의한 핍박이 있었지만 복음은 로마 제국 전역에 소리 소문없이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 핍박할 수록 복음은 더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로마 입성 이후 약 250년이 지난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핍박과 차별을 금지하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받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A.D.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하였습니다. 로마 정부와 황제로 부터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모든 사회에 영향을 미쳐 로마의 국교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살았던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100년이 지나면 이 지구상에 성경은 단 한 권도 남아 있지 않고 기독교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지 25년이 지난 후, 그는 죽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집은 성경을 인쇄하는 인쇄소와 성경을 보관하는 창고가 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 같았던 기독교는 더욱 번창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한 사람의 작은 헌신, 작은 발걸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부분은 멜리데섬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두번째 부분은 멜리데섬에서 로마에 도착하기 까지의 여정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 (1-10)
파선한 배가 도착한 곳은 멜리데(현재 몰타 공화국)라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멜리데는 시칠리아 남쪽 100 킬로미터 해상에 있는 섬으로서 로마로부터는 510킬로미터나 떨어져있었습니다. 그 섬의 주민들은 페니키아 혈통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폭풍을 만나 2주간 표류한 끝에 그레데의 미항에서 서쪽으로 약 75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문자적으로는 ‘야만인들, 그리스 말을 사용하지 않는 모든 민족을 그리스인들이 일컫는 말)이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특별한 동정, unusual kindness) 추운 날씨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을 피워 몸을 녹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에 불에 넣자 나무 가지 사이에 있었던 독사 한마리가 불의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것을 본 원주민들은 이제 바울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죽게 되는 것은 살인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사를 불에 떨어 버렸는데 그의 몸은 원주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상함도 없었습니다. 이 놀라운 현장을 목격한 원주민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는 것을 보고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하자 주민들이 바울을 헤르메스,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믿고 숭배할려고 함)
하나님은 멜리데에서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는데 첫번째 이적은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아무 상함도 없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적은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총독/추장) 보블리오의 부친의 질병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보블리오의 초대로 바울과 그 일행들이 사흘동안 그의 집에서 환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안수하자 그가 나음을 얻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섬에 있는 다른 병자들도 와서 고침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표적과 이적은 사도 행전에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 사도 바울의 손을 통해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표적과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되었고 그 결과 수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죄의 노예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표적과 이적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7-18)

그런데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과거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세계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북가주에 있는 한 한인 교회는 일년에 두 세차례 교인들을 훈련하여 선교지로 파송합니다.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이상 현지에 머물면서 현지의 선교사님들과 현지 교인들과 함께 짝을 지어 동네에 들어가 믿지 않는 현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언어도 안 통하고 현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성도들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현지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픈 곳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교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빌어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원주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로마에 입성하는 바울 (11-15)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세 달을 머문 뒤, 항해 하기에 적당한 시기인 2월 말 혹은 3월초가 되었을 때 260여명의 일행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한 배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여정:멜리데-시칠리아 수라구사(3일)- 이태리 반도 최남단 레기온(하루)-보디올(7일)-육로로 압비오 광장-트레이스 타베르네(삼관)-로마)

시칠리아 섬을 경유하여 이태리 반도 보디올에 도착하였을 때 그 인근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만났을 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3년전,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그는 로마 선교를 꿈꾸며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었습니다.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었고, 로마 교회와 바울과는 직간접적으로 관련은 없었지만 바울은 로마를 향한 불타는 마음과, 로마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로마를 방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9-10)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바울이 기도 중에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형제와 자매들을 얼굴을 맞대고 보니,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가득하였을 것이며,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로마 땅에도 존재하고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백부장의 배려로 바울은 일주일 가량 보디올에서 형제 자매들의 환대를 받으며 교제하면서, 길고도 거친 항해의 피로감에서 회복되었고 영적으로도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육로로 로마를 향해 걸어 가다가 로마로 부터 약 7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압비오 광장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리고 그곳으로 부터 약 14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트레이스 타베르네에 이르렀을 때, 바울 일행을 맞기 위해 로마 교회 형제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지체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며칠을 걸어서 바울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헌신한 형제 자매들을 만났을 때 바울은 감격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was encouraged)”(28:15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바울 곁에는그와 동역한 수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선교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고, 자신의 삶을 드려 선교 사역에 직접 동참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 전체를 할애해서 선교 사역에 동참한 소중한 동역자들을 로마 성도들에게 소개하며 그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선교의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기도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기도 편지를 읽으며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정한 시간을 내어 정기적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물질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와 정성을 담아 드리는 물질은 선교의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는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려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선교를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일입니다. 선교 바자에 시간을 내어 동참하고, 건강과 여건이 허락 한다면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님들을 격려하며 현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함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선교만큼 소모적이고 비효과적인 일도 없습니다. 자신의 교회의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요, 교회에 속한 교인들을 위한 것도 아니요,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순종/복종해야만 합니다. 의무감에서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우리는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형제들이 바울을 맞이하러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나왔는데, 본문에 기록된 ‘맞으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판테시스’인데요, 이 단어는 단순히 ‘만나다’라는 의미라기 보다 도시의 대표단, 또는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바울의 로마 입성이 갖는 상징성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발걸음이었지만, 바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 개선문을 지나 입성하는 ‘개선 장군’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울은 세상의 유명한 장군들이나 왕들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종려 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주로 입성하셨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누가가 가졌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사역을 이해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고후 5:7) (보는 것->세상의 관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 가운데 무엇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잠깐 있다 사라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보이지 않는 것에 포커스하여 살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로마 입성은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one small step’ 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one giant leap’(하나의 위대한 도약)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서 충성하고 헌신할 때, 우리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에 ‘큰 발걸음’이 될 줄 믿습니다.

Read More →
Exemple

• 본문: 행 27:27-44
7/25/2021 주일 낮 예배

오늘은 ‘영혼의 작가’로 불리는 켄 가이어(Ken Gire)의 책 ‘폭풍속의 주님’(원제:At Peace in the Storm)에 나오는 St. Patrick에 관한 글을 인용함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아일랜드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St. Patrick은 4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십 대 때 아일랜드에 노예로 잡혀 가서 목동으로 일했습니다. 노예 시절 패트릭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주님과 기도에 대한 사랑이 날로 자랐습니다. 스무 살 때 패트릭은 꿈에서 바다를 통해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해안으로 도망친 패트릭은 배를 타고 안전한 영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안한 삶을 살고 있던 패트릭에게 꿈을 통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이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부탁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사제를 거쳐 주교가 된 패트릭은 결국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땅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노예 시절에 알았던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아일랜드로 갔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아일랜드 전역을 다니며 설교했습니다. 전생과 윤회의 교리를 믿고 있었던 드루이드교를 주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대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패트릭은 가장 잔인한 폭풍을 기도로 이겨냈습니다. 패트릭은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이름을 딴 호심경 기도를 거룩한 방패삼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breastplate, 가슴막이)을 붙이고”)

“내 곁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좌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요새에 계시는 그리스도, 전차에 계시는 그리스도, 갑판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입술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눈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말을 듣는 모든 귀에 계시는 그리스도”

패트릭은 그리스도가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노예선 갑판에서 쇠고랑에 묶여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떨고 있는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열네살에 납치되어 살붙이 하나 없는 땅으로 끌려 갔을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인생을 바꾼 항해에서, 인생의 폭풍속에서, 패트릭은 자신과 함께 하셨던 그리스도의 임재를 깨달았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거친 폭풍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해도 보이지 않고 별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소망조차 없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로마행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짐들도 바다에 풀어 버렸고, 배의 기구들도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해 모든 사람들이 탈진하고 굶주려 죽기 일보직전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그들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7:24) 이 말을 들은 바울은 확신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릴것입니다”(27:25-26)

하지만 그 약속의 말씀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지 알지 못합니다. 27절 말씀에 보면 열나흘째(미항을 떠난 지)되는 밤이 되도록 그들이 탄 배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아드리아 바다(Adrian Sea, 이탈리아와 말타와 그레데, 그리스 사이에 있는 바다)에 이르렀을 때 사공들은 직감적으로 육지에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수심을 재어보니 스무길(37미터), 열다섯 길(28미터)정도 되는 것을 확인하고 해안에 가까이 온 줄 알고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사공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은 야밤에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다가 거룻배(구명선)를 바다에 내려 놓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구명선을 타고 도망하려는 것입니다. 계속 배에 있다가는 배가 파손되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 같으니까 안전한 구명선을 타고 야반도주를 계획한 것입니다.

큰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낙심하는 모습입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자포자기 하는 반응입니다. 두번째는 현실 도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공들처럼 내 한 목숨 살기 위해서 고난의 현장에서 빠져 나갈려고 애쓰는 모습니다. 세번째는 믿음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심한 환난으로 인해 낙심하지도 않고,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장에서 도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애쓰며,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땅히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엘라이자 휴윗(Eliza Hewitt)이라는 분은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1887년 필라델피아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녀는 문제 아동을 상담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학생을 조용히 타이르고 있었는데, 그 학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휴잇을 널판지로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로 휴잇은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상반신에 석고붕대를 감고 있어 대소변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였고,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치료 기간이 길어지자 주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던 자신에게 극심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흑인 여성이 흥얼거리며 병실을 청소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짜증썩인 목소리로 “이봐요, 청소하면서 뭐가 그렇게 좋다고 흥얼거려요!”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청소하던 그 여성은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 환경과 형편은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불평을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 즐거워요” 이말을 듣는 순간 휴윗은 수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되는 듯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불평으로 가득했던 휴윗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휴윗은 자신의 교만을 뉘우쳤습니다.

그 후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그녀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또 휴윗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떠 올리며, 휴윗은 사고 이후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했던 삶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교만하여 문제 학생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휴윗은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찾고 원망에서 용서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휴윗은 그 심정을 이렇게 찬송시로 적었습니다.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 에게‘> (원문)
내가 믿는 맘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니, 내게 아무 걱정이 없네
(The trusting heart to Jesus clings, Nor any ill forebodes)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노래하네. 짐을 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But at the cross of Calvary, sings, Praise God for lifted loads!)
삶의 길을 가며 난 노래하네. 주님을 찬양하고 찬양하네.
(Singing I go along life’s road, Praising the Lord, praising the Lord)
삶의 길을 가며 난 노래하네. 예수님께서 내 짐을 들어 주셨으니.
(Singing I go along life’s road, For Jesus has lifted my load)

휴윗은 ‘믿는 맘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니 내게 아무 걱정이 없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낙심하여 고난의 현장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짐을 대신 져주셨고, 그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그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구명선을 타고 도망갈려는 선원들을 보고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당신들이 구원을 얻지 못할것입니다”라고 하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버립니다. 선원들이 없이는 남은 항해를 무사히 마치기 불가능한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백부장과 군인들은 이제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 ‘죄수 바울’의 말을 더욱 신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선원들의 태도와 바울의 모습이 크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선원들은 자기 목숨만 건지기 위해 몰래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환난 가운데 처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폭풍우 가운데 요동하는 배의 키를 잡은 선장의 모습입니다. 폭풍우를 두려워하기 보다 배가 나아가야 할 목표점을 바라보며 배를 운전하는 강인하고 용감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배에 탄 사람이 모두 276명(37절)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날이 새어가자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합니다.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 미항을 떠난 지 열나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여 심히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배멀미로 토할 것 같았기에 음식을 먹지 못하였을 것이며, 심리적으로 심히 낙담되었기에 먹을 기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조만간 육지에 닿게 되고 구조될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4) 그들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배는 상하겠지만 그들의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육체의 고통이 심해지면 식욕 또한 사라집니다. 그런데 마음의 고통과 근심이 가득할 때도 식욕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면 밥 맛이 좋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는데, 마음속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면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밥맛이 없어 못먹습니다. 건강한 식욕, 맛있게 식사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음식을 먹기 전에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합니다.’ ‘축사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케리스테오’인데 성찬(주의 만찬)과 관련해서 사용되기도 하고, 음식 주심에 대한 감사나 일반적인 감사에도 종종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빵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미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음식을 나누어 먹기 전에 먼저 ‘축사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해 미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감사는 미리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의 미래에 행하실 일들에 대해 믿고 미리 감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서로 간에도 미리 감사를 표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성도님이 나에게 베풀어 준 사랑에 감사하듯이, 성도님이(집사님이) 앞으로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님이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 주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피스 메이커로서 가는 곳 마다 평화를 심고 위로를 전하고 기쁨을 전해주니 감사합니다. 미리 감사할 때 나에게도 매사에 감사와 기쁨의 복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밀을 바다에 버리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가다가 배가 드디에 해안가에 걸리게 됩니다. 배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갈 때 군인들이 죄수를 모두 죽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죄수가 헤엄쳐 도망하게 되면 자신들이 나중에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모든 죄수들을 구하시기 위해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백부장은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며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의 물건들을 의지하여 나가게 합니다.

선원들, 바울에 이어 세번째 사람 백부장에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가이사랴에서부터 로마까지 죄수들의 이송을 책임진 로마 군대의 장교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도착하였을 때 항해하기 위험한 시기이니 미항에서 겨울을 나면 좋겠다는 바울의 의견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서쪽 뵈닉스라는 항구로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친 풍랑으로 인해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그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담대함과 확신에 가득찬 모습은 항해에 경험이 많은 선장이나 다른 뱃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의 마음 속에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제안대로 밤에 도망갈려는 선원들을 보고 군인들을 시켜 거룻줄을 끊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제안대로 모든 병사들과 죄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먹게 합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배가 해안가 모래에 걸렸을 때 죄수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인들이 죄수들을 다 죽이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먼저 내려 육지에 나가게 합니다.

이방인 로마 장교인 무명의 백부장은 이제 바울을 돕는 ‘보호자’가 된 것입니다. 단지 로마 장교로서 죄수 호송의 책임을 다 하려는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로마행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곁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도 하고, 천사를 보내어 말씀을 전해 주시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천부장을 통해 바울이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받게 하시고,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바울에 우호적인 마음을 갖게 하시고 그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갑판에서나, 감옥에서나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하시며,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하시며, 동역자를 보내 주셔서 위로 받게 하시며 기쁨을 나누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나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따라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 사역에 헌신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도움의 손길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빌 1:6) 우리 안에 시작하신 착한 일은 ‘구원의 사역’입니다. 시작하신 구원은 재림 주로 오시는 주님 앞에 다시 설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완성된 구원을 이룰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사야 43:1b-3a)

인생의 항해 중에 배가 파선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 가운데 지날 때에도, 강을 건널 때에도, 불 가운데 지날 때에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배는 손상되었지만 한 사람의 생명도 상하지 않고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항해 중에 파선하는 것과 같은 환난을 당할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원들처럼 내 혼자 살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고난의 현장에서 도피할려고 하지 않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항해 중에 하나님께서는 로마 장교 백부장과 같은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한 것처럼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우리의 인생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온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항해
• 본문: 행 27:1-26
7/18/2021 주일 낮 예배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대략 80년 혹은 90년, 100년의 인생의 항해를 하다보면 순풍을 만나 평안한 여행을 할 때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광풍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직장 생활 할 때 97년말에 외환 위기(IMF 구제 금융)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가적인 위기 상황으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직장인들이 구조 조정 명분으로 일자리를 잃고, 자영업자들이 폐업하고,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도 어려움을 피해갈 수 없어서 전체 직원들의 30% 가량을 구조 조정하고,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하기도 했습니다. ‘금 모으기’등으로 온 국민과 기업이 힘을 합해 비교적 빠른 시간에 위기를 극복하기는 했지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았습니다. 누가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예상했겠습니까?

미국도 2007-2008년에, 1930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이후 최대의 경제적 위기였던 ‘금융 위기’를 경험하였습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회사들의 도산으로 촉발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퍼져서 전세계 금융 시장이 경색되고,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모기지 이자율이 치솟아 빚을 제 때 갚지 못한 집주인들이 집을 잃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직장을 잃게 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중산층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야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Covid-19 팬데믹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광풍’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입니다. 어제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코비드에 감염된 사람의 누적 총수가 1억 9천만명이며, 목숨을 잃은 사람이 4백만명이 넘습니다. 미국에서만 62만 4천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감염 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 목숨은 건졌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미국에서만 수십만명은 되리라 짐작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것처럼 바람에 밀려 평안히 순항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은 예기치 못한 풍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행전의 마지막 부분인 27-28장은 사도 바울의 로마행 여정의 기록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가는 긴 여정이었는데,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가이사랴에서 평안히 출발하였지만 얼마가지 못해 광풍을 만나 고생을 하게 되고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믿음의 항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영적 도전을 주는 귀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믿음의 인생 항해를 하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출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먼저 바울의 로마행 여정에 동행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한명의 이름은 2절에 기록된 마게도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입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데미 여신의 신봉자들이 소요를 일으켜서 주동자로 체포된 적이 있는데 그때 바울과 함께 체포된 사람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때 마게도냐로부터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왔던 신실한 일꾼입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골 4:10, 몬 1:24)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로마 감옥에서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네로 치하의 로마에서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은 1절에 “우리”라고 한 단어로 유추할 때 사도 행전의 기록자였던 의사 누가도 가이사랴에 있다가 바울의 로마행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몇달이 소요되는 기나긴 항해 가운데 바울에게 동행자가 있었다는 것이 바울에게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인생의 항해가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고,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며 위로가 되는 동역자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리스다고와 누가 외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 데 그 사람은 죄수들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는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입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인 그는 관대한 사람이어서 배가 시돈에 도착하였을 때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바울이 그곳의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나중에 타고 가던 배가 풍랑으로 파선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군인들이 죄수들이 도망하게 되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 죄수들을 죽이고자 하였을 때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27:43)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합니다.

‘이방 사람 율리오’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손길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무사히 도착하도록 하나님께서 로마 백부장 율리오를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여정 길목 길목 마다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여정을 지도를 참조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이사랴(‘아드라뭇데노’로 가는 배에 승선)-시돈-구브로 해안-루기아의 무라(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배로 갈아 탐)-니도-살모네-미항-뵈닉스로 가고자 하나 광풍을 만나 가우다 아래 거쳐-멜리데 섬에 도착)

본문 말씀을 근거로 믿음의 항해를 하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을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첫번째는,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9-11)
바울을 실은 배가 그레데 섬 미항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시기는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에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양력으로 9월하순에서 10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중해의 이 해역을 항해하는 일은 초겨울인 9월 중순이후에는 위험한 일로 여겨졌고,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1일 이후부터 겨울이 끝나는 3월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20여년동안 세 차례에 걸쳐 소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을 걸어서, 배를 타고 다닌 경험이 있는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근거로 지금 미항을 떠나서 계속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권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장과 선주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미항이라는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북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보내자라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기”(11)때문에 뵈닉스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선장과 선주는 항해의 전문가라 할 수 있었기에 백부장의 선택은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 틀린 결정이 아닌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백부장에게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은 늘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철저히 대비를 하고 준비를 한다고 할지라도 갑자기 몰아 닥치는 자연 재해 앞에 속수 무책인것이 현실입니다. (서부 산불, 동부 허리케인, 유럽 홍수)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의 경험과 지식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다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고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도 고백하기를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고 했습니다.

만약 백부장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바울의 말대로 했다면 죽을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항해를 하는 우리 모두, 사람을 신뢰하기 보다,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기 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향해의 선장되시는 하나님만 신뢰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인생에는 ‘순풍’도 있지만 ‘광풍’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3)
13절 말씀에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출발할 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순풍에 돛 달고서 배 떠나 간다’ 노래처럼 흥겹게 출항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Euraquilo)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는 ‘북동풍’(Northeaster)을 의미하는 센 바람입니다. 엄청난 역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배가 갈려고하는 반대방향으로 강한 바람이 몰아치게 되어 배가 정처없이 떠밀려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십년간 뱃사람으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과 선주도 예상치 못한 광풍이었습니다.

(예화: 2018년 7월, Table Lake at Branson에서의 Duck boat 전복 사고로 17명 목숨을 잃음, 현재 재판 중, 베테랑 선장이었지만 thunderstorm 예보에 주의 기울이지 않음)

우리의 인생 중에도 순풍처럼 평안한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유로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한적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배가 가지 않고 역풍을 만나 반대 방향으로 배가 떠밀려 가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탄 배가 광풍에 밀려 쫓겨 가고 있습니다. 가우디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배 뒤편에 매단 작은배,구명정, 배의 진행과 조종에 방해받음)를 잡아 끌어 올렸습니다. 태풍으로 배가 파선하지 않도록 줄로서 선체를 둘러감았습니다. ‘스르디스’(모래톱)에 걸리지 않도록 연장(돛)을 내리고 그냥(정처없이) 쫓겨 갔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잠잠해지지 않자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절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뱃사람에게 별은 방향을 지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인데 날씨가 흐려 별마저 보이지 않으니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배는 이리저리 표류하며 금새라도 세찬 풍랑에 뒤짚힐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 (살 소망)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을 잘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인생은 목적 없이 떠 다니는 배와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표류하는 배와 같습니다. 이정표가 되는 별도 보이지 않고 살 소망 마저 사라진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시편 107편에 혼돈에 빠진 인생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시 107: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순풍도 있지만 광풍도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인생의 항해 가운데 광풍도 찾아 오기 마련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풍만 주시지 않고 광풍도 허락하는 걸까요?

구원의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교만한 나의 죄를 회개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의 정욕을 구하며 살았던 나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만 붙잡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통중에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십니다.

시편 107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안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8-30)

인생의 광풍 가운데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고요케 하시고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선장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안심할 수 있습니다. (22-25)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소망을 잃어 갈 때, 한 사람이 일어나 서서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선장과 선주, 많은 선원들, 로마로 가는 죄수들을 통솔하고 있는 백부장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많은 죄수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22)
‘안심하라’는 선포는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이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배는 이리 저리 흔들리고 배에 싣고 있는 많은 짐들도 던져 버렸고, 배의 기구들도 버린 상황에서 폭풍으로 인해 배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금새라도 배가 뒤짚혀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선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자신의 경험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롯된 것임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3-24)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가이사 앞으로 인도할 것이며 당신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바울이 마치 선장이 된 것 같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목숨은 바울에게 달려 있다는 말씀이니까요. 주객이 전도되어 죄수 바울이 배의 모든 것을 책임진 사람이 되었고, 선장과 선주, 백부장은 두려워하며 바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하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여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 16:33하 )

또 사도 요한은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바울이 전한 메세지는 결국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배의 선장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배의 키를 잡고 계시며, 배는 파손될지라도 선원들과 모든 죄수들의 목숨을 보존할 것이며, 바울은 결국 가이사 앞에 서게될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 항해의 선장은 우리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배의 키를 내어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이것이 우리가 바울에게서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광풍이 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폭풍을 다스리시고 잔잔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며 배에 물이 차 올라서 배가 금방이라도 뒤짚힐 것만 같아서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 고물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라고 다급하게 외칩니다. 그랬을때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나신 후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였을 때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시니”(막 4:40) 제자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잠시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여호와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제단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을 때도 그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이 살려주심)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그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과 여러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믿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습니까?

풍랑이는 파도를 보고 무서워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는 믿음 가운데 굳게 서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인생의 항해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3가지 교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로,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인생의 항해에는 순풍도 있지만 광풍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 항해의 선장되시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 항해에서 승리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참고: 바울 로마 선교 여정 지도]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7-11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6:24-32
7/11/2021 주일 낮 예배

바울은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모두 5번에 걸쳐서 유대인들과 로마 총독,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형식은 죄수(피고인)의 신분으로 심문을 받으면서 스스로 변론하는 형식입니다.

첫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군중 앞에서, 두번째는 유대 입법,사법 통치기구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세번째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네번째는 신임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서, 마지막으로는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들 앞에서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할 때,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의 삶이 극적으로 변화되었는지 상세하게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바울이 로마로 떠나기 이전 가이사랴에서 마지막으로 로마 총독 베스도와 분봉왕 아그립바 왕에서 복음을 전한 이후 그들의 반응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복음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탁월한 복음 전도자인 사도 바울의 변증과 설득에도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고 복음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의 마음문을 닫게 하였는지 살펴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듣기를 원합니다.

벨릭스: 탐욕의 노예
총독 벨릭스에 대해서 2주전에 짧게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노예였는데 형의 도움으로 로마 총독의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성격이 포악해서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노예 근성과 폭군의 힘’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유대 지역에 일어난 소요를 잔인하게 진압한 책임을 물어 로마 황제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는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인 드루실라와 결혼하였는데, 드루실라는 그의 세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유대 분봉왕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한 것입니다.

행 24장에 보면,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지만, 재판을 연기하고 천부장 루시아가 오기까지 바울을 감옥에 구류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수 일 후에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에 대해 듣게 됩니다.

바울이 부부에게 전한 메세지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과거의 부도덕하고 사악한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의롭게 되어 장차 올 심판을 면하라는 메세지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복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벨릭스의 반응은 바울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여 대답하기를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24:25)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지만 복음 앞에 겸손히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만 되었으니(That’s enough for now!) 가라 나중에 시간이 허락하면 너를 부르겠다는 말입니다.

이말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거절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듣고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기로 결단하여야 하는데 결정을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벨릭스는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는 나누었습니다.’(24:26)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세지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나중에 틈이 나면 부를 것이라고 해놓고는,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에게서 돈을 받고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았기에 바울 가문이 부자라고 생각하였을 수 있고, 아니면 바울이 이방 교회들로 부터 거둔 구제 헌금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상당한 뇌물을 받고 그를 풀어 줄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해 듣고도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마음속에 탐욕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 물질에 대한 욕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예 출신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그였기에 어쩌면 그는 물질과 권력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 상태는 영적인 노예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거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벨릭스처럼 탐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보면, 열매맺지 못하는 3종류의 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일하게 말씀(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만, 길가 밭, 돌 밭, 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맺지 못합니다. 이 중에 가시떨기 밭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말씀(복음)은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 자’ (마 13:22)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복음을 막는 장애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왜 복음을 듣고도 마음문을 열지 못했습니까? 그의 마음속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육체의 정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재물의 유혹’ ‘세상의 염려’가 있지 않은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없애어 주셔서 말씀을 받을 때에 아멘!으로 받고, 말씀을 듣고 깨달아 30배, 60배, 100배 결실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 베스도: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벨릭스에 이어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베스도는 전임자인 벨릭스에 비해서 훨씬 지혜롭고 정직한 관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임한지 2년만에 재직중에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베스도가 어떤 사람인지 행 25장부터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스도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가이사랴 감옥에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지나가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도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갈 예정이니 바울에게 옮지 않은 일이 있으면 유력한 자들이 함께 내려가서 바울을 고발하라고 말합니다.

로마 관리로서 그는 로마법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기를 원했던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심리하게 되었을 때 로마 시민인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하였을 때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그렇게 할 것이라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로부터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신임 총독 베스도를 문안하러 가이사랴를 방문하였을 때 바울 사건에 관해 아그립바 왕에게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가의 자손으로 유대인의 관습과 법률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의 판단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해서 말할 때에 유대인들의 고발의 부당함과 그의 무죄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25:24-25)) 그리고 그가 황제에게 상소하였기에 그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문제는 황제에게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어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를 찾기 위하여 심리를 진행한다고 말합니다. 죄목도 밝히지 않고 죄수를 보내는 일이 무리한 일인 줄 그는 판단한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이러한 말로 미루어 보건대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발건에 대해 공정한 재판관의 자세로 로마법의 절차에 따라 처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알지 못하는 초임 관리로서 경험이 많은 아그립바 왕의 도움을 얻어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재판을 할려고 애쓰고 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정치인인지라 그가 통치하는 지역 주민들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5:9 에 보면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임 총독 벨릭스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24:27)둔 것처럼, 베스도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26장 1절에서 23절에 걸쳐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고 자신의 회심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상세히 설명하자 베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26:24) 여기서 ‘미쳤도다’라는 단어 헬. ‘마이네’는 ‘미치다’ ‘헛소리를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당시 대학자였던 가마리엘 아래에서 고등학문을 공부한 학자임을 알게 된 베스도는 그의 ‘많은 학문’(great learning)이 그를 미치게 하였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words of sober truth)을 하나이다”(26:25) 원어로 말하면 ‘진리와 맑은 정신으로 말하는 사실의 말들’을 하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베스도 역시 바울의 복음 전도의 메세지를 듣고도 마음문을 닫고 바울을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베스도의 마음문을 닫게 한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지성과 합리성입니다.

그는 로마 관리로서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사랴로 부임하기 전에 여러 곳에서 지방 관리로서 통치 경험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합리성과 객관성, 지성과 경험을 갖춘 훌륭한 로마 관리였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복음을 들었을 때 마음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세지를 진지하게, 겸손하게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신흥 사이비 종교를 추종하는 무리의 리더가 내뱉는 ‘헛소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지성과 합리성이 복음의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닐 때에도 이와 같은 일들을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아덴 사람들은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심이 많은 그들은 각양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며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관심을 가지고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조롱하며 복음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지성인중의 지성인이요, 교양인중의 교양인이었던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트렌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듣기 원했고, 바울과 더불어 논쟁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 방문한 아테네에서는 전도의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게 기록한 고린도 전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과 논쟁하는데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논쟁과 변론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그는 깨닫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8, 21)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의 도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자기 지혜’ ‘세상의 지혜’로 무장한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더 높은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세지를 어리석은 이야기, 허황된 소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성의 한계를 알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마음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더 높은 지혜’와 ‘측량할 수 없는 지식’앞에 겸손히 무릎꿇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지식은 우주 만물에 대한 알지 못하는 지식에 비하면 얼마나 미천한 것입니까? 태양계에 속한 몇개의 행성들중에 인간이 탐구한 행성이 몇개나 됩니까? 최근에 화성에 인류 최초로 탐사 로봇을 착륙시키고 사진을 찍고 화성의 암석들을 캐내어 조금 가져 왔다고 하여 온 세상이 환호하였지만, 이 우주에 존재하는 셀수도 없는 별들 중에 인간이 탐사하고 있는 별은 고작 몇개에 불과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였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훨씬 더 광대함을 깨달으며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곳에 모여 예배 드리는 분들 중에,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여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한 분이라고 계신다면, 오늘 이 시간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으로 모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아그립바: 교만한 정치인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주후 44년에 그의 아버지(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17살이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로마 총독들이 그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18년 뒤에는 점차 영토를 확장하여 갈릴수 호수 북쪽과 북서쪽 영토, 여러 갈릴리 도시와 베레아의 몇몇 도시까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성전 통치권, 헌금 관리권, 대제사장 임명권등을 가진 권력가였습니다. 그는 로마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모든 관습과 규례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26:3))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자기 누이인 버니게와 살고 있을 정도로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고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with great pomp)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25:23)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은 변명할 기회를 얻어 자신이 유대인들로 부터 고발당한 것이 부당한 일임을 변론합니다.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 즉 구약 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 때문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강한 빛으로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전도자의 사명을 전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전도 설교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짧은 시간에)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6:28)
총독 베스도의 반응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네가 짧은 시간에 전하는 말을 듣고 내가 설득당하여 그리스도인 될 줄 아느냐? 나는 네가 무슨 말 하던지 설득 당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아그립바의 마음속에는 교만이 가득 차 있었기에 복음이 자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권력을 사랑하고 권세 행사하기를 즐기는 자였기에 복음 앞에 그의 마음은 돌처럼 딱딱한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기독교, 아니 종교를 믿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광신도들이 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도 읽어 보았고 교회도 다녀보아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오해 때문에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교회에 가면 헌금을 강요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다, 교회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되어 간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교회는 맨날 싸우기만 한다.)

교회의 본질은 놓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 교회의 어두운 모습들로 인해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반응들입니다.

아그립바도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조롱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아그립바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나의 지혜로 설득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꺾어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복음을 거부하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서 복음을 가로막고 있는 세가지 장애물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벨릭스 총독에게는 탐욕이, 베스도 총독에게는 지성과 합리성이,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에게는 교만이 복음을 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탐욕과, 하나님 보다 높아진 지성과 합리성, 그리고 교만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길을 걷는데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또한 내가 기도하고 있는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장애물들이 사라지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히 이루실 줄 믿습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7-04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6:1-23
7/4/2021 주일 낮 예배

신약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180도 다른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분봉왕 헤롯 아그빕바 2세 앞에서 전한 자신의 ‘신앙 간증문’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는 사도 행전에 모두 3번에 걸쳐(9장, 22장)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회심은 초대 교회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구약 율법에 심취하였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말할 만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 사울은, 성전을 모독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나사렛 출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초대 교회)을 박해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생각하고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위임장)을 받아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을 돌아 다니면서 그들을 처벌하고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더우기 그들에 대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가서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26:9-11) 여기까지가 그의 인생의 B.C. (Before Christ)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뒤짚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성도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협과 살기(murderous threats)가 등등하여’(9:1) 그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기 위해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부터 214 Km가량 떨어진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낮 12시가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의 동행하던 사람들을 둘러 비춥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다 땅에 엎드러졌을 때, 하늘로 부터 히브리 말(Aramic)로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씀은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루는 다른 부분(9장, 22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씀입니다. ‘가시채’(goad)는 동물을 몰 때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를 말하는데 끝부분에 쇠붙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다’는 당시 민간에 널리 사용되던 속담을 인용한 것인데,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가는 짐승이 반항하기 위해 뒷발질하는 것이 쓸데 없는 행동인것 처럼 ‘쓸데없는 저항’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강한 빛으로 그에게 임하셨고,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행위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순간 공포에 휩싸였고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26:15)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였는데, 강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사울이 자신을 박해하고 있다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14),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

이 구절을 통해서 핍박받는 교회, 고난 중에 있는 교회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복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고난받고 핍박받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눈물을 보고 계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된 성도들은 지금도 신앙을 지키는 것 때문에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그 길에서 그 빛의 광채로 인해 볼 수 없게 되어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22:11)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엘리트 중의 엘리트요 율법에 흠이 없을 만큼 도덕적인 사람으로 자부했던 사울은 강렬한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교만과 악행을 꺾으시는 주님의 손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치 앞으로도 나아 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다메섹에서 유대인들로 부터 칭찬받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위해서 그를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문을 열게 하셔서 핍박자 사울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 주시고 그를 형제로 받아 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의 목적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22:14-15)

예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찾아 오셔서 그를 변화 시키신 목적은 모든 사람 앞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복음 전도자 바울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내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셨는지,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사울에게 들려주신 말씀 중에 그를 찾아 오신 목적(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26:16-17)

사울이 본 일과 장차 그에게 나타날 일에 종과 증인을 삼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종’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요, 로마의 전함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예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인데 사형 집행이 유예되어 대신 중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노 젓는 일만 할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울을 찾아 오시고 그를 ‘종과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의 기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나의 육체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고후 5:15)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갈때,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참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썩어질 것들에 얽매여 죄에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갈 때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는(갈 2:20) 복된 인생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은 한 마디로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중에 18절 말씀은 사울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 포함) 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복음의 의미, 예수 믿어 구원 얻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사울을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I am sending you to them to open their eyes and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to God, so that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 and a place among those who are sanctified by faith in me. (Acts 26:18, NIV)

1) 그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2)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power)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3) 그 결과(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4)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들 가운데 기업을 받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근거로하여 복음의 본질에 대해 상고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 복음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고 영생을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정통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4-16)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보고 들을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천국을 보게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부터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7살때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영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였고, 11살 때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18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권고로 해군에 입대하여 소위 후보생이 되었으나 엄격하고 고단한 선상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탈영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체포되어 옷을 벗겨 매를 맞고 면직되고 아프리카 노예 상선에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끔찍한 15개월간의 노예 생활 이후에 그는 노예 무역선의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748년 3월 10일 노예 무역선을 타고 항해 하던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그는 과거의 신앙 고백, 부르심, 경고, 방탕한 생활, 노예선에서 구출받은 사건등을 생각하며 “만약 내가 오랫동안 대적했던 성경 말씀이 사실이 아닐까?” 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노예 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돈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1750년 2월, 어머님의 친구의 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하게 되었고, 리버풀에서 조수 측량사로 근무하면서 여가 시간에 성경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고 이후 시리아어,라틴어, 불어까지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발견였습니다. 1764년 오올리에서 목회자로 청빙받아 사역을 시작하였고 15년동안 목회에 전념하였습니다.

존 뉴턴은 노예 무역선의 선장과 같은 부도덕한 일을 하던 그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찬송시를 적었습니다.

“Amazing grace How I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존 뉴턴의 눈을 뜨게하였고, 그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복음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 8:12)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적으로 흑암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요 1:9) 하지만 어둠 가운데 거하던 유대인들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요 1:5)

하지만 참 빛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고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요 8:12) 마태는 이사야서 9장 1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큰 빛’으로, ‘사망의 땅과 그늘에 거주하던 자에게 비취던 빛’ 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5-16)

복음은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어둠의 일을 좋아하며,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빛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redemption), 곧 죄 사함(forgiveness)을 얻었도다” (골 1:1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power of darkness)에서 건져내어(rescued)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 동안 노예로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노예되어 육체의 소욕(desire)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아들의 나라 즉 영생과 진리와 평화의 나라로 옮겨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흑암=사탄과 동일어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믿기 이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엡 2:2) 살았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을 말합니다. ‘지금 불순종 하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2:2)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 천국, 구원, 심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안개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쾌락과, 이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며 살게 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추깁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라고 속삭입니다. 십자가를 버리고 영광의 면류관에만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좁은 길, 진리의 길을 걷지 말고, 넓은 길, 편안한 길을 걸어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안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서”(엡 6:10) “마귀의 간계를 대적해야 합니다.”(엡 6: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안에서 기도와 간구로 깨어 구함으로 대적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 살던 우리를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3.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고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선행을 많이하고 구제를 많이하고, 심지어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죄인이며,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롬 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를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의 ‘죄’(하타)는 ‘(과녁을) 빗나간’ ‘무지한’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에 못미친다는 뜻입니다. 상대적인 죄가 아니라 절대적인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인간의 속성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두려움과 불순종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이 사는 세상에 살인이, 미움이, 전쟁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고, 이웃과 원수되게 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만드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시기 수천년, 그 이전의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구속사)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구원자)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메시야는 죄 가운데 있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 제물(화목 제물)로 드려질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월절’(Passover)은 가장 큰 명절이요 축제일입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고집스러운 바로 왕과 애굽의 우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마지막 재앙은 모든 동물의 초태생과 가정의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로의 가정을 비롯하여 애굽의 모든 가정마다 죽음의 심판이 임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던 고센 땅에는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고 그곳을 뛰어 넘었다고 해서 유월절이라 명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뿌린 집마다 “그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셨다”(출 12: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성경적 용어로 대속 제물, 화목 제물-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예수님)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심을 믿으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의롭게 되는(칭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로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4.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얻게 합니다. ‘기업’은 구약 성경에서는 ‘땅’을 의미했지만,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유산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믿는 자들은 보이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육신의 장막은 무너지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고후 5:1)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mansion)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

또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성경의 약속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잠자는 첫 열매가 되신 것 처럼,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것입니다.” (고전 15:52)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 갈 때, 날마다 천국의 소망, 영생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복음의 본질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 복음은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 예수님을 통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6-27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5:1-27        6/27/202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고 잘 아는 성경 구절 중에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어떤 성경 사본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 기쁘고 즐거운 일들 뿐만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온 지난 날들을 뒤돌아 보면, 이 말씀이 진리이구나라고 깨닫게 되고 고난을 통해서 나를 연단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지만, 막상 내가 현재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을 때는 감사와 기쁨 보다는 한숨과 원망,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 모든 것이 순탄할 때에 믿음 생활 잘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군인들이 평상시에 훈련을 열심히 해야 전쟁때에 실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믿음의 성도들은 평안의 시기에 기도와 말씀안에서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해야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고난과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을 찾아 오신 부활의 주님은, 핍박자 사울을 변화시켜 전도자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그에게 주신 새로운 인생의 사명은 “내 이름(예수 그리스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는” (행 9:15)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를(예수 그리스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되는” (행 22:15)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전한 말)

그런데 복음 전도자 바울의 미래는 평탄하고 화려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대로 바울이 걸어가야 할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 9:16)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로마 선교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후에 로마로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피력하였습니다. (행 19:21) 그리고 고린도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로마서 1:10 에서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로마 수비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밤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하)

로마 선교의 비전은 그의 심장을 뛰게 하였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고,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지만 바울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로 인도하실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에 의해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의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결코 짧지 않는 2년의 시간은 바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기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게 된다면 그들은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바울을 살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고려해 볼때 바울에게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부(헤롯궁) 감옥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소요가 잠잠해 질 때 바울은 군사들의 호휘를 받으며 로마행 배를 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의 시간과 환난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가이사랴 2년간의 감옥 생활처럼, 요셉도 억울하게 2년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요셉은 함께 옥에 갇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정확히 해석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삼일만에 전직을 회복하였지만, 풀려나면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전하여서 옥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는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립니다. 2년이 지난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자, 그 때 비로소 2년전 감옥에서 만난 히브리 청년, 요셉이 생각나서 요셉을 바로에게 꿈을 해석할 사람으로 추천합니다.

2년간의 시간은 청년 요셉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2년간의 시간은 요셉에게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시편 기자의 기록처럼 요셉은 감옥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말씀으로 연단받고 있었습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감옥에서 말씀으로 연단받은 요셉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큰 인물(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고난이라는 풀무불(용광로)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 시간들을 견디어 내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고난의 용광로를 거쳐야만 우리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됩니다. 우리안에 자리잡고 있는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조급한 마음, 염려, 불신앙의 지꺼기들이 말씀의 불로, 성령의 불로 태워집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 받는 내용과 취임 문안 인사 차 방문한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 베스도 총독이 죄수 바울의 사건을 소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바울 (25:1-12)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벨릭스는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시리아인들 간에 발생한 분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벨릭스를 이어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사람이 보르기오 베스도였습니다. 베스도는 2년 뒤 재직 중에 죽게 되지만, 당시의 여러 기록을 보면 전임자 벨릭스와 후임자 알비누스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공정한 지도자였습니다.

부임한 지 삼일 후에 신임 총독 베스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 그들로부터 지역 통치에 협조를 구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울에 대한 고소건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신임 총독에게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끌어내고자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바울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베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자기가 멀지 않아 가아사랴로 떠날 예정인데, 유력한 몇 사람이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바울을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의 소송 절차는 세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기소자가 고소를 공식화하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적절한 공식적 고소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통치권을 갖고 있는 사람 자신’이 그것을 들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총독이 소송을 심리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8-10일이 지난 후 신임 총독 베스도 심리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재판장 자리에는 베스도가 앉아 있고, 고소인(검사) 자리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고석 자리에는 변호사 없이 바울 혼자 앉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지만 입증할 만한 증거를 대지 못하자, 바울이 스스로 변론을 시작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종교적인 이슈) 가이사에게나(정치적인 이슈)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바울의 주장이 정당함을 알면서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에게 되묻기를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느냐”라고 합니다.
베스도는 전임자 벨릭스에 비해서 비교적 지혜롭고 공정한 사람이기는 했느나, 그 역시 로마 정부의 관료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정의와 진리를 따르기 보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베스도나 벨릭스,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했던 빌라도 모두, 진리와 공의를 버리고 사람들의 호소와 여론을 따랐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을 기울인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용기있는 지도자, 용기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 부와 지지하는 사람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진리와 공의를 따라야함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의식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세상속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부름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의 메세지를 던져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내가 핍박받더라도 진리와 공의를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진리와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나는 당당히 성경의 진리를 따르겠다는 다짐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 머뭇 거리거나, 두 다리를 걸치고 나에게 유익한 것만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뭐라고 하던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언제나 복음 앞에서, 진리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바울은 베스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종교 법정에서 심문을 받느니 차라리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상소)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지방 속주 법정에 가지 않고 상급 법원인 로마 법정에 호소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구체적으로 ‘provocatio’라는 것인데, 이 제도는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즉결 처벌이나 강제 집행이나 고문을 하는 것으로부터, 비공개적인 혹은 공개적인 체포로부터, 그리고 이탈리아 바깥에서 치안 판사가 실제적인 재판을 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이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말합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듣고 배석자들과 상의한 후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유부단하고 사악한 벨릭스가 통치하던 2년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바울에게 하나님의 때가 되자, 비교적 합리적이고 공정한 새로운 총독 베스도의 손을 빌어 로마 군인들의 호위 아래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일하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구약 에스더서에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민족 멸절’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드드개와 에스더, 이방왕과 신하들을 사용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열방을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 선 바울 (25:13-27)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립바 2세)과 버니게가 신임 로마 총독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시사랴에 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행 12장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처음에는 작은 영토을 다스렸으나, 나중에 갈릴리 호수 북쪽과 북서쪽 여러 도시들까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그에게 성전을 돌보는 일과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한 버니게는 그의 누이였는데, 그녀는 불과 13세에 자기 삼촌인 칼키스 헤롯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칼키스가 죽자 자기 동생 헤롯 아그립바 2세와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인사하러 왔을 때, 그들이 머물고 있는 동안 베스도는 벨릭스로 부터 물려받은 바울의 소송 사건을 끄집어 냅니다. 유대 지역과 유대인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헤롯 아그립바 왕으로 부터 판결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 사건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합니다.
1) 바울은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소하여 넘긴 사람인데, 그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재판)하기를 청하였으나, 로마 시민인 바울을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피고인의 변명- 내어주는 것이 로마법에 합당치 않아 자신이 재판을 심리하게 되었다.
2) 원고들의 주장을 들어보니 피고의 범죄함을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고,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았 있다고 (부활 증거) 바울이 주장하는 것을 문제 삼아 고발함.
3)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 받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가이사에게 호소하겠다고 함.

베스도의 말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 중 한가지는 바울이 유대인들로 부터 고발당한 것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반역을 꾀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 즉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당시 중범죄자들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으나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삼일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제자들에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 말을 전해듣고,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고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할까 두려워 경비병들을 고용하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24시간 지키게 하고 큰 돌로 입구를 인봉하여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죽은지 삼 일째 되던 안식일 후 첫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8:11-15에는 경비병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이 계략을 꾸민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 소식이 가져다 줄 엄청난 충격을 예상한 그들은 장로들과 의논한 후,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말하기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자기들이 잘 때에 시신을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라고 합니다.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28:15)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군인들이 퍼뜨린 거짓말을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주장은 사실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았다고 말하면 거짓이지만, 산 자를 살았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만 5백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초대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영원한 소망이요 믿음의 근거입니다.

바울이 고발당하고 목숨을 걸기까지 전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구원자)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진실함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죽을 육체도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셨을 때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로마 총독들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장차 로마에 가서 로마 관료들과 왕실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영적인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의 긴 시간을 보낸 이후 베스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마침내 로마로 가게 된 바울과 함께 하시고, 그의 삶의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가 처한 모든 처지와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6-20
sermon manager 박성환목사

• 본문: 행 24:22-27
6/20/2021 주일 낮 예배

지난 주, 성도님들의 기도 덕분에 목회자로서 처음으로 미주 한인 침례교 총회에 잘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모두 4분의 강사님들을 통해 큰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4분의 강사님들 중 한 분인 워싱턴 D.C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임 용우 목사님(워싱턴 성광 교회 담임)의 간증을 잠간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시작할려고 합니다.

임 목사님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서 결혼하고, 미국에서 회계사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며 세상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다가, 30대 후반에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목회자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린 분입니다.

14가정과 함께 교회 개척한 지 1년이 지나서 성도들이 2백여명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으로 본당이 6백석 가량되고 Room 이 57개나 되는 미국 교회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초창기 부터 선교에 올인하여, 개척한 지 5년째 부터 선교사를 파송하여 교회 개척한 지 20년째 되는 올해 현재 50개국에 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후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의 50% 이상을 선교비에 지출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목사가 될려는 계획을 가지고 아내에게 말했지만, 예상한대로 아내의 반대에 부딪혀서 7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합니다. 7년만에 아내의 허락을 받고 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딸이 아빠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를 할려고 하나 잔뜩 긴장하고 들어갔더니 딸이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앞으로 목회 할려면 돈하고 여자를 조심해!” 딸의 당돌한 조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딸의 얘기를 늘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하고 존경받는 수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명예를 잃고 지탄을 받고 심지어 범죄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정치인, 교육가, 예술가 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일들의 근원을 살펴보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물질), 성(쾌락), 권력(명예심)의 문제들입니다.

돈. 섹스. 권력” 은 ‘리차드 포스트’라는 분이 저술한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

“돈과 섹스와 권력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이것을 오용하고 남용하면 하나님의 성스러운 것을 더럽히는 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외에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유대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입니다. 두 사람은 당시 기독교 최고의 선교사 바울을 통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여러차례 복음을 전해들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믿음의 결단을 가로막고 있었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의 믿음 생활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벨릭스는 지난 주에 간단히 언급한 것 처럼 형 Pallas 의 도움으로 로마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 사람입니다. 두 형제는 원래 노예였는데, 로마 정부가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게 되고, 해방된 노예 출신들을 관직에 등용할 때에 그의 형제 Pallas가 등용되어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신임을 받던 형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는 A.D 52-59동안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역대 총독들 중 가장 악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는 노예의 마음을 갖고 왕의 권세를 행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 명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모두 왕족의 딸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드루실라는 유대 여자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여러명의 헤롯 왕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영아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한 왕은 헤롯 대왕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7명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인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의 재판을 주관한 사람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투옥했던 사람인데 하나님의 천사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두명의 딸과 한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 딸이 25장에 등장하는 버니게이며 둘째 딸이 드루실라입니다.

드루실라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유대 여인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콤마게네의 왕자 아피파네스와 약혼하였으나 아피파네스가 할례를 거부하여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후에 드루실라는 시리아 에메사의 왕 아지주스(Azisus)와 결혼하였는데,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미모의 드루실라를 아내로 삼을 욕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아토모스라는 마법사를 보내어 드루실라를 설득하여 아지주스 왕과 파혼하고 자신과 결혼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은 유대인 여자가 이방인과 결혼한 것이므로 유대 율법을 크게 어긴 일이었습니다.

드루실라는 벨릭스가 총독에서 물러난지 20년후, 아그립바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과 함께 휴양지 폼페이에 살다가 폼페이 화산 폭발 때 (A.D. 79) 용암에 묻혀 죽었다고 전해 집니다.

벨릭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의 고발 내용과 사도 바울의 변호하는 말을 들은 이후에 천부장 루시아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면서 바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허락합니다.

수일이 지난 이후 벨릭스는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습니다. 22절에 벨릭스는 이미 바울이 전하는 ‘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바울로 부터 ‘예수 믿는 도’를 자세히 듣게 됩니다. 말하자면 전도자 바울로 부터복음을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접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본문은 간단히 한 줄로 적고 있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세지는 의와 절제와 심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6:8 기록된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convict)하시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인간들의 죄에 대하여, 의로우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불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전한 메세지는 불의하고 사악한 삶을 살고 있던 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의’는 벨릭스의 잔인함과 압제의 죄와 관련시키고, ‘절제’는 드루실라에게 이끌려 그녀와 결합하도록 만든 억제 할 수 없는 욕정에, 그리고 ‘장차 오는 심판’은 그들의 불의와 부도덕으로 인해 그들이 불가피하게 받게 될 처벌과 관련시킵니다.”(존 스토트, 사도행전)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도 결단하지 못하였고, 바울을 2년간 가이사랴 감옥에 구금시킵니다. 벨릭스는 이후 소요와 유대인과 시리아 거주민 사이에 일어난 폭동을 난폭하게 진압한 일로 인해 로마로 소환되고, 보르기오 베스도가 유대 총독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근거로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복음을 듣고도 마음문을 열지 못하게 된, 복음의 장애물이 무엇이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물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25-2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벨릭스는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를 통해서 구약 성경과 유대교에 대해서, 새롭게 전파되는 기독교에 대해서 익히 들어서 풍부한 지식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의 가치관과 사상 체계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메세지였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한 메세지를 듣고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을 보내면서 지금은 가라(결정을 미룸)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더 자주 불러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목적은 복음을 더 자세히 듣고자 함이 아니라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목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벨릭스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이방 교회들이 헌금한 거액의 후원금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의 결례 의식 비용을 대신 지불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가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벨릭스는 바울로 부터 뇌물을 챙길려는 목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것입니다. 뇌물을 받으면 바울을 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노예 출신이었던 벨릭스는 몸은 자유로운 자가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물질의 노예였습니다. 로마 정부의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윤리의식과 양심도 버린 채,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불의를 일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탐욕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갈망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 13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가지 땅의 비유)에 기록된 것처럼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떨기’밭이 의미하는 것은 ‘말씀은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내 삶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을 살펴 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재물의 유혹이 없는지,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은 없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돈/재물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면 칭찬받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회개하고 변화되어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누겠다고 말했습니다. 한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수산나와 요안나와 같은 여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질)로 예수님의 사역을 섬겼습니다. 부자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하였습니다.

큰 다락방이 있었던 마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다락방을 사도들과 성도들의 기도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고, 빌립보의 직물 사업가 루디아는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구원 받은 이후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예배와 기도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유럽 최초의 가정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물질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드리는 자들의 헌신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cannot serve God and mommon. KJV) 그런데 예수님은 돈을 말씀하실 때 아람어로 ‘맘몬’(momm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맘몬은 재물과 탐욕의 신을 의미합니다.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맘모니즘의 노예’라고 합니다. 맘몬은 비인격체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벨릭스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벨릭스처럼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여 믿음 생활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진 물질도 주의 것이요 시간도 주의 것이요 재능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소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그들은 욕정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벨릭스는 세번 결혼하였는데 모두 왕족의 딸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권력과 명예, 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번째 결혼, 즉 드루실라와의 결혼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미 한 남편의 아내가 된 드루실라를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 아토모스라는 마법사를 보내어 그녀를 설득하여 남편과 이혼하도록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불법을 자행한 것입니다. 드루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가문은 악명이 높은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 헤롯 대왕은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 영아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명령한 왕이었고, 그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도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투옥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언니 버니게는 삼촌 칼키스 헤롯과 결혼하였다가 남편이 죽자 자기 동생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같이 살았습니다. (근친상간의 죄, 행 25:13)

사악한 부모 아래서 자라서 그런지 그녀 또한 건강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벨릭스가 보낸 마술사에 계략에 넘어간 것도 쾌락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절제되지 못한 성 생활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육체의 쾌락을 즐기며 가정의 가치를 소홀하게 여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절제’에 대해서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벨릭스)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였으나’ 복음 앞에 마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번 결혼에 실패하고, 지금 사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 여인은 진리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 샘물이 되심을 깨달았을 때 그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성(sexuality)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성경적인 방법대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누리게 되면 축복이 되지만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게되면 죄악이 됩니다. (다윗의 예)

‘성은 영성의 적이 아니고 친구이다’(도날드 괴르겐)

요일 2:16-17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 모두 벨릭스와 드루실라처럼 육신의 정욕과 쾌락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자신을 쳐 복종하며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7절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벨릭스는 공의와 진리를 구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법에 비추어 볼 때 위법한 행동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바울을 계속 구금하여 둡니다. 바울은 그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2년동안이나 가리사랴 감옥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벨릭스의 관심은 유대인들의 환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을 풀어주게 되면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킬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그는 ‘지역의 치안 유지와 평화’를 위하여 무죄한 바울을 감옥에 감금해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비겁한 행동은 이전 총독 빌라도의 행동과 비슷합니다.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께서 무죄한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을 듣고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무리 앞에서 자신의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하니 너희들이 당하라고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병들에게 내어 줍니다.

벨릭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세로 무죄한 자를 석방시켜 주어야 했지만,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진리를 따르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였기에 비겁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권력과 명예를 지키는 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 앞에 결단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빌라도와 벨릭스처럼, 진리를 따르기 보다 사람들의 소리와 여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내가 손해를 보고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진리를 따르겠다는 결심과 결단이 매일의 삶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 29:25)

우리가 두려워 할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갈 때 우리의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고 우리의 삶은 안전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유대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 관해 살펴 보면서, 복음을 받아 들이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 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두번째는 육체의 쾌락/정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삶 가운데, 이러한 장애물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6-13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4:1-23
6/13/2021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가이사랴 헤롯 궁에 머물고 있는 바울을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무리들이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통해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송사하는 장면과 이에 대한 바울의 변명(변론)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40명 유대인 결사대가 자신을 죽일려고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카를 통해 천부장에게 알리고,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의 안전을 고려하여 군사들을 동원하여 급히 밤에 바울을 로마 총독이 있는 가리사랴로 호송케합니다. 무려 470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들이 바울 호송 작전에 투입됩니다.

바울의 로마 선교의 비전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무리들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로마 총독 본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로마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아시아와 헬라 지역(그리스 반도)에 복음을 편만히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마음속에 로마 선교의 비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로마 선교의 비전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동역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1차적으로는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이방인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로마 선교의 비전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로 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었지만 부활의 주님께서는 밤에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로마 선교의 비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더라”(23:11)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매여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서, 결국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의 육체는 쇠사슬로 인해 제한을 받고 고통을 받았고, 그의 신분은 자유인에서 죄수로 전락하게 되었지만, 그를 통해 복음이 당시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전파되도록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 가운데 그를 인도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Tertullus)의 바울에 대한 고발 내용입니다. (24:1-9) 두번째 부분은 이에 대한 피고인 바울의 변론의 내용입니다. (24:10-21)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는 아마 당시 최고의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지식과 경험을 이용하여 바울에게 유죄 판결이 나게하고 궁극적으로 바울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도록 할 참이었습니다.

더둘로의 고소는 당시 로마 법정에서 하는 변론 형식을 따라서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 서언(exordium): 총독을 칭송하는 것으로 서론을 시작합니다. 3절.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으로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더둘로는 온갖 미사 여구의 말로서 벨릭스 총독에게 아부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벨릭스의 통치 시기에 소요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정국은 혼란스러워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시리아인들에게 공정하지 못했고, 그의 군대는 그의 비호아래 유대인 부유층을 약탈했습니다. 이 일로 그가 해임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했습니다.”(인용)

2) 진술(narratio): 더둘로는 두 가지 이유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전염병과도 같은 소요 조장자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바울이 성전을 모독한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일컫기를 ‘전염병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전염병’(헬, 로이몬)은 콜레라나 장티푸스, 천연두, 페스트등을 의미하는데 그 특징은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Covid-19가 위험한 것이 바로 바이러스의 전염 속도는 독감에 비해 빠르지는 않지만 전염력이 몇배 강하고, 감염자의 치사율(사망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변이 바이러스는 기존의 바이러스보다 전염력도 더 강하고 전파 속도도 빠르고 치사율도 높아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라고 한 것은 바울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악성 바이러스처럼 가는 곳 마다 소요를 일으켜서 사회를 혼란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더둘로는 또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자라난 고향 마을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 적용되었고, 이차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된 말이었습니다. 즉 ‘나사렛 이단’이란 말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신흥 사이비 집단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경멸과 조롱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참고로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을 ‘노쯔리’( 나사렛 사람 )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적개심과 경멸을 드러낸 말입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교는 정식 종교로 인정하였지만 다른 종교-예를 들면 기독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둘로는 이단 종교인 기독교가 번성하도록 내버려두면 사회 혼란만 가중된다고 총독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고발 내용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는자’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변론 형식의 세번째 부분인 3) 증명/확증에 해당하는 ‘Confirmatio’입니다. “여기서 더립히다’라는 말은 세겜이나 앗수르와 같은 이방인이 범한 악한 행동이나 성전에 이방인들이 침입한 것등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있을 때 유대인들로 부터 성전을 더럽혔다는 오명을 쓰고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더둘로는 유대인들의 거짓된 소문에 근거하여 바울을 ‘성전 모독죄’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4) 확인 요청(peroratio): 더둘로는 이렇게 바울을 고발한 이유를 제시한 이후 총독에게 “우리가 그를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도 “이 말이 옳다”하며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더둘로의 고발 이후 바울의 변론이 이어집니다. 그의 변론 형식도 더둘로의 고발 형식과 유사합니다.
1) 서언(exordium): 총독의 허락을 받고 바울이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총독에 대해 간략히 언급합니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합니다.” 더둘로의 아부와 과장된 칭송의 말과는 대조적입니다. 간략하게 유다 지역을 오랫동안 다스리는벨릭스 총독의 역할을 잘 알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2) 진술과 확증(narratio & confirmatio): a) 소요를 조장하는 자라는 고발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이나 시내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 증거를 내세울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b)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고발에 대하여->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습니다. 즉 나도 유대인으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의 글(구약 성경)을 믿는 자 입니다. 나도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입니다라고 변론합니다.
c) 성전을 모독 하였다는 고발에 대하여->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유대 전통에 따라)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유대인들이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3) 역고소(refutatio): 19-20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고소해 놓고 재판에 출두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고소를 포기하거나 취소하는 것으로 ‘데스티소치오’(destitutio)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 고소자들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는 것은 고소 철회를 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소요죄와 성전 모독죄로 고소 당했는데, 고소인은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는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소송을 철회했을 때, 바울은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법률상 성립하는 반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역고소입니다.”

4) 바울 변론의 요약: 바울은 자신이 심문 받는 이유가 죽은 자의 부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앞에서도 자신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변증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의 변론은 정정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것이었습니다. 더둘로의 근거없는 고발에 대해 조목 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변론은 총독 벨릭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기 까지 재판을 연기하게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들 돌보아 주도록 배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로마 총독이 주관하는 재판정에 서게 하시고, 바울로 하여금 변론하게 하심으로 더둘로와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하시고,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바울이 믿는 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며,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심문 받는 것을 증거케 하심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토대위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위에 초대 교회는 설립되었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며, 땅 끝까지 전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펼쳐진 법정 공방, 즉 더둘로의 고발과 바울의 변론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설교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여 있으나 복음을 전할 기회는 더 많이 주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산헤드린 공회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고발로 인해 로마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심으로 당시 지역 최고 권력자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증언하여야 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하심으로 성취되어 집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바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로마 총독 앞에 서지 못하였을 것이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도 동일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형들로부터 시기와 모함을 받아 깊은 웅덩이에 갇히게 되고 결국 애굽에 종으로 팔리고, 바로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받아 가정 총무의 역할을 맡았으나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105편의 말씀처럼 “그의 발은 차고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나”(18) 그는 인내하며 감옥에서 2년이상의 시간을 견디었습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9)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으로 연단받았기에 요셉은 하나님의 쓰임받는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 가운데 있던지, 평안한 삶 가운데 있든지, 불편한 상황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일을 깨닫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영향력있는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일컬어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 소요하게 하는 자요”라고 말했습니다. 부정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울이 전염병처럼 복음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번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에 편만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소동이 계속 되었지만 복음의 영향력은 엄청났습니다. 병고침의 역사도 일어났고 귀신을 쫓아 내었고 감옥의 문이 열리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다락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리기도 했고, 수많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 일행이 떠나 간 이후에 이방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세움 받은 사역자들을 통해 전도와 양육이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일컬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17:6)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천하를 소동케하는 전염병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향기”(고후 2:14-16)라 하였습니다.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나타내는 향기가 그리스도인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라 하였습니다. 먹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이며 마음 판에 쓴 편지라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의 삶을 읽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전염병이 된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향력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바닷물이 짠 것은 그 안에 3.5%의 염분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5%의 염분 때문에 바닷물이 짠 맛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세상 속에서 영향력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3.5%만 된다고 한다면 세상은 달라 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양보다 질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천명의 영향력보다, 복음을 깨닫고 온전히 거듭나서 변화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냄새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삶으로 적어 내려가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영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이며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더둘로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자신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조상의하나님을 섬기며 성경을 믿으며 하나님께 대한 소망, 즉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심문 받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기에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롬 1:4)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죽을 몸도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다시 부활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썩어질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 뿐이라면 우리는 불쌍한 자입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은 없어질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10: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7)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영생을 믿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믿음으로 되어 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더둘로의 고소에 대응하여,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담대하게, 당당하게, 논리 정연하게 변론을 펼쳤습니다. 그의 변론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3가지 교훈을 살펴 보았습니다.

1.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환경 가운데 처하든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도 바울처럼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생명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복음의 전염병’과 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우리도 바울처럼 부활 신앙을 소유하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6-06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3:12-35
6/6/2021 주일 낮 예배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나의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은인들이 한 두명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푼 그 은인들의 도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을 뛰어 넘어 전 세계를 무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극동방송 이사장이며 세계 침례교 연맹 회장을 역임하신 김장환 목사님에게 고( 故) 칼 파워스(Karl Powers) 상사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한국 전쟁 중에 가난한 집안의 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경북 경산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부대 막사에서 20여명의 미군들의 심부름을 하는 ‘하우스보이’로 일하였습니다. 미군들은 그에게 ‘Billy’라는 영어 이름을 붙여 주었고 성실하고 총명한 빌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모니카를 불고 있던 빌리에게 낯선 미군 한명이 다가왔습니다. 다른 막사에서 인사 업무를 하는 칼 파워스 상사였습니다. 당시 22세였던 파워스 상사는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많은 아이들을 목격했습니다. 그 때 그는 단 한명의 아이라도 이 전쟁에서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던중 막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빌리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배움에 목말라있던 빌리는 선뜻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파워스 상사가 전방으로 전출하게 되자 그 기대를 접고 말았습니다. 미국에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말없이 귀국한 군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워스 상사는 이미 제대 명령이 떨어졌지만 빌리를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당시 부산에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가 문교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에게 탄원도 하고 진정서도 제출하여 가까스로 미국행 비자를 받아내었습니다. 빌리의 비자가 나오자 파워스 상사는 408달러 짜리 배표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파워스 상사는 거주민이 10가구 정도 되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작은 탄광촌에서 태어나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안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기에 사립대 진학을 포기하고 2년제 교대에 입학하였지만, 빌리를 미국 유명 기독교 사립학교 밥 존스 고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빌리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 신문에 빌리의 이야기를 싣기도 했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의 은인이었던 칼 파워스 상사는 2016년 9월, 8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칼 파워스 상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크리스찬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세계 침례교 연맹 회장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칼 파워스 상사의 사랑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2010년 PK(Powers, Kim 의 이니셜) 장학 재단을 만들어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돕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으로 부터 쓰임받았던 많이 알려진 인물들도 있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섬긴 ‘무명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 간 이후 바로의 친위 대장 보디발 집에서 가정 총무로 지내던 중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갖히게 됩니다. 감옥에서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 두명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꿈 해석대로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하게 되었으나 요셉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아뢰어 풀어 달라는 요청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2년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자 그 때 비로소 자신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한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바로 앞에 서게 하여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합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요셉은 바로의 신임을 받아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 2년간 요셉을 잊기는 했지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손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의 도움을 통해서 요셉은 바로 앞에 설 수 있었고 자신의 개인적인 누명도 벗게 되었을 뿐 아니라 꿈 해석을 통해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섬겼던 사람들중에 여인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8:2-3)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귀신으로 부터 자유케 되어 평생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섬긴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곁에 있었고, 시신을 매장하는 현장에도 있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헤롯의 청지기 구스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에 대해서는 눅 8장 이외에는 달리 기록이 없습니다. 요안나와 수산나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헌신한 믿음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 중에 ‘루포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동역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루포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사도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 칭할만큼 푸근하고 사랑이 많은 여인이 ‘루포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남편이 누군가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로마 군병들에 의해 예수님 대신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을 소개할 때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막 15:21)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을 소개할 때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영적 지도자였으리라 짐작됩니다.

남편 시몬이 일찍 죽자 아내인 무명의 여인은 두 아들을 믿음으로 잘 키웠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교회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는 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 사역 중에 자주 ‘루포의 어머니’ 집에 들러 목을 축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피곤한 육체를 누이며 회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사도 바울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 중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집을 사도들과 성도들의 기도처로 제공한 마가의 어머니, 초대 교회에 최초로 세움 받았던 7집사 중에 스데반과 빌립을 제외한 5명의 집사(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행 6:5), 유럽 선교의 첫 열매요 빌립보 교회 설립의 일등 공신인 루디아,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소동으로부터 바울을 보호해준 야손,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헬라 지역에서 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에 동행한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행 20:4).

이 사람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드린 귀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복음 전파에 쓰임받았던 ‘무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바울의 생질’(조카)였습니다.

• 바울을 죽이려는 간계 (12-15)
바울은 천부장의 배려로 지금 로마 수비대 영내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급기야는 40여명의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결사대를 만들고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맹세한 사실을 알리고 바울을 죽일 계략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울로 부터 더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요청하여 바울을 공회로 내려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성전의 북서쪽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서 성전의 남서쪽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당으로 갈 동안 예루살렘의좁은 길거리에서 잠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여 없애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바울의 생질이 천부장에게 알리다 (16-22)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비밀스런 음모가 바울의 생질(누이의 아들, 조카)이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가족 관계는 성경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본문을 통해서 그에게 누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울의 조카가 그러한 비밀 정보를 알게 되었는지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조카는 그 소식을 듣게 되자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립니다. “당시 로마의 죄수들에게는 종종 가족이나 친구들의 면회가 허용되었으며, 그들을 통해 사식과기타 생필품들을 받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소식을 들은 바울은 한 백부장을 청하여 조카를 천부장에게 인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백부장에게 이러한 요청을 하는 것으로 보아 로마 시민의 신분인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갖혀 있지만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부장을 만나게 된 바울의 조카는 유대인 결사대 40여명의 계략을 상세히 전하면서 그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요청한다 할 지라도 그 요청을 따르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지금 결사대 40여명이 바울을 죽이려고 숨어서 다 준비하고 천부장의 허락만 기다리고 있다고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로마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그의 생명을 노리는 유대인 결사대의 음모로부터 보호하고 계십니다. 유대인 결사대와 같은 악한 무리들이 아무리 바울을 죽일려고 계획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바울과 함께 하기에 바울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안전도, 생명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공격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함을 누렸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2)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실 때 우리는 안전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의 조카를 사용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주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바울 (23-32)
천부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울을 가이샤라에 있는 로마 총독에게로 보내기롤 결정합니다. 바울이 계속 예루살렘 로마 수비대 영내에 있게 되면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많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에게 보내어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로마법에 따른 적법한 절차요, 예상되는 소요와 폭동으로 부터 예루살렘의 치안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편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리사랴까지는 약 100 KM 되는 먼 거리였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밤 제 삼시(현재 시각으로 밤 9시)에 바울을 호송할 군인 470명을 준비시킵니다. (보병 2백명, 기병 7십명, 창병 2 백명, 짐승들) 이 대규모 인원은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수비대 전체 인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이었습니다. 그만큼 천부장은 바울로 인해 발생한 사건을 중대한 사건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는 군인들 편으로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수신인을 ‘벨릭스 각하’로 시작하는 편지의 형식은 고대 편지의 표준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보내는 사람-받는 사람-문안 인사-편지의 내용 순) 편지의 내용은 로마 시민인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자신이 구해 주었고, 유대인들이 고발하는 것은 로마법을 어긴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이며,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에게 바울을 보내는 것은 바울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며, 고발하는 자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정식 로마 재판)라고 하였다고 썼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천부장(글라우디오 루시아)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예비하신 손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로마 군대의 장교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사용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애굽의 왕 바로도 사용하시고 애굽의 공주(모세를 왕자로 입양)도 사용하시고, 바사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도 감동케 하십니다.

그는 천부장으로서 바울이 분노한 유대인들에 의해 해를 당할 것을 알고 로마 수비대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인줄 알고 그를 일반 죄수처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상당한 대우를 해줍니다. 그리고 유대인 결사대의 음모를 바울의 조카로 부터 전해듣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인의 절반 정도를 준비시켜 야밤에 바울을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여 보냅니다.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총독에게 바울을 변호하는 편지까지 써서 보냅니다.

그는 로마 군대의 고위 장교로서 덕망과, 로마 시민으로 로마법을 존중하는 시민 의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군대의 힘을 사용하여 바울의 생명을 유대인들로부터 보호하게 하시고, 장차 로마로 나아가는 바울의 선교 여정을 돕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 벨릭스 총독 앞에 선 바울 (33-35)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로마의 호송 군인들은 밤길을 재촉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56 KM 가량 떨어진 안디바드리에 도착하게 되고, 기병 70명만 남기고 나머지 400명은 영내로 돌아갑니다. 그곳으로부터 가이사랴까지는 비교적 안전한 여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 관저에 도착한 바울은 드디어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됩니다. 안토니우스 벨릭스는 A.D. 52-60년 동안 유다 지역을 통치한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노예였다가 자유민이 되었고, 형 팔라스(Pallas)가 황제의 총애받는 사람이어서 형 덕분에 로마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2년)에서 심문 당하고 옥에 갖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천부장과 로마 군인들에게, 유대인들 앞에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리고 유다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서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다수 유대인들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유대인들의 폭동을 불러 일으킬만한 일, 즉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는 결박 당하여 옥에 갖히고 심문을 받게 되지만, 그 일들을 통해 동족 유대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 로마 총독, 나중에 지역 분봉왕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쇠사슬에 결박 당함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예수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게” (행 9:15)하십니다.

고난과 핍박 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영적 교훈은, 바로 복음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더욱 강력하게 전파된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순교와 성도들이 당한 핍박을 통해서 양적으로, 영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선교의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로마 수비대 영내에서 보내는 ‘그 날 밤에’ 바울에게 음성을 들려 주셔서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확신하였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b) 결국 그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행 배를 타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매여 기나긴 로마행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한 우리 교회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비전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지혜와 능력 주셔서 나를 통해서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 되었지만 그 모든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게 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악한 자들의 궤계를 멸하시고, 천사들을 보내어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실 때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곳곳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들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조카와 천부장과 같은 조력자들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선하신 손길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도움의 손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 사역의 파트너로,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God’s fellow workers)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예비하신 손길’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임 받는하나님의 백성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5-30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2:22-23:11
5/30/2021 주일 낮 예배

믿음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입성한 믿음의 열조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후대에 본이 되는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족장들),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사사들), 다윗, 사무엘 처럼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도 있는 반면에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의 행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는”(히 11:33-34) 추앙받을만한 영웅적인 행동들도 기록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다가, 진리를 전하다가 당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어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갖히는 시련을 받았으며(예레미야) 돌로 치는 것(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과 톱으로 켜는 것과 같은 시험을 당하고(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악한 왕 므낫세에게 이런 죽임을 당하였다고 함)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에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5b-38)

초대 교회-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이후 시작된 오늘날 개신교 교회의 원형-성도들은 예수님 믿는 신앙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문화 가운데 살고 있는 이웃과 가족으로부터, 황제 숭배 사상을 강요한 난폭한 로마 황제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다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명예와 재산을 잃게 되고 가족들과 이웃들로 부터 추방당하고 안정된 직장도 포기해야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로 부터 돌에 맞에 죽기도 하고 감옥에 갖히기도 하고 로마 당국자들의 핍박을 피해 오랫동안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 동굴(카타콤)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의를 행함으로 고난 받는 1세기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기를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4, 17b)고 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마음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고 권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벧전 1:7)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일의 양심’으로 불리우는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중 조국 독일의 교회가 나치 정권에 의해 조정당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대항하는 교회 저항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독일 고백 교회가 세운 ‘목사 후보생 교육 기관’의 책임자로 섬겼는데, 1937년 나치 정권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자 장소를 옮겨가며 1940년 3월까지 목회자 양성 교육을 계속했습니다. 그 후 잠시 미국에 갔을 때 자신의 신학교 은사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 박사가 신학교 교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미국에 망명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독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치 정권하에서 고통받는 독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43년 히틀러 암살 모의 혐의로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나치 정권이 붕괴하기 3주전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말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들과 다른 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생활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사도 바울이 환난 가운데서도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 천부장 앞에서 담대한 바울 (22:22-29)
바울의 증언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욱 소리지르며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띠끌을 공중에 날립니다’ (22-23) 21절에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말이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의 감정을 더욱 격노케 한 것입니다.

천부장은 사태가 더욱 심각하게 되자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고 명하고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유대 군중들이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 심문하기 위해 바울에게 채찍질하라고 합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채찍(라틴어. Flagellum)은 “울퉁불퉁한 금속이나 뼈를 달아 무겁게 만들었으며, 단단한 나무 손잡이에 붙어 있는 가죽끈들로 된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 채찍에 맞아 죽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평생 불구자가 될 정도였습니다.”

로마 군인이 바울을 채찍질하기 위해 가죽줄로 바울을 매자, 바울이 곁에 서있던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인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유죄 판결을 받기 전에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고 전합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들의 권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만약 로마 시민인 바울을 적법한 절차 없이 고문한다면 그는 로마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이 진실임을 확증하기 위해 그가 로마 시민인지 직접 묻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천부장은 자신은 돈을 주고 시민권을 샀다고 말하자 바울은 자신은 태어나면서 부터 시민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많은 혜택과 특혜가 주어진 로마 시민권을 얻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로마에 뛰어난 공을 세운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시민권을 살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로마 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부모가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마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심문하려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물러나고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를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문이나 학문, 경력이나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으로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리며 살았지만 예수님 만난 이후에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보다는 ‘하늘 나라 시민’이 된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권리를 자랑하며 살았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빌 3:20)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의 사역 중에 처음으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로마 군인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의 과거를 자랑하고자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복음 전파를 용이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세상 권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임을 당당히 밝힘을 통해서 부당하게 고문당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믿음 생활하는 중에 부당하게 핍박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분과 지위,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라기 보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힘으로 부당한 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처럼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세상의 권리를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ex.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31개월만에 풀려난 캐나다 국적의 임현수 목사님의 간증)

• 공회 앞에서 담대한 바울 (23:1-6)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기 위하여 공회를 소집합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인 바울을 직접 고문하여 그 이유를 알고자 했으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을 통해서 진상을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의미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존경받는 유대인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공회원들은 70-100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공회 앞에 세우자 바울은 공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증언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하나님을 섬긴 진실한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아나니아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여전히 평생동안(회심하기 이전 뿐만 아니라 회심한 이래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겨온 훌륭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 짐작됩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에게는 교만의 극치이며 신성 모독의 극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대제사장을 오히려 책망하며 담대히 맞섭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23:3) ‘회칠한 담’은 튼튼하게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금방 무너지고 마는 벽을 말하는데 겉 모양은 그럴 듯하나 속은 불결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위선자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던 대제사장 앞에서 두려움 없이 오히려 그의 악함을 꾸짖고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 조차 뛰어넘는 복음의 열정이 그를 사로 잡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권력자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바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공회의 사람들이 바울에게 상대가 대제사장임을 알려주자 바울은 즉시 자신의 무례함을 인정하고 대제사장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출 22:28) 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바울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왜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아 보지 못하였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 존 스토트 목사님은 바울의 시력이 나빠서 의장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공회가 일부는 사두개파 사람들, 일부는 바리새파 사람들로 구성된 점을 알고, 자신의 심문 이유가 부활 증언에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이것은 바울의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빠뜨리지 말하야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은 자의 소망, 부활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혼란에 빠진 무리들 (23:7-10)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자 공회를 구성하고 있던 두 그룹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었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는 현실 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둘 사이에 바울이 끼어 그들 간의 분쟁으로 인해 바울이 찢길까 염려하여 공회에 군인들을 투입하여 그를 구출한 다음 요새로 데려갑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부활의 성경적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부활 논쟁으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오히려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부장을 통해서 바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바울과 늘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 부활의 신앙 가운데 굳게 서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고 믿지 않을 지라도 부활의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욥 19:25)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그 날 밤에 바울 곁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 (23:11)
혼란스럽고 힘든 하루를 보낸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11)

예상은 했지만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분노한 유대인들의 적대감과 폭력으로 인해 바울은 심적으로나 육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날 밤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그의 앞에 펼쳐질 그 심한 핍박을 그가 이겨 낼 수 있을 지, 로마에 까지 복음 전하고자 하는 그의 비전이 이루어 질 수 있을 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는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그 밤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염려하지 말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고난 가운데서도 나의 일(복음)을 증언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에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로마로 가는 배 안에서(“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바울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준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에게 천군만마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로마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환난과 고난 중에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설교 초두에 언급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님이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성탄절에 약혼자에 마지막으로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를 가사로 하여 독일 교회 음악가 지그프리트 피에츠(Siegfried Fietz)가 곡을 붙여 만든 찬양곡이 있는데, 곡의 이름은 “선한 능력으로”입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 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 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죽음의 공포가 그를 휘감고 있는 차디찬 형무소 감방에서 그는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능력이 그를 다스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 모두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기를”,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5-23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2:1-21
5/23/2021 주일 낮 예배
인생에는 중요한 세 가지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만남은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의 만남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재벌가의 자녀로 태어난다면 부모의 부와 명예를 상속 받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며, 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면 뛰어난 학자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경건한 믿음을 가진 부모로부터 양육받은 자녀들은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 믿음의 유산을 상속받게됩니다.

두번째 만남은 평생 혹은 오랫동안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갈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부모와의 만남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만남이지만 배우자와의 만남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만남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선택으로 인해 결혼 생활이 불행하게 마치는 경우도 많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가지 만남으로 인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세번째 만남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가치있는 삶을 결정할 뿐 아니라 영원한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만남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프랑스 출신의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 이 말하기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상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유명한 장군이며 문학적인 천재였던 루 웰리스(Lew Wallace)라는 사람이 그 중 한 명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 잉거솔(Ingersoll)은 기독교의 신화를 영원히 도말해 버릴 책을 쓰자고 약속했습니다. 이 두사람은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에서 기독교를 파괴할 자료를 찾으면서 2년 동안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루 웰리스는 책의 2장을 쓰다가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하며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어쩔 수 없이 확증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사기군으로 폭로하려고 결심하였던 그분이 그를 사로잡고 말았던 것입니다. 후에 웰리스는 지금까지 쓰여졌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가장 위대한 소설 중의 하나인 <벤허>를 썼습니다. (<예수의 유일성>)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우는 어거스틴(Augustine)도 방탕한 생활 중에 하나님을 만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로마의 관원이며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난 어거스틴은 10대 시절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이단인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카르타고의 흑인 노예를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어 마침내 그는 긴 방황의 시간을 끝내고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가 30세가 지나서 밀란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중에, 386년 그는 어느 정원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때 울타리 밖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책을 들고 읽으라”(라틴어.tolle, lege, 영. take and read)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탁자에 놓여있던 성경책을 펼쳤는데 로마서 13:13-14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추악한 과거의 모든 삶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어거스틴은 히포의 감독이 되었고,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과 같은 저술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위대한 신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흔히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지식과 이성으로 믿는 종교라기 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기도 응답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며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인격적 만남’입니다.

왜 제가 ‘인격적 만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느냐고 하면, 예수님과의 만남은 다른 종교나 명상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초월적 만남이나 신비적 만남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처럼 인격의 3요소인 지.정.의가 동반되는 만남입니다. 지적인 면에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정적인 면에서 나의 감정의 끌림이 있어야 하고, 의지적인 면에서 더 많은 만남을 결정하고 더 많이 교제하기로 헌신하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핍박하기 위해 모인 유대인들에게 전한 ‘신앙 간증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간증하는 내용이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기록은 행 9:1-19 이며, 두번째 기록은 오늘 본문이며, 마지막 기록은 아그립바 왕에서 간증한 행 26장 내용입니다. 내용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큰 흐름은 동일합니다.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눈이 멀게된 사울->아나니아를 예비하신 하나님->사명을 주신 하나님)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바울은 천부장의 개입으로 로마군 수비대 영내로 들려들어가게 됩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영내의 높은 층대 위에 서서 분노한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아람어)로 변증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1. 참 유대인임을 변증하는 바울 (3-4)
먼저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임을 말합니다.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출생), 예루살렘에서 성장하였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성장과 학문),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임을 증거합니다.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의 대표적 학파중 하나인 힐렐 학파의 창시자 힐렐의 손자로서 당시 탁월한 율법 학자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율법에 탁월하였을 뿐 아니라 율법을 준행하는데 열성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부터 공문(위임장)을 받아 가는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2. 핍박자 사울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 (5-11)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청년 사울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치게 되자 그는 땅에 엎드려지고 말았습니다. 어디에선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은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에서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 충만했고, 율법에 흠이없는 자라고 할 만큼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 사울은 강한 빛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땅에 거꾸러뜨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은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진리를 찾아 헤메는 수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을 던졌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학문과 철학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땅에 뭍히고 말았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오직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진리를 찾아 헤매었지만 진리를 찾지 못한 채 목마른 인생을 살았던 한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참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을 마시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은 “주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로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거듭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의 질문에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고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울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이었겠습니까? 사울이 일생의 목표로 삼고 열심을 다해 매진한것은 기독교(교회)를 이스라엘 땅에서 멸절하는 것이었는데,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핍박자 사울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기 위한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강한 빛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사울은 두번째 질문을 하나님께 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그가 박해하는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리게된 사울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길위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며,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그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며 기다리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하는지 질문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간 순간 이 질문을 주님께 해야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 믿기 이전에는 우리 모두 내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들을 하였고, 내가 계획하고 꿈꾸는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면 안됩니다. 내 인생의 주인되신 예수님께 물어야합니다. “주님 오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사소한 일을 행할 때에도 예수님께 물어야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사람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사울은 주님께 이 질문을 던졌고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습니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10)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9:6) 사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를 위해 주님은 한 사람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3. 아나니아를 예비하신 하나님 (12-16)
그 사람의 이름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9장에 보면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 환상중에 나타나셔서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라고 하였을 때 그는 처음에 사울에 대한 좋지 않는 소문으로 인해 두려워하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거듭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 형제 사울로 그를 부르고 그에게 안수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예수 그리스도)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4-15)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신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유대인과 이방인) 그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 복음의 증인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경건한 주의 제자 아나니아를 예비해두셨습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을 통해서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고 침례를 받고 주님의 제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아나니아’와 같은 순종의 사람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나 주님 뜻에 순종하며 헌신할 때 주님께서는 돕는 손길을 붙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두려워하지 말고 순종의 길, 믿음의 길로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아나니아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준행하기를 힘쓰며 경건하며 칭찬받는 주의 제자 아나니아와 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생각과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높은 권위를 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의 작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임받으시기를 원합니다.

4.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하나님 (17-21)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약 3년이 지났을 때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행 9장에서도 아나니아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라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받은 자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행 26장에서는 다메섹 도상에 엎드린 사울에게 주님께서 직접 새로운 사명을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26:16-17)

핍박자 사울은 이제 전도자 바울이 되어 땅끝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받게 됩니다. 사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이방인 선교의 위대한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을 도망쳐 나와 광야에서 40년동안 목자로 지낸 이후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호렙산 불이 붙은 떨기 나무 앞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영적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숯불을 그 입술에 대시며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때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합니다. 믿고 순종하는 선지자에게 주님께서는 선지자로서 백성에게 전할 메세지를 전해주십니다. 영광 가운데 이사야를 만나신 하나님은 순종하는 그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찾아오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택받을 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인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4-15)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듣게 하신 것은 우리고 보고 들은 것에 증인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장’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요15:16)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은 열매 맺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영혼 구원)를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2:9)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명은 이 세상속에서 주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하나님의 탁월함을 선포하는’,NASB)사명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개인 신앙 간증 설교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두가지 질문을 기억하시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기를 원하시는 사명을 깨닫고 날마다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5-16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 본문: 행 21:27-40
5/16/2021 주일 낮 예배

여러분, 네덜란드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튜울립이 생각 나기도 하고 풍차가 떠오르지요. 네덜란드는 ‘낮은 땅’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네덜란드는 전 국토의 ¼ 정도가 해수면보다 낮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예로부터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하는 지역이 많아, 홍수로 부터 자신들을 지키고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 댐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척지가 국토의 1/5 정도나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척지를 만드는데 풍차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네덜란드에 풍차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3세기경인데 당시에는 방아를 찧는데 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규모가 커져서 밀가루를 만들거나 기름을 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물을 빼내는 관개 배수용으로 풍차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산업 혁명때 증기 기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네덜란드에는 11,000개가 넘는 풍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풍력 발전에 사용되는 세 날개 풍력 발전기는 네덜란드 풍차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것입니다.

풍차를 통해서 네덜란드사람들의 지혜를 엿 볼수 있습니다. 어려운 자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결과 풍차와 같은 작품이 발명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지요.

이처럼 환경적인 장애물과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오히려 그 고난을 디딤돌로 삼아 번영의 결실을 맺는 개인과 나라들의 사례를 우리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만큼 외세로 부터 침략을 많이 당한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혹자는 930여차례나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역사학자는 5천년 한민족 역사에 90회 이상된다고 합니다. 외세의 수 많은 침략에서 생존한 민족이다 보니 그 어떤 민족보다도 강인한 민족이 된것입니다. 특히 근대 역사 가운데 일본의 35년 식민 통치, 3년간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화는 서양에 비해서 백년이상 늦은 1960년대에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불과 40-50년만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였고, 외국 선교사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백여년만에 전세계에 2만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외세의 침략, 식민통치, 전쟁이라는 고난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온 국민이 희생하고 노력한 결과 경제적 번영과 선교의 열매를 얻게 된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자신이 처한 척박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한 예가 수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 혹은 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30년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의 40년 생활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목자로서 보낸 40년의 시간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영적 지도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제자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만사형통할 것이다. 사업도 잘되고 건강의 축복도 받고 자녀들도 성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생각과 믿음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품에 안고, 등에 업고 키우듯이 주의 품에 품어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것처럼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그들의 떡반죽 그릇이 차고 넘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축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고난이 한꺼번에 닥치기도 합니다. 평생 모았던 재물을 순식간에 잃기도하고, 가족을 잃기도하고,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갖히기도하고 불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뜻(계획)이 있슴을 알아야합니다. 흔히 ‘변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모난 성품을 다듬어시고,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한 사람만이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는자가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달은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 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난의 훈련을 통해 그들이 철처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는 백성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2-3)

오늘 본문 말씀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게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게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악한 무리들의 소동 (27-30)
바울은 이미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도 무리들의 큰 소동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고,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이후 곧장 수리아로가는 배를 타지 못하고 마게도냐(북쪽 내륙지방)를 거쳐서 돌아가게 된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맞아 고린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선상에서 바울을 해할 간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바울은 환난과 결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것은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결례 의식과 더불어 서원한 네 사람을 위하여 결례 의식에 따른 비용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들은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오해를 풀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위한 양보’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시아에서 온 성난 유대인들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고 외치기를 바울이 유대인들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인(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더렵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전은 헤롯 성전을 말하는데, (*지도에서 보는 바와같이) 성전 구역은 크게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전 내 구역이 있고 이곳은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이며, 이스라엘 남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그 앞 봉헌대 지역은 여인의 뜰이었습니다. 그 외부가 이방인의 뜰인데 이방인들이 그 울타리를 넘어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게 되면 로마시민이라 할지라도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방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금지된 구역들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이방인들에게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가면 죽음의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된 공고문이 바깥뜰과 금지 구역들을 분리시키는 장벽에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29절 내용처럼 그들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이 정한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바울을 스데반처럼 합법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돌을 던져 죽일려고 작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자신이 율법을 어기고 할례과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결례 의식을 행하고 서원한 네 사람의 결례 의식 비용까지 담당한 바울이었습니다. 자신이 성전을 모독할 의사도 없었고 실제로 모독하지 않았는데 유대인들로부터 오해를 사서 핍박을 당하게 된것입니다.

• 천부장을 사용하심 (31-36)
분노한 폭도로 변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려는 그 순간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예루살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알려집니다. 당시 로마는 예루살렘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하여 안토니아 요새라는 로마군 수비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수비대의 최고 책임자가 글라우디오 루시아라고 불리우는 천부장이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높이가 약 25미터로 성전보다 높이 있어 성전안을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북쪽에 있는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천부장이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소동이 일어난 현장으로 달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만약 천부장 일행이 조금 늦게 도착하였더라면 바울은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고위 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바울을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 로마 군대의 천부장의 손길을 사용하셔서 성난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을 구출해내십니다. 에베소에서도 큰 무리의 소동을 진정시키고 바울을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낸 사람은 에베소의 고위 관리였던 서기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이방사람들조차 사용하고 계심을 보게됩니다.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예언의 성취, ‘환난과 결박’)무리들에게 바울이 누구이며 그가 무슨일을 하였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일관성이 없는 말로 대답하자 천부장이 소동으로 인해 진상을 파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인해 군사들에게 들려서 요새안으로 급히 들어갑니다.

• 백성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은 바울 (37-40)
안전한 영내로 들어가면서 바울이 천부장에게 말할 권리를 얻고자 할때에 바울에게 헬라말을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헬라말을 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더러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명을 이끌고 감람 산으로 간 애굽인 거짓 선지자가 아닌지 묻습니다. 약 4년전에 한 애굽 출신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하여 4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서, 자신의 명령 한 마디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질 것이며, 그런 다음 그들이 로마의 수비대를 쳐부수고 그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총독 벨릭스는 군대를 파견해 수 백명을 도륙했는데, 그 지도자는 도주해버렸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도주한 애굽 거짓 선지자가 아닌지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며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부장에게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합니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요새의 높은 층대 위에 서서 유대 백성들에게 아람어로 복음을 증언하게 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기 전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감옥(2년)에 있는 동안 모두 4번에 걸쳐 복음을 전합니다. 첫번째는 유대 백성들에게, 두번째는 유대 종교와 사법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세번째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마지막으로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앞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 사건들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눈이 멀게 된 사울을 영접하고 안수를 주게 된 아나니아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것이며,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친히 권면한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 전하기를 힘썼습니다. 고난 중에도 그는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소동과 폭행중에도 바울을 보호하시며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천부장과 같은 이방인 로마 군인을 통해서 바울의 생명을 폭도들로 부터 구해내시고, 소요를 일으킨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바꾸어 선을 만들어 내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형들의 모함과 시기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린 요셉의 생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나,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던져졌을 때에도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 대신이 되고, 그 형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꿇어 엎드렸을 때에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후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5,7-8)

요셉은 자신을 애굽의 종으로 팔았던 형들에 대한 미움의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경험한 인생의 모든 굴곡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4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그가 당한 고난과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선한 섭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의 신앙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처한 고난과 환난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계획 가운데 나를 연단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보게 하시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웨인즈빌 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나를 통해서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섭리가 증거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1페이지 참고 사진)

(4페이지 참고 사진)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5-09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본문: 행 21:17-26
5/9/2021 주일 낮 예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분명한 정체성과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가 그리스도인들의 그것들과는 배치되는 경우가 많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윤리 규범과 도덕율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실제로 추구하는 삶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입니다. 공동체를 위하기보다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 살기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천국, 영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생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고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자를 일컬어 ‘어리석은 부자’(Fool Rich)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택하는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하지 말고 좁은 길, 험한 길을 선택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만하는 ‘길’(the Way)은 성공과 안전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the way of Cross)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바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4b-1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아야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살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NIV.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The Message” 성경(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화에 너무 잘 순응하여 아무 생각없이 동화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대신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속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거기에 응하십시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는 늘 여러분을 미숙한 수준으로 끌어 낮추려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여러분에게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시고 여러분안에 멋진 성숙을 길러주십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세상 속에서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가져야하고 또한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해야하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 판단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방 문화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이 직면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성경적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끼리 송사나 주의 만찬이나 은사들과 같이 교회내의 문제들 뿐 아니라 고린도라는 이방 도시 가운데 살고 있는 고린도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판단해야하는 교회 밖의 문제들-예를 들면 음행, 결혼,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전 8장 전부를 할애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 이교 제단에 드린 제사 음식 중 남은 음식은 제사장과 드린 자와 그의 친구들이 신전 축제에서 먹거나 식육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자신들이 그런 고기를 먹는다면 이교 숭배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거를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by 팀 켈러)
1) 예배의 원칙: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8:6) 우상 숭배는 결단코 피해야합니다. (고전 10:14-18) 또한 우상 숭배하는 행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상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자유의 원칙: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8:8) 음식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상으로 섬기는 신은 실체가 없는 가짜 신이므로, 음식 안에 우상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10:25)고 합니다.
3) 사랑의 원칙: a) 만약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믿는 자들에게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권리)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8:9) “만약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8:13)
b) 만약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9:19)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9:12)
c) 만약 그것이 허용된 관습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적 성장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자유를 행사하지 말아야한다. (참조: 크리스찬 의사 결정 가이드 도표)

이 도표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사결정을 할때 참조하면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사도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문제 앞에서 의사결정을 할때에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지혜롭게 판단하여 의사결정을 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고합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후 바울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 가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수 만명이 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그들은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듣게 된 소문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고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금한 것이 아니라 표피만 자르는 외형적 할례-할례는 마음에 해야-를 반대한 것입니다.
할례 문제에 관한 바울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였고, 이방인이었던 디도는 복음의 원칙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할례를 행치 않았습니다. 할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필요하다면 할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수 만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은 것은 당시 상황을 짐작해보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초대 교회 사도와 성도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종교를 만들거나 개종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먹기를 거부한 사건이나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바울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자리를 피한 것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도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틀에 매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적개심을 가진 수 만명의 유대인들로부터 보호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인 중에 서원한 네 사람을 데리고 함께 결례(purification rite)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바울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서원한 네명은 일시적으로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나실인은 일정 기간, 또는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약한 사람을 말합니다. 헌신한 기간동안 나실인은 포도주나 독주를 금해야했고(민 6:3),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으며(민 6:5), 시체를 만지면 안되었습니다. (민 6:6-8) 만약 어쩔수 없이 시체를 만지게 되었다면 장기간의 정결 예식을 행해야했습니다. 즉 일곱째날에 자기 머리를 깎고, 여덟째날에는 산비둘기 두마리와 집비둘기 두마리로 제사드려야 했고 그 후 헌신의 기간을 다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민 6:9-12)
야고보는 바울에게 서원한 네 명과 함께 바울도 결례를 행하고-이방인 지역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부정함을 면하기 위해- 네 사람의 결례 의식에 따른 비용을 대신 지불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는것과 제사장에게 바칠 제물-비둘기 8마리, 네 마리 양-은 상당한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부담스런 제안이었고,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순순히 기쁜 마음으로 응합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6)
바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울은 율법 그 자체는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됨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야고보의 제안대로 율법에 기록된 결례 의식을 행한 것은 단지 복음 전하고자 하는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아직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연약한 믿음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족하지 않기 위해 유대인인 그가 율법의 요구에 스스로 복종한 것입니다.
이전에 행 15장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내린 결론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나 율법의 멍에를 매게하지 말고, 단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우상 숭배, 음행, 피, 목매어 죽인것를 금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원칙)은 타협하면 안되고 반드시 지켜야하지만, 비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In essentials unity, non-essentials liberty, all things in charity)”( 루퍼투스 멜레니우스)
바울은 누구보다도 원칙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바리새파의 지도적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구별된 자’)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금식, 정결 규례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613개로 분류하고 그 율법을 한개라도 어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구약의 율법 뿐 아니라 장로(이전의 율법 스승)들의 유전까지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였던 바울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변화되어 복음 안에서 ‘융통성있는’(flexible)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원칙주의자’ 바울을 ‘관용과 포용의 사람’ 바울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준과 원칙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잣대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한계와 문제점은 바로 율법의 형식을 준수할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율법의 참정신을 잃어버린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것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자로 고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의 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칙주의자’임을 자랑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러보내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실수와 허물을 책잡기 보다 ‘허다한 허물을 덮는 사랑’을 베푸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된다면 나의 시간과 물질, 나의 고집, 나 안에 가득찬 자기 의를 희생하는 우리가 되어야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을 듣고 그와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는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소위 ‘통큰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가 결례를 행하고 서원한 네사람의 비용을 부담한 동기가 유대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핍박을 면하기 위함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양보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된 것을 자랑하였고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 9:3)라고 할 정도로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사도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안에서 자유한 자였으나 스스로 율법에 복종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을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이웃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머니 주일’입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며, 자녀들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기도와 눈물로 섬겨주신 어머니들에게 또한 감사와 큰 박수를 드립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떤 어머니로 기억되시기를 바라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어머님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함이 풍성한 어머니’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어머니’로 기억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5-02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본문: 행 21:15-16
5/2/2021 주일 낮 예배

오늘은 말씀을 나누기 전에 한가지 퀴즈를 내겠습니다. 오래 될 수록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술(와인), 된장, 고추장, 고대 유물, 유명한 예술 작품, 친구…

와이오밍/몬타나/아이다호 주에 걸쳐서 위치한 옐로스톤 국립 공원은 화산 지대의 진귀한 현상들을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보고인데요, 가장 큰 볼거리는 일정한 시간마다 거대한 물줄기(간헐천, Geyser)를 분출하는 “Old Faithful”이라는 가이저입니다. 매 40-80분마다 쉬지 않고 뿜어대는 물줄기는 높이가 50-60미터나 되어 장관 중의 장관입니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있는 지구의 한 모습과, 자연의 신비로운 현상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Old Faithful”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Old Faithful”처럼 우리의 신앙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신실한 신앙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나손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 때 사도바울과 함께 동행한 사람들은 가이사랴의 몇 제자와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이었습니다.

‘나손’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등장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는 단지 구브로(Cyprus)출신이며 오랜 제자라고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동행한 이유는 자신의 집을 바울 일행의 거처로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집이 예루살렘 성내에 있어나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일행이9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이었으니 상당히 규모가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손이라는 이름은 ‘권고자’ ‘회상가’ ‘부지런한 구도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나손은 헬라식 이름이고 유대인들은 그를 야손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의 출신지가 구브로라고 했는데,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시에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 변함없는 신앙(Old Faithfulness)
나손이 언제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랜 제자”(old disciple, early disciple)라고 불리운 것으로 보면 복음의 초기에 제자가 되어 오랫동안 주님을 섬긴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회개한 사람들 중 하나였거나(11:20), 바나바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최초의 열매였을 수 있습니다. (13:4)
만약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설립 멤버 중의 한명이었다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누가에게 전달하였을 것입니다.

짐작컨데 그는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의 메세지를 직접 들은 사람 중 한명이었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들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한 사도들과 120여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멤버로 그는 교회를 섬겼으리라 생각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설립 직후에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큰 핍박을 당해 성도들은 대부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일부 남은 제자들도 기근과 박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20 말씀에 보면,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에 기록된것처럼 안디옥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 구브로 사람 중에 한 사람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는 오랜 기간동안 환난과 핍박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을 섬긴 신실한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서부 오리건 주부터 시작하여 캘리포니아 중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자이언트 세콰이어 나무는 높이가 최대 100미터가 넘는 것도 있고 부피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오래된 나무의 수명이 3천년이 넘는 것도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다윗, 솔로몬 시대때 부터 존재한 나무라는 말입니다. 3천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병충해나 산불이나 가뭄, 홍수, 지진과 같은 수 많은 자연 재해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이언트 세콰이어 나무처럼 변함없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몰아치고 지진으로 세상이 흔들려도 주님만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 바로 나손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나손처럼 한결같은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 바람과 눈보라를 견디고 꿋꿋하게 자기 자리에서 수천년을 버티어 온 세콰이어 같은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7교회 중 에베소 교회는 인내함과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게으르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을 받았지만, ‘처음 사랑’(first love)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첫 사랑’의 추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첫 사랑’이 결혼으로 까지 이어진 분도 계실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리라 생각되는데, ‘첫 사랑’의 추억은 오래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첫 사랑’은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때로는 무모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첫 사랑’의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경험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과 은혜는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 받은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교훈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처음 믿었을 때 경험한 ‘첫 사랑’을 잃어 버리지 말고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Once upon a time’ (‘옛날 옛적에’) 과거의 경험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의 그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잊어 버리지 말고 평생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노인이 등장합니다. 두 명 모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평생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았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시므온은 성전에서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해 부모와 함께 성전에 온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자신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안나 할머니도 결혼한 후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세가 될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로 섬겼습니다. 안나 할머니도 성전에서 메시야를 만난 이후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 아기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 모두 평생 변함없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도와 금식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던 경건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나손도 이들처럼 평생토록(아마도 70세이상된 노인) 주님의 제자로서 신실하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나손처럼, 시므온과 안나처럼 환난이나 핍박 중에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 변함없는 헌신(Old Sacrifice)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4KM로 걸어서 이틀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여행객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곳곳에서 출몰하였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이방 교회으로 부터 모은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강도로부터 습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9명의 일행들과 더불어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과 나손이 그들과 동행합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여행하였기에 바울은 훨씬 마음 편하게 예루살렘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손은 바울 일행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가리사랴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집에서 걸어서 미리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바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의 길잡이가 되어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는 기쁨으로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 섬겼습니다.
그는 바울 일행을 위해 먼거리를 동행하였고 자신의 집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인물들 중에 자신의 집을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던 사람들이 여러명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함의 기적의 현장이었던 집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또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회심하고 자신의 집을 바울 일행의 숙소로, 교인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한 사람은 여성 사업가 루디아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 일행을 위해 처소를 제공한 사람은 야손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큰 소동을 일으켰을 때 그는 그것으로 인해 고발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혼자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왔을 때 머물렀던 집은 아굴과와 브리스길라 부부 집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부로서 바울과 동일하게 장막 만드는 일을 하였으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고 바울로 부터 잘 훈련되어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한 장로님은 사업가이신데, 북한 선교를 위해 수십년간 헌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섬기는 선교회에서 시내에 작은 원룸 하나를 마련하여 그 지역을 방문하는 선교사님들의 숙소로 제공하고 계십니다. 관리하는 스탭을 통해서 선교사님들이 며칠간 머무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손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의 제자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몸과 물질을 바치는 제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 열매맺는 한 알의 밀알같은 존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잇대’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은 급히 신하들과 함께 왕궁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때 가드 사람 육백명도 함께 동행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에 속한 한 지역을 의미하는데 다윗의 사병 부대에 합류한 육백명의 블레셋 군인들의 우두머리가 ‘잇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잇대에게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따라오지 말고 너의 무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잇대는 위험에 처하여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하니”(삼하 15:21)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다윗에 대한 절대 충성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어려운 시절 광야에서 동거동락했던 주군을 버리지 않겠다는 잇대의 고백은 희생을 동반하는 헌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홀로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모압 여인 룻의 고백을 떠오르게 합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상)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헌신은 곧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었고, 그 아름다운 헌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됩니다.

우리 모두, 나손처럼, 잇대와 룻처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의 귀한 것을 희생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변함없는 제자(Old Disciple)
신약 성경에 ‘제자’라는 단어는 269회나 등장하는 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제자’는 원래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약 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은 스승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라는 말이지요.

나손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평생토록 실천하며 살았던 ‘오랜 제자’였습니다.

‘오랜 제자’( old disciple)라고 하면 ‘나이많은 제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본문 맥락상 오랫동안 제자로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나손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평생토록 ‘배우는 자’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평생토록 배우는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는데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도 선교도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나 선교는 그냥 하면 되지 배워야하나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 중보 기도의 능력,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교회에서 선교에 관심있는 몇명이 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성도 모두가 선교의 일꾼이 되어 기도와 물질로, 시간과 몸을 드려 동참해야하는 지상 최대의 과업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동기, 선교 전략, 선교의 역사, 지역 교회와 선교에 대해 계속 배우고 훈련되어져야합니다.

평생을 ‘제자 훈련’에 헌신한 사랑의 교회를 설립하고 담임하신 고 옥한음 목사님은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했습니다. 제자 훈련에 미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옥 목사님이 한국에서 제자 훈련을 교회 평신도들에게 도입할 당시만 하더라도 제자 훈련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캠퍼스 선교 단체들의 전유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옥 한음 목사님은 ‘제자 훈련’을 지역 교회에 접목하여, 성도들을 ‘교인’에서 ‘제자삼는 제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습니다. 교재를 개발하고 목회자들과 평신도 리더들을 훈련하였습니다. 직접 수 많은 제자 모임을 인도하며 제자를 양육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KAL 세미나를 통해 목사님이 시작한 ‘제자 훈련’이 계속되어 지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수천 교회의 목회자들과 평신도 리더들이 ‘제자 훈련’을 받았고 그 시스템을 교회에 적용하여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 옥한음 목사님의 일대기를 다큐멘타리로 제작한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은 “제자 옥한음”이었습니다. 이 타이틀이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인’과 ‘제자’의 가장 큰 차이는 받은 은혜와 가르침을 내가 품고 있으면 ‘교인’이고, 받은 은혜와 가르침을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제자’입니다.
‘교인’은 끊임없이 받기를 원하지만 ‘제자’는 할 수 있는데로 나누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교인’입니까? ‘제자’입니까?

한국에 있는 대학중에 기독교 정신으로 다시 세워진 우수한 학교 중에 한동 대학교라고 있습니다. 한동 대학교의 초대 총장님이셨던 고 김영길 박사님의 모토는 ‘배워서 남주자’였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자는 의미겠지요. 김영길 박사님은 KAIST에서 인정받는 교수였고, 탁월한 연구 실적으로 해외에도 알려진 석학이셨는데, 세상의 성공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 삶을 드려 그리스도의 제자를 육성하는데 일생을 바친 존경받은 교육자이자 참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나손, 그의 이름은 오늘 본문에만 기록되어 있는 무명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오랜 제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수식하는 이 짧은 단어가 그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Old Faithfulness)
그는 오랫동안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의 귀한 것을 드린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Old Sacrifice)
그는 오랫동안 변함없이 배우는 자였고 배운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그리스도의 참 제자였습니다. (Old Disciple)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랜 제자 나손’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4-25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일사각오의 신앙
• 본문: 사도행전 21:1-14
4/25/2021 주일 낮 예배

‘일사각오’라는 말은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담당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일사각오’라는 말은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인 고 주기철 목사님이 1935년 9월, 모교인 평양 장로교 신학교 사경회에서 전한 설교의 제목입니다.

고 주기철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과 더불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사님입니다. 주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고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4월 21일, 4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신사는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의 신을 제사하는 사당이자, 일왕이나 나라를 위해 순국한 군인(전범)들과 조상들의 위패를 모아놓고 숭배하는 곳입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못이겨 카톨릭과 장로교를 비롯해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신사 참배를 공식 결의하였지만, 주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할 수 없다며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참고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교단차원에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유일한 교단은 침례교회입니다. 1935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선포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1944년 5월 10일에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침례교단에서는 매년 5월 10일을 신사참배거부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940년 2월, 7개월간의 옥고를 겪고 잠시 풀려나서 그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전한 설교에서 그는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는데 제목은 ‘5종목의 기도’이었습니다. 4번째 그의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번째는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주기철 목사님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에서도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생명 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제국의 중심부 로마를 거쳐 땅끝이라 여긴 스페인까지 전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여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도 참조)

*밀레도-로스-로도-바다라-(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고)-두로-돌레마이-가이사랴-예루살렘

수리아 두로에서는 7일간 머무르며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제자들은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레마이로 출발합니다.

육로로 가이사랴에 이르러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에게 예언을 합니다. 아가보는 약 15년전에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닥칠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매고 있는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예언합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실로 사람 아히야가 솔로몬 왕국이 어떻게 분열될 것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새 옷을 12조각으로 찢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애굽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어떻게 포로 되어 끌려갈지를 보여주기 위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 동안 지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performance 를 통해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듣게 된 가이사랴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울며 간청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그의 단호한 결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두로에서 제자들이 바울을 만류할 때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고, 가이사랴에서 선지자 아가보도 “성령이 말씀하시되”라고 하면서 예언을 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예언과 금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한 메세지는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을 고난에 대한 경고/예언의 메세지이지 바울의 사명을 막는 ‘금지’의 메세지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도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도바울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였기에 그가 겪을 고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권면한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경고는 성령께서 하신 것이지만 간곡히 말한 것은 인간적인 요청”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 바울이 앞으로 겪을 고난에 대해 알려 주었지만 바울의 일사각오의 신앙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고백을 듣고는 가이사랴의 모든 제자들은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은 주기도문의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의 원대로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구하는 기도인줄 믿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대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엘리야 선지자는 모든 백성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왕상 18:21) 새 번역은 “여러분이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겠습니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믿고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따르도록 촉구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정복 전쟁을 다 마치고 지파별로 땅을 다 분배한 이후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세겜에 모아놓고 고별 설교를 합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4-15)

엘리야처럼 여호수아처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신앙 생활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히 전진하는 삶입니다.

바사 제국의 왕궁에서 아하수에르 왕의 총애를 받는 왕후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인 유대 민족이 멸절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금식하고 왕의 규례를 어기고 목숨을 걸고 왕앞에 나아가며 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스 4:16, “If I perish, I perish.”)

만약 에스더가 자기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고 평안한 삶을 살려고 했다면 이런 무모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스 4:14) 라는 모르드개의 말을 잘 새겨듣고 결단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죽게 된다면 죽을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에스더의 위대한 결단을 통해서 하만의 음모가 드러나고 유다 민족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사각오의 신앙을 지켰던 성경에 기록된 또 다른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다리오 왕의 신임을 받는 총리 다니엘을 음해하기 위해 다리오의 신하들이 계략을 꾸밉니다. 30일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규례를 공포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하던 습관대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결국 신하들의 고발로 인해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다니엘의 신앙을 평가합니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으면 죽이리이다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한 다니엘을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셔서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왕 고레스 시대까지 귀하게 쓰임받게 하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니엘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고, 이방 왕 다리오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로 하며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보상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헌신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예언하신 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잡혀 심문을 당한 이후 로마 총독의 명령에 의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갈 때에 수 많은 로마 군인들이 호위하여 가게 됩니다. 그는 로마에서 2년간 가택연금 상태로 있으면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전승에 의하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마게도냐를 재방문하였고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A.D. 67-68년경 두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된 이후 재판을 받고 처형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우리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습니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단호한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15년전 한국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를 방문하여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한재성 선교사의 간증을 요약하여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한재성 선교사님은 한국 기독교 침례회 선교부 파송으로 1997년에 중앙 아시아 카자크스탄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비자 문제로 카작을 떠나 4년간 필리핀에서 사역하다가 카작을 잊지 못해 2004년 4월 다시 카작으로 입국하여 사역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04년 9월 13일, 한 선교사님이 두 딸을 학교에 라이드 해주러 간 사이에 두 명의 강도가 한 선교사님 아파트에 침입하여 혼자 집에 있던 한 선교사님의 아내 김 진희 선교사의 목숨을 빼앗아갔습니다. 최근에 정착한 한 선교사집에 정착금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돈을 훔치기 위해 아파트 관리원을 가장하여 집에 침입하였고, 김진희 선교사의 손과 발을 묶고 테이프로 입을 봉하고, 돈을 내놓지 않자 갖은 고문을 하였고 결국 쇠파이프로 머리를 내리쳐 죽게 하였습니다.

한재성 선교사님은 나중에 <땅 끝에 남은 자>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에서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2004년 9월13일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 열쇠로 집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소리가 나질 않았다. 살펴보니 전기선과 전화선이 잘려져 있었다. 다시 열쇠를 넣어 문을 열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안쪽에서 괴성과 함께 문이 내 쪽으로 덮치듯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쇠파이프가 내 머리를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막았지만 나의 왼쪽 머리는 터졌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괴한들이 떠나고 난 후, 아내의 모습은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처참했다. 손과 발이 뒤로 묶여져 있었고 얼굴은 옷가지 가려져 있었다. 옷가지를 들추는 순간, 아내의 머리에서 흐른 엄청난 양의 피가 거실 바닥에 쏟아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맥박을 확인했으나 뛰지 않았다. 가슴을 짚어 보았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제발, 제발, 아내를 살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아내가 숨 쉬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하나님 제발…’

장례식을 마칠 무렵 갑자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 아내를 받았느니라.’ ‘오, 주님. 그러셨군요. 제 아내 주께드리오니 받으소서.’나는 두 손을 들어 하나님께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올려드렸다’”

사랑하는 아내를 자신이 섬기던 현지인들에 의해 잃고 슬픔에 잠기기도 했지만 한재성 선교사는 아내가 피를 뿌린 그땅을 품고 현지인들을 섬기기 위해 지금도 카자크스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재성 선교사야 말로 이 시대의 사도바울처럼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을 빼앗은 그 민족을 미워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한재성 선교사는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분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웨인즈빌 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없어도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한 번 뿐인 인생을 복음을 위해 살고,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4-18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사명과 성령과 말씀에 매인 삶
• 본문: 행 20:22-24, 32
4/18/2021 주일 낮 예배

오늘은 어느 목사님의 설교문에서 읽은 예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한 청년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지망했습니다. 수속절차를 거의 끝내고 마지막으로 출발을 확인하려고 뉴욕에 갔는데, 거기서 그만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합격된 것입니다. 이유는 그의 부인이 아프리카의 기후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체질임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부인과 함께 고향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의 각오를 했는데 이루지 못하니 실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가지는 못하지만, 돈을 열심히 벌어서 선교사의 일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는데 부업으로 교회의 성찬식에 사용하는 포도즙을 만드는 사업을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 아버지의 그 사업을 인계받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돈을 쓰겠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사업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결심한 대로 사업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을 정성껏 헌금하였습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먼 이국에서 주님께 인도되는 것을 기뻐하며 거액의 선교비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바로 Welch이었고 그가 만든 포도즙이 그 유명한 Welch 포도즙입니다. 지금도 그의 가족들은 좋은 포도즙을 계속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Welch 라는 청년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는 길이 막혀 선교사로 갈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주 주신 사명(calling)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과 순종을 기쁘게 받으셨고 음료 사업을 통해 벌은 돈으로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사역을 하게 하심으로 그의 사명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의미있게 보람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사명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 가장 가치있는 삶입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소명에 대해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것(소명)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하늘의 부르심’이 있습니까? 나의 생명을 드리기까지 헌신할 가치가 있는 소명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았던, 소명에 충실했던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섰던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 종교 엘리트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말살하는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찬란한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앞에 그는 꼬꾸러뜨려졌고 그의 눈은 멀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평생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 불평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수 많은 장애물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 막지 못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24절 말씀에 그의 인생 사명 선언서와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늘 기억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님께 받은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는 경주자처럼 결승점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갔고,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사처럼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도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그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스프린터처럼 뒤의 것은 잊어 버리고(자신의 옛 모습)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소명)을 늘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깨닫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경주자처럼 목표점을 향하여 전력질주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고난과 핍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 너머 있는 기쁨을 위하여 고난을 인내함으로 극복합니다.

모세의 일생도 바울의 일생과 비슷합니다. 그는 40세가 될 때까지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로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지식과 학문, 교양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핏속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동족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음을 잘 알았기에, 40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히브리 사람 중 하나가 애굽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할려고 시도하였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그는 살인자의 신세로 전락하여 결국 멀리 미디안 광야로 도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무려 40년 동안이나 평범한 목자로 살았습니다. 은둔의 40년의 시간이 마치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불이 붙은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인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압제에서 고통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이끄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주저하였으나 그는 마침내 순종함으로 바로 앞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 40년의 여정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수 많은 어려움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지만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내려다 보이는 모압 평지 느보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집의 충성된 사환처럼 주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후회없는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사명과 성령과 말씀에 매인 삶”이라고 붙여 보았는데요,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붙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에 매인 삶, 말씀에 붙잡힌 삶입니다.

먼저 성령에 매인 삶입니다.

22절.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 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라기 보다는 ‘성령에 매인’ 즉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 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과 환난에 대해 미리 알려 주셨음을 짐작케 하는 구절이 23절에 이어집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박과 환난임을 그는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에 매인’ 주님의 종이었기에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전도자 사도 바울의 생애는 성령의 사로잡힌 삶이었습니다. 그의 회심부터 시작하여 전도 여정의 고비 고비마다 성령께서 그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행전은 성령 행전이라 할 만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시작부터 베드로와 빌립과 스데반, 사도 바울의 사역의 핵심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이 구절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은 원어로 보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으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재 시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은 우리가 구원 받은 것처럼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합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 지내던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날마다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전 것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이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나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늘 고백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충만을 술취함과 대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배력과 영향력 때문입니다. 누구의 지배를 받는냐가 중요합니다. 술취하는 사람은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길을 걸을 때 갈 지 자로 걷습니다. 불필요한 말을 계속하고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추운 겨울날에도 거리에 쓰러져 잠을 자기도 합니다. 술이 그의 사지를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술 중독이 되어 가족과 이웃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술로 인해 음주 사고나 폭행, 살인, 가정 파탄과 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따라갑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분노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변화되어 온유하고 희생적이고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평소에 부끄러움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이웃들에게 담대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로 인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었고, 지금도 전파되고 있고, 죄악이 가득한 사회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성령에 매여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다스리심 받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고린도에서 전도하던 바울에게 마게도냐로부터 실라와 디모데가 내려오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붙잡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쉬네이케토’인데, ‘결합하다’ ‘열중하다’ ‘강권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합류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기 이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함께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더러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라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처럼 담대하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 5:13)
사도 바울이 미친 사람 취급 받기까지 복음 전파에 매진한 것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한 복음은 모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24절에서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까지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비한 체험을 사모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하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때로는 초대 교회 때처럼 이적과 기적의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지금도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우리 마음 속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잘라내며 우리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감찰하고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세 가지에 매인 삶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사명에 매인 삶, 성령에 매인 삶, 말씀에 매인 삶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가치있는 삶, 목적있는 삶을 살아 갑니다. 고 옥한음 목사님은 그의 책 제목에서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환난과 핍박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며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는 일꾼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4-11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교회를 섬기는 일꾼의 자세
•본문: 행 20:13-38
4/11/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가량 복음을 전한 이후 소아시아를 떠나 2차 전도 여행 때 개척한 교회들을 두루 다니며 제자들을 권면하고 교제를 나눕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위해 빌립보로 돌아가 배를 타고 드로아에 상륙하여 일주일간을 체류하게 됩니다. 드로아를 떠나기 전날 밤에 밤 늦게까지 말씀을 강론하다가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다시 살려냅니다. 그날 밤이 지나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앗소,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에베소를 지나서 곧장 돌아가는 여정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년동안이나 머물면서 기도와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곧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가 드린 구제 헌금을 가지고 속히 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차선책으로 강구한 것은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한 것입니다. 며칠간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당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로 교인들을 목양하고 교회를 이끄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행전에 등장하는 여러편의 사도 바울의 설교문 중에 유일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한 설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에베소 교회 영적 지도자들에게 전한 바울의 고별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섬기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28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를 값으로 치르고 사신 교회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전(ransom)으로 치르고 산 교회이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음부의 권세조차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이므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일이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내 몸처럼 여기고 섬기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믿음의 고백위에 “내 교회”(my church)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 교회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고, 회개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침례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를 임명하여 지속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의 내용을 살펴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일꾼의 자세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겸손과 눈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에베소 교회들과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보인 모범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자세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사울은 스스로 큰자라고 생각했고 가문과 학문과 사회적인 지위에서 우월의식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관은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겼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고 주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구원하시고 직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었고, 또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내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기까지 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은 바울처럼 먼저 겸손함으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 사회적 지위나 직분을 자랑하기 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충성되이 여겨 섬김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김을 받으려하기 보다 먼저 섬기며’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겸손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눈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눈물(울었다는 표현 포함)이라는 구절이 세번 나오고 있습니다. (19, 31, 37) 바울의 사역은 기도의 사역이었고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성격이 강직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소유한 동시에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뜨거웠기에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전도자였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나 실라를 비롯한 그의 동역자들을 대할 때 아비가 자식을 대하듯,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사랑과 긍휼함과 인내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의 열정과 눈물은 기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개척한 교회 성도들을 위해 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지키시고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늘 기도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바울의 사역의 동력은 눈물의 기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저와 우리 모두가 바울을 본받아 눈물의 기도를 뿌리는 주의 제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고난 중에 인내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계속해서 19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 바울은 1,2, 3차 전도 여행 중에 수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은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당한 핍박이었으며, 에베소에서는 이방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핍박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그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환난 중에도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비결을 체득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겪게 된 갖은 고난과 환난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전 1:4)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고백하기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character)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지체들을 섬길 때에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홀로 한숨짓고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중에 신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세번째는 물질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섬겼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순회 전도자들 중에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돈벌이 목적으로 전도 행위를 하러 다니는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탐심의 노예가 되어 복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교회 장로들에게 “너희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하며”(벧전 5: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어려운 성도들의 형편을 잘 알기에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낮에는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자신의 필요를 충당했고 주로 오후와 저녁, 안식일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가지 일을 병행하였기에 육체는 항상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텐트메이커로서 살았던 것은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20:33-35)

우리의 섬김의 동기가 물질이 되어서는 안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 섬기는 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장에서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것처럼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들에게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마땅하지만(사도들의 권리이지만), 자신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탐심의 마음을 버리고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영혼들의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기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줄 믿고 맡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온 교회를 위해 경성하는 자세로 섬겼습니다.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삼가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세코’인데요, ‘주의를 집중하다’ ‘전력하다’ ‘관심을 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도록, 탐심의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 침체에 이르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벧전 4:7)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제자들은 육체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기에 그들은 시험에 들었고 두려움에 휩싸여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 자신을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일꾼들은 온 양 떼, 즉 온 교회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무엘의 고백처럼 ‘결단코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병든 자가 나음을 얻고, 길 잃고 방황하던 자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되며,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던 사람이 사명을 발견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이웃을 위해,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을 위해 중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독일을 상반된 이념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양분하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어떻게 무너진 줄 아십니까? 혹자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소수의 중보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1982년부터 옛 동독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 기도회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동독 정부는 반정부 기도회를 허락하지 않았고 1989년에는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니콜라이 교회는 4개월 동안 여름 휴가기를 맞아 평화 기도회를 준비했고 그해 9월 4일 기도회를 재개했습니다. 이후 기도회와 월요 시위에 참가하는 인원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 났고 당시 라이프치히 인구 50만명 가운데 32만명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강경 진압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공산주의 동독은 사라지고 독일은 통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29-30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교회를 공격하는 사나운 이리(외부적인 공격)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내부적인 공격)이 에베소 교회에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공격과 내적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 ‘주의를 집중해서’ 경성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 늘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일꾼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부름받은 일꾼으로서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서, 겸손과 눈물로 교회를 섬기며, 고난 중에 인내함으로 섬기며, 청빈한 삶의 모본을 보이며, 영적으로 깨어 경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4-04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부활을 전하라”
• 본문: 마 28장
4/4/2021 부활절 주일 낮 예배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다음과 같은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리이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는 일입니다. 그 겨자씨는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합니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집 저집 모든 집을 다 찾아 다니면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하였으나 모든 노력이 헛 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발길을 돌렸다고 합니다.

오늘은 기독교 최대의 절기이자 축제인 부활절입니다.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을 지키는-아니 존재하는-종교는 기독교 외에 아무 종교도 없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조차도 인간의 생로병사를 자연의 법칙으로 여겼기에 영혼과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체는 무덤에 묻혔고 그는 죽은 자로 기억될 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의 근거위에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위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여러번 제자들에게 예언하셨고, 성경대로 예수님은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수 많은 증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때는 예수님을 버리고 다 뿔뿔이 흩어졌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들은 변화되었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열방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순교하기 까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핍박자 사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전도자 바울이 되어 땅끝까지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복음을 들은 수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들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8장은 예수님이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대위임명령(Great Commission)에 관한 내용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1-10)
안식일이 지나고 첫 날(주일)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마가 복음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내이자 예수님의 제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를 언급하고 있고, 누가 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섬겼던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를 포함)였습니다. 모두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이 여인들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여자들의 지위는 바닥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유다 법정에서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만약 성경이 거짓된 이야기를 서술할려고 했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빈 무덤의 첫 목격자들은 유대 남자들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 남성들이었지만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섬겼던 사람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신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가고 없었지만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던 사람들 또한 여인들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막 15:40-41)

성경은 예수님 살아 생전에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섬겼고,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하던 여인들의 헌신과 믿음과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여인들 중에-다른 복음서에도-먼저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 나신 후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니”)

1)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 잡혀 있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놓임을 받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5명의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본문의 마리아는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라는 마을은 갈릴리 호수 서쪽 항구인 디베랴 북서쪽으로 5KM 정도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려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한 두 귀신도 아니고 일곱 귀신이나 들려 살았던 그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하루 종일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 다니며 고함치고 아무것이나 집어서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고 그의 몸은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저주받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롭고 소망없이 살아가던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로잡고 있던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신 것입니다. (눅 8:2)

2)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소유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인생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불치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섬기게 됩니다. 갈릴리 작은 시골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의 가진 것으로 복음 사역을 섬기기로 헌신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물질이 있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적은 소유와 재능으로도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어려운 형편 중에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을 귀하게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지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섬겼던 몇 명의 여인들은 예수님 곁에서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막 15:40-41)
그들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 곁에서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목격한 그들 중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로마 군병들에게서 받아 급하게 장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오후 3시)과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오후 6시)사이에는 3시간 가량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장례법에는 시체를 향유로 씻어 세마포로 쌌지만, 시간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가루 향품만 시체에 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면 정식으로 장례를 지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시신이 안치된 무덤으로 찾아갑니다.

4)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첫번째로 만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28:1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해서 동이 터오기 전에 어두운 새벽길을 달려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장정 몇사람이 힘을 합해야 움질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을 굴려 내고 그위에 앉아 말합니다. 그 천사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눈처럼 흰 옷이었습니다. 지진과 천사의 하는 일을 보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5-6)

여인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들도 과연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새벽길을 달려 왔지만 그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우리도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머리(지식)로는 알고 있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되돌아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 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옆에서 동행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눈이 어두워서 살아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인들처럼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요. 천사가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곁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지만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여 믿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처럼,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져 있을 때는 부활의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 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또 빨리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7)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알리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지체하지 말고 속히 전해야 합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은 여전히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있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26:32) 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길 원하셨을까요? 제자들 다수가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라고 머물렀던 곳,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였던 소외되고 가난한 지역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달려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안하냐?’라고 물으십니다. 두 명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양발을 붙잡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육체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짐으로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6:9 에는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첫 인물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셔서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평생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섬겼던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 그 여인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헌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예수님만 사랑하며 그 분만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나타나시고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한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변화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평생토록 예수님만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한 사람들 (11-15)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 갈 때에,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 중 몇 명이 주일 새벽 무덤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립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한 대제사장들이 돈을 주고 경비병들을 고용하여 무덤 입구를 육중한 돌문으로 막고 철통같이 경비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돌문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난감한 상황을 감추기 위해 계략을 꾸밉니다. 경비병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잘 때에 도둑질하여 갔다고 증언하라고 말합니다. 총독에게 이 소식이 전해져도 경비병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15절에는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고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 퍼뜨리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술수는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A.D. 60-70경) 유대인들 가운데 효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짓은 진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꾸며낸 거짓말은 부활의 확실성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 돈을 받고 무덤을 지키던 여러명의 경비병들이 동시에 잠을 자고 있는 것도 어렵거니와, 장정 4-5사람이상이 힘을 써야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문을 제자들이 밤에 와서 열 때에도 경비병들이 눈치채지 못할 수 없을 것이며,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대로 빈 무덤에 세마포가 있었는데 한 밤중에 시체를 훔쳐가면서 시체를 감싸고 있던 세마포를 풀어 놓고 시신만을 가지고 갔을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경비병이 근무 태만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로마 군법에 의해 사형에 처해 질수 있기 때문에 근무 중에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갖가지 거짓 주장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본문에 기록된 ‘도적설’과 ‘기절설’(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하신 것, 나중에 무덤에서 깨어났다고 주장, 로마 군병들이 창으로 시체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나온 사실로 완전한 죽음 입증됨), ‘환상설’(제자들이 죽은 예수님을 너무나 간절히 그리워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 하지만 고전 15장 기록된 부활의 목격자들이 500명 이상되는데 이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등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도 믿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진리를 말하고 있고 가치있는 책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부활 사건 만큼은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습니다.

리 스트로벨이라는 사람 또한 그런 사람 중 한명이었습니다. 예일대 법대 출신의 언론인이었던 그는 14년동안 시카고 트리뷴을 비롯한 저명한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언론 부분에서 수 많은 상을 수상할 정도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찬 무신론자로서 예수님의 부활은 전설이거나 제자들의 착각이며 제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인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2년 동안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찾기 위해 2,200여편에 달하는 자료들을 조사한 끝에, 부정할 수 없는 부활의 진실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1981년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과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변증하는 많은 책을 저술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반대하고 공격한다 할지라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부활의 진실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16-20)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갈릴리의 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마가복음에는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열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일에 대해 나눌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강의 인사를 나누시며 손과 발을 보이시면서 단순히 영혼이 아닌 육체를 가지신 존재임을 증거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기자 함께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시며 확실히 증거해주십니다.

본문 17절에도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나 그 중에 아직도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자 중에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이 모여있는 장소에 나타나셨을 때에 있지 않았던 도마는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믿음 없는 제자 도마를 예수님은 사랑하십니다. 8일이 지난 어느날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집안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는 그제서야 예수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참으로 복있는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진리로 믿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들 중에 한 사람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리로 믿으며 확신 가운데 살아 가시길 바랍니다.

모인 11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유언과도 같은 말씀, 반드시 지켜 행해야할 지상 위임 명령을 주십니다. 18-20절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행전 1:8 말씀처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지상 대 명령을 간단히 분석하면, 1) 지상 대 명령을 주신 분은 “하늘의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왕 중의 왕이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2)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모든 민족으로 가야(go) 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야(make disciples) 합니다. 3)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어야(baptize) 하며,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며(teach) 지키게(keep) 해야 합니다. 4) 그 명령을 주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열 한명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순종함으로 땅 끝까지 흩어져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된 삶을 살았으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순교의 피위에 서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믿는 우리 모두는 부활을 전하는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 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와서 그를 만나십시오’라고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침례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라고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다시 한번 힘차게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3-28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3/28/2021 종려주일 예배
• 본문: 마 21:1-11, 사 53:5

프랑스 파리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개선문이 ‘에투알’ 개선문입니다. ‘엘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1805년 12월 4일 프랑스 군대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오스텔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건축토록 한 승전 기념물입니다. 높이가 50M, 폭 45M나 되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에게 영광을 주고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는 선전물이었습니다. 옛 로마에서 승전한 장군과 군대가 들어올 때 개선문을 만들어 환영하던 그 전통을 그대로 따라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것은 그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1806년에 착공되었지만 그가 살아 생전에 완공되지 못하고 1836년에서야 완공되었고, 1840년에 세이트헬레나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죽은 그의 유해를 싣고 온 운구 마차가 그 웅장한 개선문 아치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로마 시대때나 19세기 프랑스에서도 이처럼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과 그 병사들을 환영하는 의식은 동일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장군들과 황제의 화려한 입성과 비교해 볼때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입성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세상의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분명 ‘승리자의 입성’이었고 ‘진정한 왕’의 입성이었습니다.
종려 주일 아침에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 겸손한 왕의 입성 (1-6)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4번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다른 방문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제자들에게 여러번 예언하신대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처럼 희생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스스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 벳바가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베다니-에 보내시며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가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십니다. 당시 남의 나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왕족과 랍비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퀴리오스)는 단순한 주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말하면 그 주인이 내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귀 주인은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순종한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과 마차같이 위엄있는 것을 타지 않고 나귀/나귀 새끼를 타시길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5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스가랴 9:9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정복자나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자로서가 아니라 온유하시고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면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또한 나귀는 다윗 왕가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습니다. 삼하 15-16장에 보면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감람산을 넘어 나귀를 타고 피신을 갔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는 감람산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귀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위해 이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죄인들을 위해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초라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나귀를 선택하신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 20장 하반부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위해 예수님께 로비를 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한 명은 주의 우편에, 한 명은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라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5-28)

우리들도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섬김을 받으려하기 보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질려고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세워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낮아지고 서로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 영광의 주님의 입성 (7-9)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고 그 위에 예수님이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로마 제국 전역에서 운집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차를 보고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예수님을 열열히 환영하였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고 나무가지로 길에 깐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신다는 의미의 퍼포먼스입니다. 열왕기상 9장에 보면 예후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친구들이 그렇게 예후를 환영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겉옷은 사람들의 전재산과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벌 밖에 없는 겉옷을 보면 그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겉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재산과도 같은 겉옷을 길에 펼친 것은 왕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

유대인들은 시편 118:25-26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오 구원하소서’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음역으로, 내용상 간청이지만 찬양의 표현으로 굳어져서 예수님 당시에는 “~께 찬양을 드린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즉 ‘다윗이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가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가 주님을 찬송합니다’ 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성전으로 나아가는 왕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시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할 때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 왕에 비유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왕 중의 왕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알았고,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 정도로 알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고 성전을 모욕하는 이단아로 낙인되었습니다.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여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선동가로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복되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는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우리의 왕께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려야 합니다. 겉옷을 길에 펼치며 왕의 입성을 축하한 백성들처럼 우리들도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 95:6-7)

2천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재림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이 타는 백마를 타고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계 19)

요한 계시록 4장에는 우리가 천국에서 드려질 천상의 예배의 모습이 밧모섬에 유배중인 사도 요한의 환상을 통해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 이십사 장로들과 각종 생물들이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찬송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우리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호산나 호산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왕이신 주님을 경배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늘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 구원자 그리스도의 입성 (사 53: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한마디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골고다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일주일 동안 행하신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일에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월요일에는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수요일에는 쉬시고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되십니다. 금요일 새벽까지 불법 재판을 받으신 후 금요일 오전 9시경에 골고다 언덕위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경 운명하십니다. 이후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시고 주일 이른 새벽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중죄인들이 지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나를 위해 조롱과 모욕, 배반과 수치를 당하시고, 침뱉음과 채찍에 맞으시고, 양손과 양발에 대못에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 쓰시고, 허리에 창을 찔리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원합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파사에서 사용하다가 로마 제국에 도입되어 주후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대개 노예나 외국인 반역자들의 사형에 사용되었습니다. 손목과 발목에 약 20cm 크기의 대못이 박히면 몸무게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집니다. 손발의 신경이 다 끊어지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늘어져 있으니까 가슴의 근육이 당겨져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호흡을 할 수 없으니 온 몸에 산소가 부족함으로 몸 전체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그 뿐 아니라 손과 발에서 흐르는 출혈로 말미암아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극악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잔인하고 끔찍해서 로마 시민에게는 결코 행해지지 않는 처형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은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 스러울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신명기 21:3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저주와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예수님이 허리에 창에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상함을 받으시고 정신적으로 상함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다닌 불순종의 자녀이며,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창에 찔리시고 배반 당하시고 수치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을 상속자의 지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화평케 되었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원수처럼 여겨지는 이웃들과도 화목케 되었습니다. 샬롬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보통 십자가 형벌을 받는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십자가형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나무 기둥에 묶인 채로 끝에 뾰족한 납 덩어리와 뼛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으로 맞았다고 합니다. 이는 극도로 잔인한 형벌이었는데,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스런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고통으로 부터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대신 그 고통을 담당해 주시니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한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는 크고 작은 질병 가운데 있고, 때론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의 모든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나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깨끗케 하옵소서!

찬송가 143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립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번 한 주간 이러한 찬송가 가사와 같은 고백을 담아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종려 주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겸손하고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경배와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그리스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에게 나를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는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3-21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본문: 사도행전 20:1-12
3/21/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하나님의 말씀 나누기 이전에 미리 말씀 드리면, 오늘은 제가 말씀 나누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북인도 무슬림 지역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는 김 바울 선교사님의 생생한 ‘선교 현장 이야기’를 영상으로 시청할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두 번의 걸친 암 수술과 큰 교통 사고로 인한 수개월간의 투병 생활을 극복하고 목숨을 걸고 선교에 매진하여 많은 인도의 영혼들을(2천여명의 청소년) 주님께로 인도하고 계신 귀한 분이십니다. 영상을 통해 큰 은혜와 도전의 시간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3차 전도 여행 중 3년간의 에베소 사역 이후 이어지는 사역의 내용입니다. (지도 참조)

제가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라고 붙여 보았는데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3번 등장하는 ‘권면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파라클레시스’ 때문입니다.(1절 ‘권한 후에’, 2절 ‘권하고’, 12절 ‘위로를 받았더라’)

이 단어는 예수님이 장차 오실 성령님을 가리킬 때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요 14:16, 15:26)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곁에서 부르다’라는 뜻인데요, ‘상담하다’ ‘권면하다’ ‘위로하다’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헬, ‘파라클레이토스’)은 ‘위로자’(comforter), ‘조력자’(helper), ‘상담자’(counselor), ‘변호사’(defender)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사용된 이 단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격려하심의 사역이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주의 말씀을 통한 위로하심과 격려 (1,2절)
먼저 3차 전도 여행 지도를 보면서 바울의 선교 여정을 따라가 보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의 중심 도시인 에베소에서 약 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갑니다. 에베소에서 동역하던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게도냐를 보낸 이후 바울도 2차 전도 여행의 루트를 따라 그곳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권면하기 위해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마게도냐(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지역을 거쳐 그가 방문한 곳은 ‘헬라 지역’(2절)으로 기록된 아가야(고린도)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3달동안 머물면서 형제들을 권면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향후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로마 지역에 거주하는 로마 교회 교인들을 위해 복음의 진수라 일컬어 지는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아가야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돌아가고자 계획했지만 유대인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유월절을 지키러 가는 순례객(대부분 유대인)들을 가득 태운 배에서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해할 음모-아마도 육로로 북쪽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역 드로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1절. “소요가 그친 후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기 전에 3년동안 양육하고 훈련한 제자들을 모아 권면하고(encourage) 떠납니다.

2절.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마게도냐 여러 지역으로 다니며 바울은 여러 말로 제자들을 위로(many words of encouragement)하고 격려합니다.

이 두 구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바울은 에베소에서 떠날 때도, 마게도냐 여러 지역을 순회할 때도 믿음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로 위로하고 격려했겠습니까? 영원히 볂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 했으리라 믿습니다. 이방인 문화 가운데 살면서 갖은 핍박을 감내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환난을 이길 소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삶의 활력과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던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타기 직전,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놓고 고별 설교를 할 때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말씀에 그들을 위탁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울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20:3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의 길의 빛이며(시 119:105), 주의 말씀은 고난 중의 위로가 되어 우리를 살립니다. (시 119:50) 주의 말씀은 우리의 은신처가 되며 방패가 되어 악한 자로 부터 지켜 줍니다. (시 119:114) 주의 말씀은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시 119:9)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쳐있는 영혼들을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동역자들의 동행을 통한 위로하심과 격려 (4,5절)
4절에 보면 바울과 함께 아시아까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7명인데요 이들은 이방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방문한 이유 중 하나는 기근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구제 헌금)을 거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연보의 의미는 단순한 구제 헌금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된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연합을 상징하는 귀한 의미도 담겨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드린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각 지역을 대표하는 대표단이 헌금을 가지고 함께 가게된 것입니다. 소바더와 아리스다고, 세군도는 마게도냐 대표이며, 가이오와 디모데는 갈라디아 교회의 대표격이며,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보다 먼저 출발하여 바다 건너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절에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는 구절로 보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바울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두 8명이 바울과 함께 아시아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2,3 차 전도 여행을 할 때마다 함께 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에는 바나바와 마가(중도 하차)와 동행하였고, 2차 전도 여행 때에는 실라와 디모데, 누가가 동행하였습니다. 3차 전도 여행 중에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각 지역 교회를 대표한 7명의 사람들이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될 때에는 누가가 동행하였으며, 로마의 셋집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낼 때에는 제자 디모데가 함께 하였습니다. 두번째로 로마 감옥(마메르티네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누가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바울과 함께 한 동역자들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말동무가 되어 주었고, 기도의 파트너가 되었고, 시력이 좋지 않는 바울의 대필자가 되어 편지-신약 성경 서신서-를 적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역자들을 통해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서로 도움으로, 은혜를 나눔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게 하십니다. 연합과 동행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두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의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전 4:9-10)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전 4:12)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귀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넘어 질때 붙잡아 주고 기도해 주는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3. 기적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격려 (12절)
7절 부터는 드로아에서 바울과 누가를 기다리던 7명의 형제들을 만나 함께 주일에 예배 드리고 말씀을 나누는 중에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 ‘그 주간의 첫날’(주일)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주의 만찬). 바울 일행은 일정상 다음날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 까지 강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다락이 있는 3층 집이었는데 3층 창에 걸터 앉아 말씀을 듣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락방은 아마도 촛불에서 발산되는 열기와 좁은 다락방에 꽉 차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열기가 합쳐지는 바람에 찜통 같았을 것입니다.)

3층에서 떨어진 유두고를 일으켜보니 이미 그는 죽었습니다.(9절)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바울은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기를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0)고 합니다. 기절한 청년을 흔들어 살린 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죽은 청년을 바울이 기도함으로 살려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사건(9:36-42)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을 연상케 합니다.

바울은 이미 죽은 유두고 위에 자신의 몸을 엎드려 그 몸을 안고 외쳤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Don’t be alarmed! He is alive)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 순간 죽은 시체에게 임할 때, 죽은 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라는 여제자의 시체가 누인 다락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외쳤을 때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욥바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었던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통해 성도들은 “적지 않게(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초자연적인 사건(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지난 2주간 지금도 ICU병상에서 코마 상태로 계신 육복순 집사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려 주시고 회복 시켜 주실것을 믿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지금까지 지켜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와 라파’의 손길로 함께 하시며 일으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귀한 여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 방편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주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하는 동역자들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지금도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이번 한 주간 지낼 때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3-14
sermon manager 박성환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본문: 행 19:21-41
3/14/2021 주일 낮 예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소동들이 일어납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은혜를 나누었던 본문의 마지막 구절 말씀대로 주의 말씀에는 파워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9:2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런데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긍정적인 현상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적인 현상, 즉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인해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대적하던 무리가 있었는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율법에 정통한 자들이었고 율법을 준행하기에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의로 자신을 포장하고 교만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믿었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그들의 기준과 통념과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몄고, 결국 백성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도 여행 중에 유대인들로 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1차 전도 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위협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에도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으로 부터 귀신을 내쫓은 일로 인해 주인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고린도에서도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당했고, 또 고발을 당하여 법정에 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1-3차 전도 여행 중에 발생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아시아의 중심도시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중심 도시인 에베소 사역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3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두란노 서원으로 사역지를 옮겨 2년 동안이나 날마다 주의 말씀을 전하여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기간 사역을 통해 신실한 제자들이 훈련되었고 그 인근에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에서 말씀 사역을 통한 변화와 더불어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바울을 통해서 행하셨습니다.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쫓겨나가는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상이 가득한 에베소를 가득 덮게 되자 수 많은 마술사들이 비법이 적힌 주문 책들을 모아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는데 그 책 값이 은 오만(오만 드라크마)이나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건에 이어서 일어난 엄청난 소동(disturbance) 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소동의 시작 (23-27) 데메드리오
소동이 일어난 것은 23절 말씀에 의하면 “이 도로 말미암아”(about the Way)일어난 것입니다. “이 도”는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도, 진리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으로 인해 에베소에 큰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소동의 중심 인물은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으로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은세공업자(silversmith)였는데, 다른 장인들과 함께 결정한 조합의 지도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직공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을 선동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전한 메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의 풍족한 생활은 이 생업에 달려 있습니다. (아데미 신전이 고대 세계의 일곱 기적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방팔방에서 그것을 보러 왔습니다. 방문객들이 은감실과 은신상을 사 갔기 때문에 그것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은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2)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권유하여(전도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 그래서 우리의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었습니다. 4)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숭배하는) 아데미의 위엄(divine majesty)도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아데미 신전은 높이 19m, 간격 1.2m 남짓의 27개 대리석 기둥이 있는 길이 130m, 너비 67m의 거대한 신전이었습니다. 신전 내부에는 하늘로부터 떨어졌다는 젖가슴이 많이 달린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자들에게 은신상을 판매하여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었던 사람들을 충동하여, 바울이 그들의 생업을 망하게 하였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의 호소가 교묘한 것이 실리를 얻기 위해 거짓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 관심사는 재정적인 수입이 감소한 것인데, 그것만을 내세우지 않고 거짓 명분, 즉 바울의 전도로 인해 온 아시아와 천하의 사람들이 숭배하는 아데미의 위엄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씀 드리자면 바울 때문에 사업이 망하게 되었으니 그를 내쫓자라고 말하지 않고, 바울의 전도로 인해 우리의 직업도 천하게 되고 우리가 섬기는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아데미의 신성함에 손상을 입게 되었으니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선동합니다. 데메드리오의 연설은 에베소에 거주하는 무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교묘한 연설이었습니다.

대중 연설을 잘 하는 정치인들이나 선동가들은 데메드리오처럼 실리를 얻기 위해 명분을 내세웁니다.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 신처럼 여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순교라고 믿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속이는 자들의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사람을 속여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려는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왜곡되게 해석하여 건전한 믿음에서 떠나도록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과 사이비 종파들의 거짓 교리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특별히 비성경적 종말론을 퍼뜨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불안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떠나 사람의 가르침에 빠지게 하는 집단에 빠지지 않토록 분별의 영을 가져야 합니다.

• 소동의 절정 (28-34) 분노한 무리들
데메드리오의 말을 들은 에베소의 수 많은 사람들은 분노가 가득한 군중으로 변합니다. 그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치며 온 시내가 요란하게 되고 바울의 일행 중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당시 연극장은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시설물이었다고 합니다. 연극장은 에베소의 동맥 구실을 하는 아카디안 대로(Arcadian Way)의 동쪽에 있던 커다란 노천 극장이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바울의 손을 통해 행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들를 보고 두려워하며, 마술을 하던 값비싼 책들을 사람들 앞에서 불태울 정도로 회심의 증거를 보여 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분노에 가득한 무리(폭도)로 변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군중의 심리가 쉽게 돌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며칠 뒤 빌라도의 관저 앞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친 무리로 변하였습니다.

32절에 보면 연극장을 가득 메운 무리들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견의 일치도 없고, 심지어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도 알지도 못한 채 모여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군중 심리에 이용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주주의 제도의 장점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이 다 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수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하나님께 물어야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사람의 소리에 귀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여론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분별의 영을 가지고 시대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연극장에 들어 갈려고 할 때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아시아의 관리 중-이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아시아의 관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며 가장 부요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는 각 성을 위하여 해마다 아시아에서 선임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권세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로마 황제와 로마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여 로마에 유익을 도모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후원자 중에 당시 사회 지도층에 있는 유력한 사람들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만약 바울이 연극장에 들어갔다면 분노한 무리들에 의해 큰 해를 입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 소동의 진정 (35-41) 서기장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내세워 에베소 군중들에게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변명할려고 했지만 그들의 계획은 군중들의 함성에 묻히고 맙니다. 알렉산더는 구리 세공업자로서 그 역시 데메드리오와 마찬가지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딤후 4:14-15에서 알렉산더가 자신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유대인들을 대변해서 유대교는 바울이 전하는 종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바울을 공격하는 말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연극장에서 발생한 소동을 진정하기 위해 일어난 사람은 익명의 에베소 ‘서기장’(city clerk)이었습니다. 서기장은 제일 중요한 지방 공무원이자, 회의의 행정 실무자로서 에베소와 로마 당국의 중재자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서기장은 무리를 진정시킨 후 말하기를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운 우상의 신전지기(guardian of the temple)임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자부심을 부추깁니다. ‘신전지기’(헬, 네오코로스)라는 명칭은 ‘신전과 특별한 신을 섬기는 의식을 담당한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명칭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치하에 있던 도시들은 저마다 로마 황제에게 신전을 봉헌하고 그 대가로 ‘신전지기’라는 호칭을 얻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서기장은 무리들이 붙잡아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에 대하여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차분히 권면합니다. 4가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합니다.
1) 이 사람들은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아데미)을 비방하지도 않았는데 당신들이 붙잡아 왔다고 말합니다.

2) 만약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고발을 할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소송을 제기하라고 합니다. 이 적법한 절차란 총독의 주재하에 실시되는 정규적인 순회 재판 일에 소송을 심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매달 3회씩 개최되는 에베소 시민 민회에 그문제를 제기하라고 권고합니다.

4) 그러면서 서기장은 결론적으로 그의 제안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 소요 사건 때문에 로마 당국으로부터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또한 아무 명분도 없는 이 불법 집회 때문에 로마의 호감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연극장에 모임 군중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행 18장에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발하였을 때,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바울의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 바울의 행동이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라면 내가 판단하겠지만 유대인들의 언어와 명칭과 법에 관한 것이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너희 스스로 처리하라고 하며 모든 사람들을 법정에서 쫓아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말씀으로 환상으로 위로해 주시고,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셔서 바울을 돕게 하십니다. 바울이 회심 직후 다메섹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려고 공모한다는 계교가 알려지자 다메섹에 있던 바울의 제자들이 밤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려 탈출하게 합니다. 2차 전도 여행 중 베뢰아에서 복음 전하고 있을 때 데살로니가로 부터 추격해 온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형제들이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아덴으로 이동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전도 사역이 중단되지 않도록 믿음의 제자들과 형제들을 사용하기도 하시고, 로마 총독이나 에베소 서기장과 같은 이방인 관리들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보호하시고 지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가로챈 이후 형의 보복을 피해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먼길을 떠나게 됩니다. 홀로 외롭고 위험한 광야길을 걸어가다가 벧엘에 이르러 밤에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이 꿈은 예수님게서 한 제자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고 하실 때 언급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꿈과 함께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4-15)

첫번째 약속-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야곱이 잘나서, 자격 조건이 있어서 그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 야곱의 생애 가운데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약속-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은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연약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를 지키고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사명)을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이었겠습니까?

야곱의 일생 가운데 지팡이가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가 사명을 이루기까지 동행해 주신것처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을 지키고 보호해주십니다.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예비한 손길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복음으로 인해 소동이 일어났고, 전도자들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대적하는 무리들이 바울을 고발하고 백성을 선동하고 동역자들을 붙들고 갔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고 계시며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까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십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람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주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지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3-07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본문: 행 19:1-20
3/7/2021 주일 낮 예배

지난 주 본문 중 8:21-23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23절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즉 2차 전도 여행(A.D. 50-52)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차 전도 여행(A.D. 53-57)을 떠나게 되는데 여행 루트는 1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였던 갈라디아 (더베,이고니온,루스드라), 브루기아 지역(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서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인 에베소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은 1,2차 전도 여행보다 긴 여정이었고, 함께하는 동행자(동역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3차 전도 여행은 소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몇 주전에 2차 전도 여행을 공부할 때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 이르렀을 때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행 16:6)하셨다는 말씀을 나눈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통과하여 무시아 앞에 이르러 북동쪽 비두니아로 가기를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그것 또한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결국 항구도시 드로아에서 바다 건너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원래 계획했던 지역을 뒤로 하고 유럽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2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 올 때에 소아시아에 속한 에베소에 잠시 들리긴 했지만,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18:21)는 말을 남기고,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대신 그곳에 브리스길라 부부를 남겨 두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3차 전도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소아시아 지역, 그중에서도 수도인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약 3년간 머물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와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파송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지역(소아시아 포함)에 먼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에베소와 소아시아 지역은 복음으로부터 버림받은 지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의 중심 도시가 되어 에베소 뿐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널리 전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최선으로 이끄시며, 아름다운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중심 도시인 에베소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서 아시아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1세기경 에베소는 인구가 25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헬라의 아데미-아르테미스(Artemis), 로마식으로는 디아나(Diana)-라는 여신의 신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데미 숭배가 그 지역에 재정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곳에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각종 축제들이 열리며, 상업이 번창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머물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을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의 침례와 성령 침례 (19:1-7)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합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바울이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르킨다면 그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성령의 존재 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그들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은 반복해서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있는 “어떤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도 못했고,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들은 침례 요한의 제자들로서 “요한의 침례”는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시는 구원의 침례, 즉 성령의 침례는 받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들의 믿음은 부족한 믿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로서 언변이 좋고 구약 성경에 능통한(전문가) 아볼로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역시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유대인들에게)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았습니다”(18:25) 전도의 열정은 있었지만 그에게서 부족한 점을 발견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를 집으로 초청하여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제자 훈련을 받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으로 아볼로는 온전한 전도자로 준비되어 나중에 고린도 지역에서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는” 탁월한 선교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신약의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평탄케하는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이전 유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복음을 전했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였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회개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침례” 즉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외적 증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라고 했습니다. 그가 베푼 물 침례는 회개의 침례이지만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침례는 믿음의 침례요 온전한 구원의 증표로서의 성령 침례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요한의 침례만 받은 그들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선포합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하였는데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그 분이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것이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세지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침례(회개의 침례)를 받았지만, 이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믿음의 침례” “은혜의 침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12명의 제자) 침례를 베푼 이후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던 120명의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동일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불의 혀처럼 강하게 임한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다른 언어(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이방인의 땅 에베소에서도 일어난 것입니다. 12명의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성령 세례(침례)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때 나중에(별도로) 주어지는 은사(double blessing)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 세례(침례)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임한 성령 침례는 예외적 사건으로 이해. 사마리아 교회와 유대인 교회와 연합 위해, 회심의 진정성을 확인할 때 까지 보류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증언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란노 서원 사역 (19:8-10)
이후 바울은 회당에 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고 권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바울의 가르침(하나님의 도)를 비방합니다. 이에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우회 전략을 꾀하는데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서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제자들을 훈련합니다.

두란노 서원은 철학자요 수사학자인 두란노가 정기적으로 사용한 학교였습니다. 한 헬라어 사본에는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는 그 시간에 서원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2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증거하여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훈련한 제자들을 통해 복음은 에베소 지역을 넘어 인근지역인 루커스 계곡에 있는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소아시아에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골 2:1, 4:13)

바울은 ‘선택과 집중’ 선교 전략을 통해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에는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우상이 가득한 대도시 고린도에 견고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신실한 교회의 일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3차 전도 여행중에는 전략적 요충지인 소아시의 수도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머물면서, 특히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매일같이 복음을 전한 결과 수 많은 제자들이 양육되었고 인근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지 않는 가족들이나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때 금방 열매가 없다고 하여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2년동안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결국 큰 선교의 열매를 맺은 것처럼, 눈물의 기도가 뿌려지고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추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 (갈 6:9)

놀라운 능력 (19:11-20)
바울은 말씀 전파를 통해서도 선교 사역을 하였지만,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행하신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11)
12절부터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천막을 만들데 사용)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악령)이 떠나갔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혈루증 환자가 예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을 때 병이 나았던 것이나(눅 8:44)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여도 병자들이 회복된 사건(행 5:15)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적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이 갖고 있었던 신비한 효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인 병자들의 믿음을 통해서 일어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기한 이적들을 본 한 마술하는 유대인이 시험 삼아 악귀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의 제사장(자칭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렇게 해 보았는데 악귀가 대답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그들은 악귀로 부터 조롱을 당한 것입니다.
악한 영도 진리를 분별하는 영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신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는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조롱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악귀들린 사람이 일곱 아들에게 뛰어 올라 누르는 바람에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줄행랑치기에 바빴습니다. 큰 창피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하며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2)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3)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주문을 하는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은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드라크마)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라게 되었고 큰 두려움(무서움+공경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을 것 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회개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에베소에 있던 수 많은 마술사들이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이었던 비법이 적힌 값비싼 주문 책들-책값이 비싼 이유는 책의 질 때문이 아니라 그책에 적힌 은밀한 말과 이름에 의해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을 가지고 와서 대중 앞에서 불살랐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사람들을 미혹하던 잘못된 행동들을 버리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직업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헌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가득하고 온갖 마술이 가득한 에베소에 영적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순절 예루살렘에 일어났던의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이방인의 땅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상은 불태워지고 복음이 그 땅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결과는 모든 우상을 파하는 힘이 있는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20절 “이와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주의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를 자유케 합니다. 주의 말씀은 병든 자를 고칩니다. 주의 말씀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날마다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도와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를 바랍니다.
능력있는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강건케 하시며 연약한 부분을 치유하시며 능력있는 주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2-28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바울의 동역자들, 브리스길라 부부 & 아볼로
• 본문: 행 18:18-28
2/28/2021 주일 낮 예배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기록한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수 십명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한장 전체를 할애하여 동역자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기록하면서 그는 그들의 얼굴을 떠 올리며 그들의 헌신과 사랑과 수고에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만나게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바울의 동역자들 중 부부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이름이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롬 16:3-4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They risked their lives for me)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일 말씀 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브리스가)가 누구인지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아굴라(Aquila)는 그 이름의 뜻이 ‘독수리’입니다. 그는 소아시아 본도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장막을 만드는 직업(tent-making)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에 거주하던 중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 로마 교회를 섬겼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내 브리스길라(Priscilla,바울은 정식 명칭인 ‘브리스가’로 기록)는 ‘작은 노부인’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식 이름입니다. 실제 로마의 저명한 가문 중에 브리스가 가문이 있었는데,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의 사람인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로마인으로서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복음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유대인인 아굴라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부의 이름은 신약 성경에 6번 기록되어 있는데, 3번은 바울 서신에3번은 사도 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두번씩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도 아내의 이름이 남편의 이름보다 앞서 기록되기도 했는데, 그 경우에는 아내의 지위가 남편 보다 높은 경우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영국 여왕의 남편을 호칭할 때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군 필립 공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가 대단한 사람인 것이 로마의 유수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장막 제조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유대인 청년을 만나 결혼하기로 결정한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인 그녀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그의 남편 아굴라와 함께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 네로 황제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극심한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하여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나그네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부부는 장막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로마 교회를 섬기다가,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 때, 로마를 떠나 아가야 고린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됩니다. 그 때 마침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이 생업이 같았기 때문에 함께 살며 일을 하였습니다. 독신이었던 바울이 장막 제조업으로 성공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집에 기거하였던 것이지요. 이 부부는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돕는 든든한 후원자가 됩니다. 바울을 위해 자신의 집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집에서 고린도의 가정 교회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로 부터 바울은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없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돌아가 시작한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은 바울의 마음을 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선교의 비전을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행전 19장 21절에 보면, 에베소에서 사역중에 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복음을 심고자하는 간절한 열망을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서 18개월간 함께 바울과 함께 생활하면서 바울을 통해 복음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짐작됩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내용과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 훈련이 자연스럽게 집에서, 일터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잘 훈련된 부부는 이후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가게 되고, 바울이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 떠난 이후에도 에베소에 남아서 사역을 계속하게 됩니다.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던 중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능통하여 구약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열심으로 변증하는 아볼로를 만나게 되고, 아볼로를 집으로 초대하여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쳐 줍니다.

부부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되었을 뿐 아니라 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말씀으로 권면하여 효과적이고 능력있는 사역자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돕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또 다른 제자를 배출한 것이지요.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후서에서 제자 디모데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제자 낳는 제자, 영적 승법 번식에 대한 권면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우리는 가르침을 받은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수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이 나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음 세대로 흘러가야 합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자신들이 받은 복음의 진리를 “충성된 사람”인 ‘아볼로’에게 전함으로 제자 낳는 제자로 살았습니다.

에베소에서 계속 사역하던 부부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중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의 후원자로 섬겼고, 폭동이 일어나 바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바울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인 로마서에서-당시 부부는 로마에 있었음-부부를 소개하기를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바울의 사역 후반부에 에베소로 돌아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집을 교회 처소로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복음 사역을 적극 후원합니다. 젊은 사역자 디모데가 에베소의 목회자로 파송되어 왔을 때 부부는 이전에 바울을 섬겼던 것처럼 디모데를 도와 에베소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에베소와 인근 지역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도록 헌신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입니다.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브리스길라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족과 재물과 신분을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부부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면서 재정적인 수입을 통해 복음 사역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전도자 바울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고린도에서, 에베소에서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신실한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처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삶의 리스크까지 담당했던 부부처럼 복음 사역의 후원자로 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 두번째는 제자낳는 제자의 삶입니다. 그들은 바울로 부터 듣고 배운 복음의 진리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아볼로가 나중에 고린도 교회에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쓰임받게 된 것은 부부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복음의 진리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생명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늘 함께 살펴볼 두 번째 인물은 아볼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배를 타고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더 오래 있기를 청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하고 서둘러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들러 선교 보고를 한 후 파송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것으로 약 3년에 걸친(A.D. 50-52) 2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바울이 수리아 지역으로 돌아가 있을 때 에베소에 아볼로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도착합니다.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 (He was a learned man, with a thorough knowledge of the Scriptures)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자신의 공적과 헬라문화의 우수성을 기념하기 위해 B.C.300년경에 신설한 대도시였습니다. 해상과 육로가 모두 열려있는 편리한 입지조건과 개방적인 분위기, 또 헬라 문화를 꽃피운 신도시였기 때문에, 당시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상인들과 지식인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고, 그 명성은 로마시대에까지 이어져,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아테네 못지않은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학문의 도시답게 박물관이나 도서관, 그 밖의 교육과 문화활동을 위한 시설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 도시 출신으로, 이러한 도시의 분위기에서 마음껏 학문에 정진해 탁월한 지식을 갖출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을 접하고 공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4절에 나와 있듯이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이로 볼 때, 아볼로는 당시 최고의 문화, 학문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 문법, 수사학, 천문학 등을 익힌, 거기다가 언변까지도 뛰어나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데 완벽한 자질을 갖춘 유능한 성경학자였던 것이다.

아볼로라는 이름은 ‘파괴자, 침략자, 웅변가’라는 뜻인데, 아마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탁월한 인물이었던것 같습니다.

25절. 아볼로는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with great fervor) 예수의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구약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예수)에 관한 것을 열심을 다해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쳤으나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요한 처럼 여전히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으며, 회심자들에게 물침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회개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아볼로는 오순절 날 베드로가 선포한 예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성령 침례)는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19장 에베소 제자들도 요한의 침례만 알 뿐 성령 침례 알지 못함)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탁월한 성경 학자인 아볼로를 집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볼로가 그 부부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능력있는 복음 전도자가 됩니다.

탁월한 성경 학자요 웅변가인 아볼로는 겸손하게 마음문을 열고 평범한 평신도 사역자 부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로 부터 제자 훈련을 잘 받은 브리스길라 부부는 젊은 전도자의 부족한 부분을 비난하지 않고 돕는 손길이 되어 진리의 복음을 전수해줍니다. 만약 아볼로가 지적인 교만에 사로잡혀 마음문을 열지 않았거나, 브리스길라 부부가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돕지 않았다면 나중에 바울에 비견할 만한 탁월한 한 명의 전도자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겸손한 마음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처럼, 마리아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로 말씀 앞에 설 때에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가운데 심기워질 줄 믿습니다. 그 말씀이 나의 연약한 부분을 고치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게 됩니다.

아볼로는 겸손히 말씀을 새겨 듣고 배워서 변화되었습니다. 27절에 보면 그가 아가야(고린도) 지역으로 건너가고자 할 때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추천서)를 써 그를 영접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에 가서 사역함으로많은 믿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었고, 성경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게 되었습니다.(28절)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서 얼마나 영향력있는 사역자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분파주의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4개의 당파가 존재하였는데 바울파, 게바파(베드로), 아볼로파, 그리스도파가 서로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사도였던 베드로와 바울과 비견될 정도로 신망이 두텁고 영향력있는 영적 지도자였음을 짐작케하는 구절입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볼로의 사역을 인정하고 칭찬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고전 3: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인 세 명의 인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볼로에 대해 살펴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교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모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들 부부가 아볼로라는 탁월한 성경학자를 진리의 말씀으로 바로 세웠던것처럼 제자 낳는 제자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아볼로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심령이 되어, 나의 연약한 부분이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지고 부족한 부분이 말씀으로 채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꾼으로 쓰임받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2-21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고린도 사역,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2/21/2021 주일 낮 예배
• 본문: 행 18:1-17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highlight 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에서의 선교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는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고, 3차 전도 여행 중에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 에베소에서 3년동안 거주하면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복음을 전한 것은 두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고린도가 어떤 도시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46년에 율리우스 시저가 재건하였습니다. 그곳이 전략적인 항구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는 좁은 지협에 있으면서 인근에 두 개의 항구 도시가 있었습니다. (겐그레이 & 레카이온) 두 항구를 통해서 동 서양의 물품들이 운송되었고, 육로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바쁘게 왕래하는 간선도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아덴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였습니다. 인구가 거의 65만명에 달했는데 자유 시민이 25만명 정도이고, 나머지 40만명은 노예들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고린도는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덴과 같은 대학 중심의 도시는 아니었지만, 헬라 철학과 지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는 온갖 종교가 범람하는 도시였습니다. 신전이 적어도 12개나 그곳에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신전들 중 하나는, 해발 600미터에 이르는 아크로코린트(Acrocorinth) 바위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비너스) 신전이었습니다. 이 여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종교적인 매음을 하였습니다. 매춘부들이 천명이나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신전은 아폴로에게 봉헌되었는데, 미소년들을 고용하여 참배하러 오는 남자와 여자들의 성적인 욕망을 채워주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그 도시는 부도덕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자유 분방한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는 바람에 ‘고린도같다’(Corinthianize)라는 헬라어 동사가 만들어졌는데, 그 의미는 ‘성적인 부정을 저지르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헬라 문화의 중심지 아덴을 떠나 홀로 도착한 곳은 번창한 상업도시이자 우상 숭배로 가득한 대도시 고린도였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대도시에 홀로 도착하였을 때 그의 심정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교만과 부도덕한 생활에 대해 익히 들었기 때문이라 짐작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귀한 동역자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굴라(Aquila)와 브리스길라(Priscilla, 브리스가, 롬 16:3)부부였습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소개할 때 “나의 동역자들”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롬 16:3-4)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바울에게 소중한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흑해 남쪽 해안인 본도 태생으로 이탈리아로 이주하였는데, 유대인들 모두 로마를 떠나라는 황제 글라우디오의 명령(A.D. 49)에 의해 로마를 떠나야만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오순절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에 의해 회심하여 신자가 되었고, 로마 교회 창립 멤버로 교회를 섬겼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들의 직업이 바울의 직업(tent-making)과 동일하여 함께 살며 일을 같이하게 되면서 더욱 가까와지게되었습니다.

바울은 주중에는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지 얼마 후 기다리던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 바울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믿음의 소문을 듣고 매우 기뻐했을것이며, 빌립보를 방문한 실라로 부터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헌금(빌 4:14)을 받고 더 이상 텐트 만드는 일을 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급히 아덴으로 홀로 떠나온 바울은 아덴에서 외롭게 혼자 사역하다가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기다리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로 부터 전해들은 교회의 성장에 대한 소식과, 환난과 궁핍한 상황 가운데서도 귀한 물질로 섬기는 성도들로 인해 그의 마음 가운데 얼마나 큰 기쁨과 감동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헌신되고 열정적인 전도자에게도 ‘두려움과 떨림’이 있고 ‘외로움’과 ‘고독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차가운 로마의 감옥에서 사랑하는 제자 누가와 함께 지내던 바울은 영적인 아들이요 사랑하는 제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는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deserted me)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딤후 4:10,11,13)

디모데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신당한 안타까운 마음, 차가운 냉기로 인해 추위에 떨며 고생하고 있는 바울의 처지를 잘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만나게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육신적으로 지쳐있고, 영적으로 외롭고 곤고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전도자 바울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외롭게 복음 전파에 전념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과 복음 전도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중보 기도와 물질로 힘이 되어 주고, 가족처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는 원어로 보면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was pressed in the spirit)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강권함을 받아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그는 더욱 담대히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또한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있을 때 나를 통해서 복음이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고백처럼 이 시대는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기 때문에 영적으로 기근 상태에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 8:3)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굶어 죽지 않고, 날마다 소생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고 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며 비방하자 바울은 1차 전도 여행때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날 때 그랬던것 처럼 -발에 티끌을 털어버림-옷을 털면서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을 향해 “너희 피가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6)고 말하고 그곳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디도 유스도(Titus Justus)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이름으로 보아서 그는 로마 시민으로 추측되는데 아마도 그는 B.C. 46년 로마의 황제 시저가 고린도를 재건할 때 그곳에 정착했던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난 듯합니다. 혹자는 디도 유스도의 다른 이름이 가이오(Gaius)라고 주장합니다. 그럴 경우 그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를 돌보는(롬 16:23)사람이었으며, 고린도 전도 초기에 바울에게 직접 침례를 받은 극소수 회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고전 1:14) 아무튼 디도 유스도는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집을 고린도 전도 사역의 본부로 제공하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집이 회당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회당에서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디도 유스도 외에 또 다른 전도의 열매는 회당장 그리스보(Crispus)였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평신도로서 건물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등 행정적인 일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최초의 신자(스데바나와 그의 가족, 고전 16:15)은 아니었지만 그의 회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8절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고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바울은 고전 1:14-16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침례를 베푼 몇몇 사람을 언급하는 중에 그리스보를 첫번째로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보가 고린도에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영향력있는) 신자였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그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리는” 상태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동역자들과의 만남과 멀리 떨어져 있던 제자들의 합류로 인해 바울은 큰 힘을 얻었고 복음 전파에 전념한 결과 많은 생명의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고린도에서 바울이 1년 6개월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9절, 10절 말씀을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번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강열한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핍박자 사울을 거꾸러 뜨리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행 22:17) 마지막으로 3차 전도 여행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공회 앞에서 증언하던 날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 23:11)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주님은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음성은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우상이 가득한 도시 고린도에서 사역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주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전해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1)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2)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3)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1,2차 전도 여행 중에 바울은 많은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고,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갖히기도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야손과 형제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무리들에 의해 큰 해를 당할 뻔 하였습니다. 급히 피한 베뢰아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 쫓아 온 유대인들로 인해 다시 아덴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앞으로 어떤 해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 바울에게도 왜 염려가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침묵하지 말고 담대히 말하라 (복음을 전하라)고 도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부활의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 이후 18개월 동안 바울은 큰 어려움 없이 고린도와 인근 아가야 지역에 편만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 두려움과 염려, 근심 가운데 처한 분이 계십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어떤 환경도 사망의 권세조차도 너를 해롭게 하며 흔들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을 누려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할 수 없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 121편에서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5-8, ‘지킨다’ 동사 6회 반복)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파수꾼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므로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되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I have my people in this city)”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므로 너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라는 선교의 동기 부여가 되는 말씀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에 기록한 말씀과 동일하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 영생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전도자의 책임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이며, 구원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거두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고린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신실한 성도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이전에 언급한 로마인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 외에 뵈뵈(롬 16:1), 더디오(롬 16:22), 에라스도(롬 16:23), 구아도(롬 16:23), 글로에(고전 1:11), 가이오(고전 1:14), 스데바나와 그의 집(고전 16:15), 브드나도(고전 16:17), 아가이고(고전 16:17)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린도 교회의 창립 멤버들이었고 교회를 섬기는 신실한 일꾼들이었습니다. 바울은 18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교회를 든든히 세웠고, 말씀으로 제자를 양육했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두 통의 편지(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써 보내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풍요롭고 사치스러운 도시, 하지만 영적으로는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담대히 증거한 바울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두가지 이유였습니다.

첫번째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동역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제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합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밤에 환상 가운데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을 것이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신실한 동역자로서 서로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들려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인해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평안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2-14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본문: 사도행전 17:16-34
02/14/2021 주일 낮 설교

사도 행전에는 많은 20여개의 설교문과 연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한 설교와 연설, 변증은 11개 가량 되는데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전도 설교는 사도 행전의 다른 설교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덴(아테네)에 거주하는 헬라인들, 신화와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증거한 복음 설교라는 점에서 다른 설교와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로 부터 쫓아 온 유대인들로 부터 핍박을 받아 급히 몇몇 형제들의 도움으로 급히 배를 타고 그리스 반도 남쪽에 위치한 아덴(아테네)으로 피하게 됩니다.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함께 사역하고 있었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두고 혼자 아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덴이 어떤 도시인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아덴은 B.C 5세기경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과 같은 철학의 대가를 배출한 곳으로, 당시에도 정치적인 권력은 잃었지만, 철학, 문화, 예술 등 헬라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소와 더불어 세게 3대 대학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아덴은 수많은 신전들, 사당들, 신상들, 제단들로 가득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거대한 금과 상아로 된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상의 번쩍이는 창 끝은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 다른 곳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의 상들, 주피터, 비너스, 머큐리, 바카스의 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17:16) ‘격분하다’(paroxyno)는 졸도나 간질 발작(paroxysm)에 쓰이는 의학 용어로서 ‘노하게 하다, 성나가 하다, 화를 돋구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속이 뒤집어 진’것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아덴 시내를 거닐다가 온갖 우상으로 뒤덮힌 도시를 본 후에 그의 마음속에 의로운 분노가 치밀러 올랐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의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는 동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북왕국이 사마리아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또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습니다.’ 즉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 대해 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울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영광과 찬송을 우상들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 바울은 속이 끓어 올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상 숭배자들에 대해 이러한 마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피조물에 불과한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고, 사람이 만든 조각상이나 신화에 나오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이 가졌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바라 보면서, 황금 만능주의와 뉴에이지 사상, 포스트 모던니즘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바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을 떠난 이 시대와 세상에 대하여 ‘의로운 분노’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가졌던 마음의 고통과 안타까움이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먼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터(marketplace)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며(reasoned)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하며(disputed) 복음을 전하였고, 지식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

오늘 설교는 바로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다가 그들에 의해 붙잡혀서 아레오바고라는 곳에 가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 설교입니다. (뉴욕 맨하튼 리디머 교회, 팀 켈러 목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강가에서, 감옥에서, 장터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피쿠루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당시 대표적인 두 철학 체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에피쿠로스(Epicurus, 주전 341-270년)의 후학들이 세운 학파로서 삶의 주된 목적이 쾌락과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행복은 순간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만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지만, 바울 시대 무렵 좀 더 감각적인 사상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유물론자들이나 쾌락주의자들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 주전 320-263년)의 후계자들로서 사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고 자신의 자족과 자립을 깨닫고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전성기에는 몇가지 훌륭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바울 시대에는 거만한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다!”) 이런 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오늘날 뉴에이지 추종자들이나 범신론자들과 일맥 상통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서서 복음을 전한 아레오바고는 문자적으로는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아레스는 전쟁의 신(로마, Mars)입니다. 이후 아레고바고는 법정이나 회의가 열리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가 도시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아레고바고 회의는 종교와 도덕 분야에서만 권위를 행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의 법정, 의회와 같은 곳에서 그것에 모인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보기 전에 전도 대상자들인 아테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몇가지 기록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가득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하자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new teaching)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17:19)라고 하며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갑니다. 21절에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the latest ideas)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복음 설교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22-31)
바울의 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23절은 서론,24-29절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 존재됨에 대해서, 30-31절은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론 (22-23)
서론에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일컬어 “너희를 보니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칭찬과 경멸의 내용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종교적이고 헌신적인’라는 의미도 있고, 부정적으로는 ‘귀신을 두려워하는, 미신적인’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아덴을 다니며 발견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에 대해 언급합니다. 아덴 사람들은 축복을 놓치거나 심판을 당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서까지 우상을 만들어 세워 두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아테네 인근에서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비문이 적힌 제단들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전도 설교의 서론을 마무리합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함 (24-29)
바울은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합니다.(존 스토트 목사, 사도행전 강해 참조)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 계시->특별 계시)

  1.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천지의 주재(author)이시다. 인격적 창조주(<->스토아 학파, 범신론)이시며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의 인격적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그 분이 피조물인 인간들이 만든 신전에 살고 계신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2. 하나님은 생명을 유지하는 분이시다. (25)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생명을 공급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한다.
  3.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26)
    인류는 한 조상(혈통)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온 땅에 거하게 하시며, 민족들의 흥망성쇠의 정확한 때(카이로스)를 계획하셨으며, 각 나라가 차지할 일정한 지역을 정하셨다. 즉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설계자시다. (<->에피쿠로스 학파, 만사가 우연에 의해 좌우)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
  4.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동력이며 존재 이유이시다. (28)
    28-29절은 당시 유명한 두 명의 시인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이것은 그레데 시인 에피메니데스(주전 600년경)의 ‘크레티카’에서 인용한 것.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의 목적 발견할 수 없다.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5.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시다. (29)
    ‘우리가 그의 소생(자손)이라’ 이것은 시칠리아 시인 아라투스(주전 315-240년)의 ‘매노메나’와 클레안테스(주전 331-233년)의 ‘제우스 찬양’에서 인용한 것. 구속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아버지이시지만, 창조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으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자손)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이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다”(29)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형상이나 조각품으로 대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 (30-31)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영적 무지(‘알지 못하는 신’ 경배)에 대해서 폭로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증거한 이후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하나님이 알지 못하였다거나 그들의 변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관대한 자비로서 그들이 받아 마땅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이어서 설명하기를 “이는 정하신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부활)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셔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심을 믿고,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이 진리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한 증거’가 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종교심은 많으나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아테네 지식인들에게 만물을 창조하시고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지식인들의 관심사와 익히 잘 아는 문학 작품등을 인용하여 복음의 진리를 이끌어 내고 있으며, 사변적인 지식으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아테네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였습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영혼 불멸은 인정했지만, 죽은 몸의 부활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아직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믿지는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들어보고 나중에 판단하겠다는 말이지요.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을 시간은 항상 ‘바로 지금’입니다. 미루면 구원받을 기회는 지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몇사람이 바울을 ‘가까이 하여’(‘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에 달라붙다/연합하다’) 믿었는데, 그 사람들의 이름은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라는 여인이었고, 무명의 몇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 전도의 열매는 많지는 않았지만, 이방 세계에 큰 도전을 주는 사건이었고,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은 무엇입니까?

첫번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영혼들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기진한 영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세상에 대한 탐욕을 보고 우리 마음 속에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열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두번째는 복음을 전할 때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로 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바울이 헬라 철학과 문학과 예술에 심취한 아덴의 지식인들에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하고, 문학 작품을 인용하여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였던 것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수 있는 소재와 환경을 이용하여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도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 모두 복음 전도 설교의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됨을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듣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믿는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2-07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베뢰아 성도들의 신앙”
행 17:10-15
2/7/2021 주일 낮 예배

지난 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의 복음 전파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관례대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몇 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예수가 그리스도(구원자)되심을 증거할 때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성을 소동하게 하고 야손의 집에 쳐들어가 야손과 형제들을 끌어내어, 그 도시 통치자들인 읍장에게 고발합니다.

빌립보에서도 매맞고 감옥에 갖히는 핍박을 당한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형제들의 도움으로 급히 베뢰아로 피하게 됩니다.

핍박 가운데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데살로니가의 사역은 그 이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위 모든 교회와 믿는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살전 1:7-8)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살전 1:9-10) 그리고 그들은 유대에 있는 형제들이 동족 유대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은것처럼 그들도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지만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살전 2:14)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지였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뢰아에서 오랜 시간 머문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핍박 가운데서 뿌린 눈물과 헌신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듣고 믿게 된 소수의 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본이되는 아름다운 초대 교회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와 물질과 시간을 드려 섬길 때, 금방 열매가 보이지 않고 큰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뿌려지고 심겨진 복음의 씨앗은 언젠가-하나님의 때에-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갈 6:9)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선을 행하고 헌신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뢰아 선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저가 대학교 다닐 때 학교 내에 ‘베뢰아 선교회’라는 Club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베뢰아 선교회는 ‘귀신론’으로 알려진 김기동 목사(성락 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정통 교단으로부터 사이비/이단으로 판단된 단체입니다. 그래서인지 베뢰아라는 말을 들으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타 지역에 있는 사람들보다 훌륭한 인격과 본이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베뢰아 성도들의 인격과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피해 형제들의 도움으로 남서쪽 80Km에 위치한 작은 도시 베뢰아로 내려온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11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 비해서 베뢰아 사람들은 더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너그러운’이라는 단어는 개역 성경에서는 ‘신사적이어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유게네스트로이’인데, 의미는 ‘고결하다, 기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NIV에는 ‘noble character’(고상한 인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편견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대도시 사람이어서 그런지 성격이 급하고 사나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시기하여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바울 일행을 붙잡아 쫓아 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성격이 온순하고 젊잖은 성품을 가졌던것 같습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은 교양이 있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고, 말과 행동이 올바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과거의 옛사람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의 옷을 입게 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믿고 나서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 육신에 속한 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고, 미움과 다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서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인격은 예수님 믿기 이전의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호소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인격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시기와 분쟁, 분열과 다툼입니다. 사람을 자랑하는 것, 교만한 마음, 편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고상한 인격’ ‘성숙한 인품’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존중의 마음, 다른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급히 말하고 판단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온유함으로 품는 마음, 편견을 버리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 이러한 고상한 인격을 개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베뢰아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11절.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여기서 “간절한”이라 번역된 헬라어 ‘프로디미아스’는 직역하면 ‘준비되어 있다’ ‘선입견없이 경청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열려 있었고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 13장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good soil) ‘옥토’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열매맺는 땅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마음에 새기고 지키어 열매맺는 ‘옥토’입니다. 동일한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덮힌 땅’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길가 밭은 사단이 와서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 가고, 돌밭은 마음이 굳어 있어 씨앗이 마음 속으로 심겨들어가지 못하고,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씨앗이 심겨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말’로 받는 성도에게는 강단에서 전해지는 메세지가 마음속에 아멘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영적 성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할 줄 믿습니다.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하나님 말씀을 듣는 성도 중에서 발견하는 좋지 못한 3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비판적인 자세: 사람의 말로 받기 때문에 설교자의 어투, 제스처, 예화, 본문 해석, 설교 시간의 길고 짧음.. 이 모든 것들이 비판거리가 됩니다.
비교하는 자세: 다른 설교자의 설교와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장점을 보기보다 단점을 찾아냅니다.
비몽사몽^^: 마음문을 닫고 설교를 듣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베뢰아 성도들 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마음밭에 심기어 집니다.

그러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예배를 위해서, 강단에서 선포되어 지는 말씀을 위해서, 설교자를 위해서 주중에, 예배 시작전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 마음 속에 간절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설교자의 입술을 다스려 주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질때 성령께서 친히 그 뜻을 풀어주셔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루디아의 마음을 주께서 열어 주셔서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것(행 16:14)처럼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편견을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면 마음문이 닫히게 되어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할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전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말씀,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으로 기대하고 들을 때 깨달음이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듣는것에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적용하여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베뢰아 성도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1절.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상고하다’(examine)는 헬라어로 ‘아나크리노’인데요 ‘자세히 조사하다’ ‘찾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법적인 조사에 사용되는 법률 용어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할 때, 의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벨릭스가 바울을 심문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진실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검증한다는 의미입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의 깊게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였다는 뜻입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듣고 그들은 집에 가서 구약 성경을 펼쳐 놓고 사도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을 것입니다.

진실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성경 구절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구절인지를 깊이 상고하였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성경으로서 진리를 찾기에 애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편에 기록된 것처럼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머리에 새겨진 말씀을 꺼내어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기뻐하는 행동입니다.

베뢰아 성도들처럼 우리도 진리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그러한지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며, 깊이있게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수동적으로 말씀을 듣는데에 머물지 말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말씀을 연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성경을 효과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을까요? 간단하면서도 적용 가능한 제안을 드립니다.

주일 낮 예배 뿐 아니라 성경을 주제별로, 권별로 배우고 묵상하는 주일 오후 예배나 수요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예배때 마다 깨닫는 말씀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묵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들은 표시해 두었다가 다시 읽고 공부하거나 목회자에게 질문하여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해설 성경(단권 주석, Study Bible)을 구입하여 성서학자들의 해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목회자에게 자료를 추천받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베뢰한 사람들의 인격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세는 영혼 구원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12절.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유대인들 뿐 아니라 헬라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진지함 뿐만 아니라 복음 사역에 헌신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3-15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베뢰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와서 무리를 움직여 그 지역을 소동하게 하자, 14절 “형제들이 곧 바울을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베뢰아 성도들이 바울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아덴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항구로 데리고 갔을 뿐 아니라, 15절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아덴까지 동행합니다.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그 믿음의 형제들은 바울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바울의 ‘명령’을 받고 실라와 디모데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시 베뢰아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뢰아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받았습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뢰아 성도들은 받은 말씀을 묵상하며 ‘날마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저와 웨인즈빌 침례 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베뢰아 성도들처럼 ‘고상한 인격’을 소유하며,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진지한 연구 자세를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1-31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 본문: 행 17:1-9
1/31/2021 주일 낮 예배

사도행전에 초대 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여러개 있습니다. 제자, 증인, 신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붙여진 호칭,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7:6 에 보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천하를 소동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1차 전도 여행 중에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냅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복음 전파를 시기하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달려들어 루스드라로 급히 피하게 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 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준 사건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환생한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여겨 그들에게 제사할려고 하자, 급히 그들을 말리며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인해 바울은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됩니다.

2차 전도 여행중 빌립보에서도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좇아낸 일로 인해 그 여종의 주인들이 자신들의 수익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장터 관리들 앞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16:20)고 고발합니다.

빌립보에서 있었던 더 놀라운 사건은 감옥에 갖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찬송하고 기도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죄수들의 매인이 것이 벗어지게 된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감옥의 간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가는 곳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소동들이 일어난것은 그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마음문을 열고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요 ‘구원의 능력’이 되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훼방거리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했습니다.

먼저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한 데살로니가 도시에 대해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남서쪽으로 약 53Km 떨어진 암비볼리로 갔습니다. 암비볼리는 B.C. 167-146년에 마게도냐 북부 지방의 수도이기도 했던 도시로서 빌립보 지방보다 더 큰 정치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그곳을 거쳐 계속 남서쪽으로 진행하여 암비볼리에서 약 43Km지점에 있던 아볼로니아를 지나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던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주전315년에 카샌더(Cassander)왕이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요 자신의 아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인데 로마가 데살로니가를 주전146년에 자치적 영토로 만들었을 때 수도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명의 큰 도시로 마게도냐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160Km나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는 유럽에서 빌립보에 이어 두번째로 교회가 세워진 지역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은 그들을 대적하던 자들로 부터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는 호칭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통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을 찾아가 세 안식일(3주)동안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reasoned with them from the Scriptures, 논증하고), 뜻을 풀어(explained), 증언(proved, 증명)하였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강론하고, 뜻을 풀고, 증언하였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고난), 죽은 자 가운데서(십자가에서 죽으심) 다시 살아나야 할것(부활), 그리고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구원자, 메시야)라고 전파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마찬 가지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메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 구원자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17장 하반부와 18장 전반부에 기록된 아덴과 고린도 지역에서 전도 사역중에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증거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행 26장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의 변화를 간증할 때에 자신의 복음 전도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3)

단순한 생명의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분이 세상의 구주되심, 이것이 전부요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revealed,계시되어), 믿음으로 믿음에(from first to last,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복음,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하 인용문) 1904년에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은 20세기 전 세계에 부흥운동의 문을 여는 부흥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이 부흥의 불길은 유럽뿐 아니라 1905년에는 웨일즈 선교사들이 많이 나가있던 인도와 호주와 아프리카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1906년에는 미국의 아주사 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 현장을 다녀온 미국목사 존스톤의 도전으로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평양 대 부흥운동은 중국 만주의 부흥으로 이어진다.

웨일즈는 과거 여러 차례 부흥을 경험했던 곳이었지만 웨일즈 대 부흥 직전 웨일즈의 상황은 비참했다. 자유주의 신학, 다윈의 진화론, 성경의 고등비평이 신학교에 깊이 침투하자 성경에 대한 권위의 상실로 교회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교회에 등을 돌리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현재 웨일즈에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한 부흥이다” “강력한 성령의 임재만이 유일한 치유책이다”라고 말하면서 부흥을 사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 1903년에 웨일즈에서 케직 사경회가 열려 목회자들 사이에서 각성이 일어났다. 참가한 목사님들이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2, 1903년에 4명의 웨일즈 청년들이 부흥을 사모하여 6개월동안 매일 밤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합류했고 기도의 열기가 강하게 타올라 성령의 임재로 영적 자도자들과 잠자는 영혼들을 깨웠다.
3, 1904년에 26세의 젊은 신학생 이반 로버츠가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쓰임받기 시작한다. 그는 12살 때부터 탄광에서 일하면서 몇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에 전념했는데 부흥이 일어나기 12년 전부터 웨일즈의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친구들과 부흥에 관해 나누었다. 1904년 봄에 비상한 영적 체험을 했는데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 4시간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체험을 했고, 3-4개월 동안 매일 새벽에 이런 기도체험이 계속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웨일즈와 세계 여러 나라에 역사하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웨일즈 남서부에 있는 뉴캐슬 엠린에 소재한 예비 신학교로 들어간다. 그 근처에서 Seth Joshua 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나를 굴복 시켜 주소서, 나를 굴복 시켜 주소서! ” 부르짖다가 13년간 기도하며 사모하던 성령충만을 체험한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웨일즈 전역을 다니면서 구세주에 대해 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찼다. 이때 성령께서 어찌나 강하게 임하셨든지 그는 하나님께 이제 그만 손을 거두시라고 간청해야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로버츠는 이 경험 후에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로버츠는 여러 차례 환상을 보는 가운데 그는 활활 타고 있는 지옥불의 모습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무수한 영혼들이 지옥 불을 향해 달려오는 환상을 보았다. 또 세계를 뻗어있는 팔과 그의 손에 100,000의 숫자가 기록된 종이를 보기도 했다. 로버츠는 10만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하며 10만명을 구원하는 꿈을 친구들과 나누었다. 10월이 되면서 그는 고향의 모교회인 모라아교회의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점점 불타올랐다. 그는 신학교 교장에게 고향에 돌아가 1주일간 집회하고 돌아오겠다고 허락을 받고 고향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부터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나 회중들이 눈물바다를 이루며 가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대부분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예수 이름으로 이제 성령을 보내주소서”, “더욱 강하게 임하소서”이었고 , 성령을 보내달라는 기도가 그의 집회의 특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부어주소서, 강하게 부어주소서, 더욱 강하게 부어주소서” 라고 그들은 기도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부흥이 그를 따라 다녔다. 악명 높은 죄인들, 술주정군들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절하듯 땅에 쓰러졌고 원수들이 화해했다.

11월에는 이반 로버츠와 성령께 사로잡힌 몇몇 사역자들을 통해 부흥의 불길이 전 웨일즈로 번지면서 이반 로버츠는 웨일즈의 요한 웨슬리로 불리웠다.

가장 기억에 남을 일들이 남 웨일즈에 있는 탄광마을들에서 일어났다. 부흥의 물결이 탄광 지역에 몰아칠 때 지하 63m 떨어진 갱도에서 80명의 광부들이 마태복음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아멘을 외쳤다. 광부들 사이에 많은 기도회가 열렸고, 광부들의 노동이 질적으로 개선되었다. 낭비벽이 줄어들었고, 술과 개으름과 도박이 줄어들었으며 말을 부릴때 욕설과 발길질이 없어졌다. 로버츠가 분명히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조직하고 지배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성령님께 순종했다. 부흥운동이 전 웨일즈로 번지면서 1년 동안 10만명이 주님께로 인도 되었다. (강순영, 웨일즈 부흥)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개인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할 때 경건한 헬라인(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함을 시기하여 시장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성을 소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야손(Jason)이라는 사람의 집에 침입하여 바울 일행을 찾아 끌어내려고 합니다. 아마도 야손의 집에 바울 일행이 머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야손과 및 형제들(성도들)을 끌고(dragged)읍장들(헬. 폴리타르크. 문자적으로는 도시 통치자, 5명으로 구성된 자치 단체에 속한 행정 장관들)앞에 가서 소리 지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손이라는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손은 ‘치료하는 자’ ‘돌보아 주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인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이외에도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의 동역자가 된 사람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20:4)도 있습니다.

야손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하는 동안 자신의 집을 그들의 거처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것은 가족들과 사회 공동체로 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 위험하고 담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문화 속에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야손은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로 부터 받는 따가운 시선도 견디어 내었습니다.

핍박을 두려워했다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였기에, 그는 기꺼이 바울 일행을 위해 자신의 거처를 제공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설립과 확장의 기록인 사도 행전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지식으로 예수님을 믿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유럽 선교의 첫 열매였던 루디아도 예수님을 믿은 후 온 집안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도록 했고 모두가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바울 일행의 쉼터로, 빌립보 지역 성도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극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이후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온 몸의 상처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침례를 받은 후 그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온 집안이 기뻐하였습니다.

야손은 바울 일행을 맞이하였다는 것으로 인해 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손의 집에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한 불량배들에 의해 끌려 읍장들 앞에 던져지게 됩니다. 하지만 신중한 읍장들 판단으로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됩니다.

누가 천하를 어지럽게 할 만큼 영향력있는 사람들입니까? 바로 야손처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며, 복음의 지경은 넓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신의 복음 사역에 헌신하고 동역한 동역자들 서른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야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리라”(롬 16:21)

야손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변화되고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닷물에 3.5% 소금으로 인해 짠 맛이 나는 것처럼,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 마다 세상이 요동하며 세상은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고후 2-3장)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며(고후 2:14),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알고 읽게(고후 3:2)됩니다.

사도 행전 24장에는 벨릭스 총독에게 고발당한 바울을 일컬어 변호사 더둘로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24:5)고 하였습니다. 악성 바이러스가 소리 소문없이 급속하게 퍼져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것처럼, 바울은 복음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더둘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성 종양과도 같은 존재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바이러스, 구원의 바이러스라는 말이기도합니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복음이 전해진지 140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전 국민의 ¼ 이상이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이, 복음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미미해 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많아지고 크리스찬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믿는 자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서른 세명의 사람들을 일컬어 ‘민족 대표 33인’이라 부릅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들이 16명이나 되었습니다. (천도교 15, 불교 2)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지만,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컸음을 짐작케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야손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부패해가는 이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들 앞에 끌고 와서 고발한 내용은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였습니다.

신성 모독죄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죄였다면, 로마인들이 신으로 받드는 황제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을 섬긴다는 것, 즉 반역죄는 로마인들에게 가장 악한 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씌운 죄명은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고 로마 황제에 대항한다는 반역죄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가이사는 우리의 주(퀴리오스)이시다’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고, 불에 타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 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술로 고백할 뿐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으로 천하를 소동케하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담대히 고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복음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 위해 희생하고 섬김으로 천하를 소동케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입술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삶속에서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1-24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고난과 기적”
•본문: 사도행전 16:20-40
1/24/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빌립보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사건 중에 마지막 사건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지난 주에 나누었던 두 번째 사건, 즉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게 되는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19절을 보시면, 점을 잘 쳐서 자신들에게 많은 수익을 가져다 주던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게 되자 여종의 주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사업이 망하게 되었고 ‘수익의 소망’을 잃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가 난 그들은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 낸 장본인들인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관리들의 손을 빌어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0절에 기록된 ‘상관들’ 은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빌립보 도시의 행정과 사법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두 명의 치안 판사 혹은 집정관을 말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그들에게 고발한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유대인들인 이 사람들이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20)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1)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점쟁이 비지니스가 망하게 됨-였는데, 다른 이유를 둘러대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반 유대주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유대인들이 로마 식민지인 이곳에 와서 도시를 혼란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안정을 중요한 통치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심각한 죄목에 해당된다고 생각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이방 풍속(불법 종교)을 전한다고 고소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이방 종교의 포교를 금하는 로마법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 보면 ‘보통 관례상 전파하는 종교가 법률과 로마 생활의 관례를 범하지 않는 한, 즉 그가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범죄에 연루되지 않는 한 그것을 시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인들은 영리하게도 자신들의 원래의 이유를 숨기고 다른 이유들을 내세워서 지방 공무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두 명의 치안 판사들은 바울과 실라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람들을 시켜 ‘불순 분자’ 유대인 두 명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옷이 벗겨지는 수치를 당했고, 매로 맞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유대인들로 부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로마 당국자들로부터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고 (루스드라에서 이방인들에 의해) 한 번 돌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빌립보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강가 기도처에서 준비된 영혼인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고,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여심으로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되었고 그 뿐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유명한 점쟁이였던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로마 식민지 빌립보에서 복음이 거침없이 증거되나 싶었는데, 바울 일행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상관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그들을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는데, 그들이 갇힌 감옥은 그곳에 있는 감옥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감옥’이었고 그들의 발에는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차꼬는 두 개의 긴 나무토막에 구멍 두개를 뚫고 거기에 두 발목을 고정시켜 쇠로 된 자물쇠로 채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꼬를 죄수들의 발목에 하나 채우고, 다른 하나는 손목에 채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중범죄자들도 아닌데도 중죄인들에게 채우는 차꼬를 채우고 사람들이 문 입구를 지키고 이었습니다.

아마도 등에서는 매로 맞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렸을 것이고, 온 몸은 멍이들고, 매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든 형편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헌신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따뜻한 환영은 커녕 수 많은 매질과 깊은 감옥에 갇힘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면 보통 우리는 낙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신음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따질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희들에게 이러한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주님께 순종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이곳까지 왔는데 왜 저희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왜 이런 고난을 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밤중에 깊은 감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두 명의 전도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낙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아마 이런 찬양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지키리로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얼마나 크게 찬송하고 기도하였던지 그 감옥에 있던 다른 죄수들도 다 들었다(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것이 더 벗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찬송과 기도는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큰 지진으로 인해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기적은 바울과 실라안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때에 그들안에 있던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는 다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예기치 않은 큰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면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사업이 갑자기 망하거나 믿었던 사람으로 부터 사기를 당하면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시련은 우리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고 때로는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하기도합니다.

갈릴리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났을 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힘들때 자주 하는 말이 ‘아이고 죽겠네’이죠. 제자들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주님 어찌 천하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십니까?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이고 죽겠네’라고 하지 말고 ‘모든 문제의 해답은 주께 있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문제만 바라보고 있으면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았는데, 그들이 놓친 것은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서 차꼬에 차여 있으면서 환경을 탓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감사하면 감사할 조건이 생긴다”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찬송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찬송하면 기쁨의 노래가 솟아납니다”

찬송과 기도는 연약한 우리들안에 자리잡고 있는 불신앙과 염려, 근심, 원망의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또한 영적인 무기력증으로 인해 약해지는 우리 심령에 찬송과 기도가 더욱 절실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찬송과 기도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케합니다.

역대기하 20장에 보면 유다 여호사밧 왕이 통치하던 때에 모압과 암몬, 마온 족속이 유다를 공격해 오게 됩니다. 강력한 군대로 무장한 연합군을 맞서 싸워 전쟁에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직감한 여호사밧은 “두려워하며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였습니다”(대하 20:3) 백성들에게 금식 기도를 선포한 이후 자신도 여호와의 전 뜰 앞에 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며, 열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대하 20:17)

이에 여호사밧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들에 외칩니다.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20)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20:22) 적군들끼로 서로 죽이는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그들이 전멸합니다.

여호사밧도 인간인지라 강력한 적군이 쳐들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염려와 근심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성가대의 찬송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야고보 기자도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6)
너희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5:14-15) 성도님들 중에 질병이 있으신 분들, 수술하게 되신 분들은 기도를 요청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부탁은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요 부끄러워 숨길것도 아닙니다. 당당히 기도 요청을 하시기를 바라고 온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적은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것이 벗어졌을 때 죄수들 중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27절에 보면, 감옥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간수는 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로 생각하고 칼을 빼어 목숨을 끊을려고 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가 탈옥하면 그를 지키던 간수가 그 죄수의 형량만큼 형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간수는 책임감이 투철한 로마의 퇴역 군인 출신이어서 자결함으로써 수치와 고통을 덜고자 했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할때에 캄캄한 곳에서 들리는 음성에 그는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질문합니다.

선생들이여(헬. 퀴리오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

이 질문은 인간이 던져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영벌로부터의 구원은 누구로부터 얻는 것입니까? 인간이 찾아야할 길과 진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삶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로마인 간수는 두려워 떨며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그가 평생토록 가지고 살았던 질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였고, 퇴역한 이후 감옥의 간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 하루 그냥 성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감옥터를 뒤흔들었던 큰 지진은 그의 영혼을 송두리채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가난해졌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휘어감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간수는 “어떻게 하여야”(행위)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였는데, 전도자의 대답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구원 받는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내가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전도자들은 간수에게 뿐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 날 밤 온 가족이 믿고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의 터가 움직이고 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것이 풀어지고, 그 와중에 죄수들이 한 명도 도망가지 않은 것도 놀라운 기적인데 더 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진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된 것 또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어릴 때 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된 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게 된 것도 아니요 나의 의지로 예수님을 믿게 된것도 아닙니다. 죄악 가운데 거하며 죄로 인한 형벌로 영벌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세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발을 당하여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과 핍박은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불행한 일, 고통스러운 일, 시련과 환난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으로서 부터 선을 만들어 내기도 하시며, 시련으로부터 정금같은 믿음을 만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짐을 통해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시며, 환난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유럽 선교가 시작되었던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한 구원의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그의 온 집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귀신들린 여종도 고침을 받게 되었고, 감옥의 간수와 온 집이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빌립보 교회의 창립 멤버로 신실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맞고 차꼬에 차여 깊은 감옥에 갖히게 되었으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처럼,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늘 찬송하며 기도함으로 우리 인생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는 큰 지진을 가져와 옥의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것이 풀어지게 된것처럼,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세상 근심과 염려, 원망과 불평의 쇠사슬이 풀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는 삶을 통해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1-17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끊어진 소망, 붙잡을 소망”
• 본문: 행 16:16-19
1/17/2021 주일 낮 예배

오늘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세 가지 사건중에 두번째 사건에 대한 내용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에는 유럽의 선교가 시작되는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가 회심하게 되고 그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는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루디아는 유럽 선교의 첫 열매로서, 빌립보 교회 설립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강권함으로 그의 집에 며칠간 머문 이후 바울 일행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도 바울 일행이 “기도할 곳을 찾아” 문 밖 강가에 나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한 루디아을 만나게 된 것처럼, 두번째 사건 또한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고자 결심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베푸십니까? 역대하 16:9 말씀에 기록한 대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신다는 약속입니다.

또 잠언 8:17에 기록하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한 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사랑을 입으며,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일행이 만난 그 귀신들린 여종은 점치는 일(fortune-telling)일을 통해서 주인들에게 “큰 이익”(돈벌이)을 주는 노예였습니다. 그 여종은 ‘퓌톤의 영’을 가진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퓌톤은 고린도 만 북쪽 파르나소스 산 기슭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과 신탁을 지키는 신화상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킵니다. 후에 ‘퓌톤’이란 말은 귀신들린 사람, 특히 점치는 사람이나 복화술로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점치는 일들, 한국에서는 철학관, 굿하는 집, 점보는 집, 사주팔자, 타로등으로 불리는 업종이 성행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Psychic reading, fortune-telling이라고 붙여놓은 shop들을 많이 보게됩니다. 미래의 운명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더욱 풍요로와지고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정신세계는 더욱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인생의 무목적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은 아마도 신통방통^^한 점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미래의 운명을 알려주고, 가문이나 사업의 정보, 중요한 일에 대해 조언등을 해주어서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무속인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은 여러 주인들에게 소유된 노예여서 점치는 일을 통해서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주인들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 여종은 용한 점쟁이였기 때문에 고객들이 줄을 섰을 것이고, 점쟁이 비지니스로 인한 수익은 상당하였을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점으로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earned a great deal of money)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종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려있어 자신의 정체성은 잃어 버렸고, 그리고 그의 인생은 주인들의 돈벌이 수단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여종은 악한 영에게 매여 있었고, 그리고 사악한 주인들의 탐욕의 쇠사슬에 매여있었습니다.

마치 ‘앵벌이’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부모 없이 집 나온 아이들에게 접근하여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 뒤, 그들을 하수인처럼 이용하여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적선을 하게 하거나 생활용품등을 팔게 하고 그 수익을 갈취하는 ‘나쁜 어른들’로 인해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그 일행들을 따라와 소리 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17) 귀신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잘 압니다. 누가복음 4장과 8장에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눅 4:34),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눅 8:28)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종도 바울 일행을 보고 그들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그들을 일컫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였고,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빌립보 사람들)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언듯듣기에는 전도자들을 환영하는 말같기도 하고, 복음 전파를 지지하는 말같기도 하지만, 귀신들린 여종의 말은 바울 일행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여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을 마술과 연관시킴으로서 복음의 능력을 훼손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유일한 구원이 아닌, 그 여종의 신적인 능력에 의한 구원(건강, 평안)으로 곡해시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훼방하기 위해 바울 일행을 따라 다니며 소리 지르며 괴롭혔습니다. 여러날 이러한 행동이 계속되자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피곤할 만큼 신경이 쓰이고 화가 나다”는 의미) 돌이켜 그 귀신에게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그 여종에게서 즉시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베드로도 평생 성전 미문에 앉아 적선에 의지하여 살던 앉은뱅이를 보고 외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이름의 권세로 모든 악한 영을 내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대적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게 되자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지게”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 주는 여종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이 떠나가게 되자 그 여종은 더 이상 돈벌이 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인들의 사악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그 주인들의 악함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귀신들린 여종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시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그를 하나님(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임무를 주신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주인들은 여종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두번째로 주인들의 악함은 여종을 통해 거두어 들이는 수익(돈)이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소위 황금 만능주의에 사로 잡혀있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돈에 자신들의 소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이 가져다 주는 행복, 돈이 가져다 주는 파워, 돈이 가져다 주는 안락함에 취해서 인생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종에게서 신통한 능력이 떠나게 되자 그들 입장에서는 그 여종이 돈벌이에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실은 그 여종은 바울을 통해서 온전한 인격체로 회복되었지만, 탐욕이 가득한 주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의 존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word play(언어 유희)를 하고 있는데요, 동일한 동사를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18절 마지막에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에서 “나오다”(exelthen)라는 동사와 19절에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에서 “끊어지다”(없어지다, 사라지다)(exelthen)동사는 동일한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귀신이 여종에게서 나갔을 때, 그 여종의 주인들의 소망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탐욕이 가득한 여종의 주인들이야말로 악한 영에 사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영, 교만의 영,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살았던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가자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소망 또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소망을 걸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 앞에서 장사가 없다. Show me the money! 라고 노래 부르며 삽니다.

재물 때문에 형제간에 분쟁이 생기고, 부모 자식간 관계가 단절되고, 법정 소송을 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악으로 빠뜨리는 세 가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일 2:16) ‘리차드 포스트’라는 작가는 현대인들의 우상을 ‘돈’ ‘권력’ ‘섹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아이러니 한 사실은 여종을 소유하고 있었던 주인들이야 말로 영적인 노예 상태에 있었습니다. 물질의 노예, 탐욕의 노예, 교만과 거짓 영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스스로 말씀하실 때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고 하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물질의 노예된 자에게, 권력과 명예에 노예된 자에게, 자기 의와 교만의 영에 노예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 거룩과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된 자들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온갖 죄악의 쇠사슬에 매여 억눌린 자들을 진리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진리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과거에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악의 쇠사슬로 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것은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헛된 소망의 끈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처럼 물질이 나의 소망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생의 자랑이 , 안목의 정욕이, 가족의 평안이, 금쪽같은 자식들이 나의 의지할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사라지되)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굳건한 반석이시며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배 중 불렀던 새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가사를 제가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은혜로운 찬송가를 작사한 분은 에드워드 모트라는 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모트는 런던의 음침한 뒷골목에서 생활하다가 16살에 가출을 하여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가구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손재주가 있던 그를 눈여겨 본 주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를 따라 교회 갔습니다. 그날 존 하야트(John Hyatt) 목사가,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원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소년의 마음을 두드렸고 그 자리에서 “잘못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요. 하나님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모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였고, 18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어느날 평소처럼 출근하는 중에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체험을 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공장 뒤편 언덕 큰 반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석처럼 변함없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노래하였는데 그의 고백이 이 찬송이 되었습니다.

My hope is built on nothing less. Than Jesus’ blood and righteousness; I dare not trust the sweetest
나의 희망은 기초를 두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움에, 나 감히 세상의 달콤한
frame, But wholly lean on Jesus’ name.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구조물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이름만 의지하도다. 굳건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내가 서리니 다른 모든 터는 가라앉은 모래라 (찬송 원문)

그 후에 그는 1852년 55세의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되었고, 21년동안 호샴 교회에서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놓아야 할 거짓 소망의 끈과 붙잡아야 할 소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모습들을 버리고, 재물과 탐욕의 끈을 끊어버리고, 굳건한 반석 되신 예수님의 이름만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께만 소망을 걸고 살아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1-10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유럽 선교의 첫 열매, 루디아”
•본문: 행 16:11-15
1/10/2021 주일 낮 예배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성탄 주일 전주에 “마게도냐 환상”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와 비두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무시아를 거쳐 드로아에 갔을 때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방의 한 사람이 서서 요청하기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 그리고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는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확신하고 배를 타고 유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마게도냐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계획과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의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겸손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순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선한 길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항상 나의 계획과 뜻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최선을 경험하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이 바울 일행의 생각과 계획보다 높음을 믿고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놀라운 일들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일어난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디아의 회심,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좇아냄, 감옥의 간수의 회심 사건입니다.

오늘은 그 세가지 사건 중 첫번째 사건인 “루디아의 회심”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 만남을 예비하신 하나님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만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노래 가사처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의미있는 만남의 여정이 인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여정이 달라짐을 많이 경험합니다.

인생에는 3가지 중요한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의 만남입니다. 두번째는 평생 동반자로 살아갈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가지 만남으로 인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세번째 만남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 없이는 인간은 표류하는 배처럼 인생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황하며 살게 됩니다. 이 만남이 없이는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소유하고 누린다 할 지라도 허무한 인생으로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에 와서 얼마 안되어 들은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과거에 미국에 이민 오는 분들의 미래는 공항에 픽업오는 분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공항에 픽업오는 분이 음식점하시는 분이면 이민 오시는 분들도 음식점을 하게 되고, 세탁소 하시는 분이 픽업하면 이민 오시는 분도 세탁소를 하게 된다는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주위에 그렇게 자신의 미래가 정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었습니다. 저희 가족도 2008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저희를 위해 픽업 나오신 분이 두 분 계셨는데, 같은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전도사님(한인 학생회 회장, 부회장) 두 분 이셨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가 나중에 8년 가까이 교육 전도사로, 부사역자로 섬기게된 교회가 바로 부회장으로 섬겼던 전도사님이 출석하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위해 한 사람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루디아라는 여성 사업가가 그 주인공입니다.

먼저 배경을 잠시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바울 일행은 드로아를 출발하여 사모드라게(에게 해에 위치한 작은 섬)을 지나 항구 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하였고, 내륙으로 약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빌립보로 들어가게 됩니다.
빌립보는 알렉산터 대왕의 아버지 빌립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동마게도냐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 이탈리아와 동부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간선 도로인 에그나티아 대로(the Egnatian Way)가 지나는 도시였습니다. 주전 168년에 로마가 마게도냐를 정복하게 되었고, 주전 42년에 그 성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식민지는 곧 로마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 이곳은 로마를 모델로 하여 독립적인 행정과 정부 조직을 갖추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수비대가 주둔하는 요새였고 나중에 수많은 퇴역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세금 면제 혜택이 주어졌기에 주민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빌립보에는 훌륭한 의학 학교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빌립보에 있는 의학 학교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훗날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이 도시에 세운 교회에 보낸 서신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기도와 물질로 적극 후원한 교회였습니다.

12절에 보면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4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진 마게도냐 지방 중에 바울 일행이 도착한 주요한 첫 번째 성이었습니다.

며칠간 빌립보에 머물다가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로 나가게 됩니다. 바울은 보통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여 회당을 찾아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일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당시 빌립보에는 회당 없었기 때문에(결혼한 남자 10명 없음을 의미) 소수의 유대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주로 모이는 강가(서쪽 1.6키로미터 떨어진 Gangites 강)로 갑니다.

강가로 갔던 것은 기도하러 간 목적도 있지만 유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루디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루디아는 아시아에 위치한 두아디라(드로아 아래 버가모에서32킬로미터 남동쪽) 출신이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짙푸른 자줏빛(심홍색) 염료가 생산되는 곳으로 염료 가공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루디아도 값비싼 자색 염료로 처리된 옷감을 전문적으로 취급했으며, 아마도 두아디라 공장의 마게도냐 대리점 경영인이었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그의 개인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의 고향인 ‘두아디라’가 고대 루디아 왕국이었기 때문에, 그가 파는 옷감의 상품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루디아 아줌마’라고 알려졌는지도 모릅니다. (ex.아모레 아줌마)

그런데 부유한 여성 사업가인 루디아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14)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는 고넬료처럼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럽 선교의 문을 여시기 위해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사람은 이방 여인 루디아였습니다.

이전의 습관을 좇아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강가로 가게 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마게도냐 빌립보에 있던 바울과 그 일행들이 그곳을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와의 만남을 미리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루디아와의 만남을 통해 마게도냐의 중요한 도시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유럽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다윗에게 사무엘 선지자를 예비하신 하나님, 엘리사 선지자를 위해 수넴 여인을 예비하신 하나님, 회심한 사울을 위해 다메섹에 아나니아를 예비하시고, 신앙의 멘토인 바나바를 준비하신 하나님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루디아와의 만남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게도냐로 부르신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확신 가운데 마게도냐 뿐 아니라 아가야 지방까지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
다시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열어”(헬. ‘디에노익센’) (원형) ‘디아노이고’는 단순히 ‘열다’보다 더 강한 의미로서 ‘철저히 열어 젖히다’ ‘활짝 열어 젖히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 다른 곳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행 17:3 ‘뜻을 풀어’(데살로니가 전도), 눅 24:32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눅 24:31 ‘눈이 밝아져’(엠마로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눅 24:45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루디아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수백번, 수천번 설교를 듣고,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가운데, 내 삶 가운데 심겨지지 않습니다. 마치 마 13장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기록된 것처럼, 마음이 닫혀 있으면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악한 자가 와서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고(새들이 와서 먹어버림),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의 가시가 결실을 막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뿌려지나 깨닫지 못하고 마음 문을 닫고 있어서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귀를 여시고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4절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음의 문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저의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마음의 문과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배의 자리로 나올 때 마다, 나아오기 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저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저의 눈과 귀를 열어 주셔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생수를 마시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심겨지게 되자 그는 바울의 말을 ‘따르게’(헬. ‘프로세코’ ‘귀기울이다’ ‘몰두하다’ ‘가까이 옮기다’)되었습니다. 루디아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에 반응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선교사님들과 선교 사역을 위해 기도할 때,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할 때 마음의 문이 열려 주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한 사람을 예비하셔서 그를 통해 복음의 전초 기지가 세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 헌신한 루디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루디아는 그와 그 집(‘오이코스’)이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고넬료처럼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이 있었다면 남편과 자녀 뿐 아니라 집에 있는 종들도 다 침례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의 가족들과 종들도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침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바울 일행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요청합니다. 사실 요청했다기 보다는 ‘강권하여’(KJV, constrained)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고 배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단한 전도 여행 중인 바울 일행에게 평안한 안식처를 제공하여 그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쉼을 얻도록 배려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집도 열리게 됩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딤전 5:10)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3, 45)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최초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된 소위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는 자신의 집을 사도들과 성도들을 위해 제공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에서 일어났습니다.

부유한 여성 사업가였던 루디아는 아마도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바울 일행의 휴식처로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교제의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나중에 빌립보에서 복음을 계속 전하다가 관리들에 의해 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적인 방법으로 옥에서 풀려나와 제일 먼저 간 곳은 바로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행 16:40) 그곳에서 두 사람은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한 이후 전도하기 위해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짧은 기간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였지만 이후에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루디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루디아처럼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성도들을 섬긴 평신도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서의 수신자인 그는 오네시모를 비롯한 여러명의 노예를 소유한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강론을 듣고 회심하여 나중에 아킵보, 에바브라와 함께 고향인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일꾼으로 섬기게 됩니다.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 믿음, 관용과 긍휼함에 대해 칭찬합니다. 그리고 차후에 방문하게 될 때 자신을 위해 숙소를 마련해 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바울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던 바울의 제자요 교회의 일꾼임을 짐작케 합니다.

바울의 요청으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함으로 그리스도인의 관용과 용서를 실천한 본이되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모두 루디아처럼, 빌레몬처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유럽 선교의 관문인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첫 선교의 열매, 루디아에 대한 은혜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예비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의 길목 길목마다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셔서, 말씀을 들을 때 마다 깨닫게 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기도하는 저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고 온 가족이 침례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루디아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의 소중한 것을 드려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1-01-03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 본문: 딤전 6:11-12
01/03/2021 신년 주일 낮 예배

2021년 신축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동행하시고,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예비하시길 기도합니다.

작년에는 엡 5:8-9 말씀을 가지고 우리 교회의 목표를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정해 보았는데요, 2021년 올 해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기초로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지켜 행하기를 원하는 주제 성구를 정하여 보았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함께 따라 해 보시겠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쓴 목회 서신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디모데는 바울의 요청으로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선배 목회자로서 바울은 후배 목회자 디모데에게 당시 에베소에 만연한 영지주의와와 퇴폐적인 유대교, 거짓된 금욕주의등과 같은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고, 목회자로서 명심해야할 교회 행정에 관한 교훈과 목회자로서의 본분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원합니다.

 

• 악한 것들을 ‘피하라’(Flee from)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 권면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내에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떠나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딤전 1:3-11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신화와 족보 이야기(하나님의 용납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숨겨진 지식을 발견해야 하고 천사를 숭배해야 한다는 가르침, 구원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구약의 역사나 족보를 토대로 신화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수도)에 몰두하였으며, 변론을 좋아하였고, 구약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하였고, 금욕적인 행위를 강조하였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지도자의 지위를 이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였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6-10절에 걸쳐 믿음의 사람들은 마땅히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6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됩니다.”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11절에서 사도 바울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디모데) (But, a man of God)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피해야 합니까?

a)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이단, 사이비)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늘 주의 해야 합니다.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하며,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해석할려고 하다가 진리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오류를 범치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b) 변론과 언쟁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교사들은 지적인 교만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화려한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변론과 언쟁은 투기와 분쟁, 비방과 악한 생각을 불러 일으킬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로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고 변론으로 영혼들을 주께로 이끌 수 없습니다. 오직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한 관한 교훈”(6:3)을 따라야 하며 “바른 지식” “건전한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c) 마지막으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요 돈을 벌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물질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하려고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지 물질이 섬김(예배)의 대상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기록된대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선을 ‘따르라’(Pursue)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땅히 피해야 할 것들을 언급한 이후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추구해야할 덕목 6가지를 소개합니다.
a) 먼저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의’을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이고 고결한 행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들은 의로운 자에 신분에 합당한 정결한 모습을 추구해야 합니다.

b) 두번째 덕목은 “경건”(godliness)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경건에는 내적인 경건(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사랑함)과 외적인 경건(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지키는 삶, 약 1:27)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c) 세번째 덕목은 “믿음”(faith)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그를 찿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딤전 6:15) 또한 믿음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실함, 정직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d) 네번째 덕목은 “사랑”(love)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하여 내어주시기까지하신 무조건적인 ‘아가페’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고전 13장 ‘사랑장’에서 바울은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추구해야할 영원한 덕목입니다.

e) 다섯번째 덕목은 “인내”(perseverance)입니다.
인생의 어떠한 불행과 고난, 역경에도 불구하고 도망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과 핍박 중에도 믿음을 지킨 자들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를 본받은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히 12:2)

f) 마지막으로 “온유”(gentleness)입니다.
인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인내가 어려운 상황을 참아내는 것이라면 온유는 더 나아가서 자신에게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의 원래 의미는 ‘사나운 짐승을 다스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분노하는 옛 사람의 모습, 시기와 질투하는 육신의 습관을 성령으로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의 덕목을 겸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Fight)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좇으라고 권면한 이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Fight the good fight of faith)라고 촉구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책 “살아있는 교회”에서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울의 권면을 세 가지로 규정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좇으라’ 라는 권면은 “윤리적 호소”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라는 권면은 “교리적 호소”이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취하라’ 라는 권면은 “경험적 호소”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싸우라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치열한 영적 전투에 부름받은 군사들입니다. 우리의 싸움(전투)은 “혈과 육(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사단 마귀는 믿는 자들을 삼키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에게 잡아 먹히지 않을려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해야 하며, 믿음을 굳게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벧전 5:8-9)

또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엡 6:10-17) 방어용 무기들(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로 자신을 무장하고 유일한 공격용 무기(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를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믿는 자들을 시험에 빠뜨리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진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허탄한 것들을 좇게 하는 악한 영들과 맞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 6:10)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적 나태함과 싸워야하며, 영적 무기력증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새해에도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불안감과 두려움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활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적 침체”입니다. 환경은 어렵지만 우리의 영혼이 잠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며, 예배의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30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날이 가까이 온 줄을 깨닫고 차디찬 로마 감옥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유언과도 같은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2021년 한 해, 저와 웨인즈빌 침례 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사도 바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킴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영생을 ‘취하라’(Take hold of)

존 스토트 목사님의 글에 의하면 마지막 사도 바울의 권면은 “경험적 호소”입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져야 할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붙들라”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고(요 1:12), 하나님의 아들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으므로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요일 5:11-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여기에 서술된 ‘영생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때 받는 미래적인 영광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혹자는 이것을 현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무엇보다도 미래적이거나 현재적으로 규정되어지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생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죽음 이후의 영원 불멸의 삶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인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증거하신 영생의 개념이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삶 그것이 영생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우리에게는 영생이 선물로 주어졌고, 현재 영생을 누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지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영생을 “취하라” “붙잡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취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필라부’는 원래 ‘폭력적으로 붙잡다’(로마 군인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다, 예루살렘의 폭도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다)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꼭 붙잡다’라는 뜻을 가진 ‘에필람바노마이’의 명령형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너가 이미 얻었고 지금 누리고 있는 영생을 놓치지 않도록 굳게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삼아라는 뜻입니다.
영생의 삶을 소유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즐기고 최대한 누리라는 권면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무언가를 소유하되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이거나 향유하지 않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말로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나의 것으로 확실히 인식하고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며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목사님은 책에서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 ‘루이 델쿠르’(Louis Delcourt)라는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휴가 후 귀대시간을 넘기게 되어, 불명예 제대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 탈영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자신을 다락방에 가두고 문을 걸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거기에 아들을 21년이나 숨겼습니다. 그러다 1937년 8월 그의 어머니가 죽게 되어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백하고 초췌한 몰골로 비틀거리며 가장 가까운 헌병대로 가서 자수했습니다. 헌병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그를 자세히 보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길래 듣지 못했죠?” 루이는 “듣지 못했다니, 뭘 말씀이죠?”라고 되물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탈영병을 위한 사면법이 통과되었다네”

루이 델쿠르에게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것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1년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감으로 영생의 풍성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453장 가사처럼 “예수 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4가지 영적 권면의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1) 우리는 악한 것들, 거짓된 가르침과 변론과 언쟁,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2) 우리는 선한 것들, 의와 경건/믿음과 사랑/인내와 온유를 추구해야합니다.
3)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합니다.
4) 우리는 영생을 굳게 붙잡으며 누리며 살아야합니다.

2021년 한 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함으로 개인과 가정이 복을 누리는 한 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0-12-27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와서 우리를 도우라”
•본문: 사도행전 16:6-10
12/27/2020 주일 낮 예배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되돌아 보며 사자성어로 한 해를 정리하는 언론 보도를 보곤 합니다.

올 한 해를 규정 지을 수 있는 사자성어로 “적막 강산”(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답답한 지경)이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2020년을 시작할 때 희망을 담은 사자 성어로 제일 많이 뽑힌 것은 “만사 형통”이었다고 합니다. “만사 형통”을 바랬던 한 해가 “적막 강산”으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정말 한 치 앞조차 내다 볼 수 없는 사회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한 해였습니다. 허리케인과 산불과 같은 자연 재해 앞에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셧다운 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8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감염되었고, 170만명이상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는 전무후무한(전례없는, unprecedented) 대 전염병(Pandemic) 시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는 돋는 풀같으니이다”(90:4-5)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밤의 한 순간 보다 짧은 인생이며,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과 같은 인생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덧없고 짧은 인생을 헤아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셔서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경험한 “마게도냐 환상”(Macedonian Vision)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지를 다시 방문하여 형제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마가 요한의 동행 여부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게 되어 그 결과 피차 갈라서서 실라와 함께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루스드라에서 신실한 믿음의 형제인 디모데가 전도팀에 합류하여 힘을 얻게 되고 세 사람은 여러 성으로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전하여 주고 그들에게 지키게 합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성도의 수가 날마다 늘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성령이 아시아에서의 복음 전도를 막으시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더베와 루스드라, 이고니온을 거쳐 동남쪽에 있는 에베소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이후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비두니아 지역까지 복음을 편만히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지금의 터키 지역 전체에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기에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통과하여) 무시아 앞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북쪽 지역 비두니아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지도 참조)

하지만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6),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도 막으셨습니다(7). 왜 성령께서, 예수의 영이 그들의 계획을 막으셨는지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3명의 전도팀의 마음이 점점 초조해 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을 막으시는 것일까?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마게도냐와 소아시아을 잇는 주요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미리 보여 주실 때 ‘환상’을 보여 주신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주께서 환상중에 나타나셔서 직가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하나님은 환상중에 나타나셔서 사람을 욥바에 있는 시몬 베드로에게 보내어 그 사람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던 베드로에게 황홀한 중에(환상 중에)나타나신 하나님은 신비한 동물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이방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드로아에서 밤에 바울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다 건너 마게도냐(그리스 반도 북쪽 지역) 사람 한 명이 서서 바울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합니다.

그 신비한 환상을 본 바울은 “우리가”(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드로아에서 합류) “곧”(즉시로)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들을 부르셨음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정하다”라는 동사는 “확실히 추측하다” “결론을 내리다” “확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모으다” “함께 의견을 올려놓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어떤 것을 추론해 내다”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세 사람의 의견을 함께 모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데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은 “막으실 때”도 있고 “여실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계획은 두 번씩이나 성령에 의해 막혔습니다. 아시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비두니아 지역으로도 가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바울은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갔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계획했던 대로, 소망하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경험을 하곤 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계획한 모든 일들이 잘 진행되는데 나는 하는 일마다 방해를 받고 진척이 안 될때가 있습니다.

저의 짧은 인생 가운데도 여러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두 가지만 생각해 본다면, 대학 졸업하고 친구들은 모두 안정된 직장을 얻어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저는 대학 4학년 여름때 인턴 생활을 통해 미리 합격 통지를 받은 기업을 들어가지 않고 캠퍼스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며 전도하는 ‘캠퍼스 사역자’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1년동안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전도자의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나갈 무렵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활짝 여실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몇개월간 기도하면서 이전에 합격한 기업으로 재입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때 일년 가량의 시간은 보람있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이 보낸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7년 8개월간 사역을 정리하고 교회를 나섰지만 2여년간은 저에게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교회 개척과 선교에 대한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구하며 하루 하루 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활짝 여시길 원했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지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습니다.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전도자로서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은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아라비아에서 3년간의 시간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의 시간, 안디옥 교회에서의 훈련의 시간이 그에게 필요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내가 계획했던 대로 잘 되지 않을 때, 무의미한 시간처럼 여겨지는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 때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막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막기도 하시지만 더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앞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쪽이 막히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열어 주시는) 다른 길을 찾으면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의료 선교사로 평생을 살았던 리빙스턴(David Livingston)도 원래 중국으로 갈려고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아프리카로 보내셨습니다. 근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도 처음에는 남태평양 폴리네시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인도로 이끄셨습니다. 미국 침례교 최초의 해외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먼저 인도로 선교를 떠났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마(현재 미얀마)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버마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성경을 번역하였고 영어-버마어 사전을 편찬했고, 수만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왜 아시아에서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지역에는 복음을 들어야할 사람들이 아직 수 십만명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복음 전파를 막으시는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럽에 먼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의 부르는 손짓은 유럽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calling 이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 2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유대로 돌아가는 길에 아시아의 수도였던 에베소에 잠시 들렀고, 이후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2년 3개월을 머물면서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도의 우선 순위는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해와 상식으로 납득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기에 유럽 선교 여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문을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계시록 3장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를 주도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복음 사역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영, 성령께서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영 성령께서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뜻과 계획과 달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선하고 최선임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할때 우리에게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본 바울 혼자서 기도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0) “우리가” 4명(바울, 디모데, 실라 +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이 함께 기도하며 의견을 모아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선교 사역을 위해 우리를 팀으로 부르셨습니다. 리더에게 하나님의 뜻을 환상으로, 기도 중 확신으로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교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 확신 가운데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한 사람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선교를 위해 기도로 동참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두번째 교훈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드로아에서 칠흙같이 어두운 밤, 바울은 기도 중에 생전 보지도 못한 “마게도냐 사람 한 명이 서서 그에게 청하여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우라”라는 단어는 헬라어 “보에쎄오”인데, 이 단어는 ‘울음소리’를 뜻하는 ‘보에’와 ‘달리다’를 뜻하는 ‘쎄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가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갈급한 마게도냐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저희도 진리에 굶주려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합니다. 오셔서 저희에게도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꿈과 환상을 통해, 기도 중 깨달음을 통해,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에 굶주린 영혼들의 부르짖음을 듣게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외치는 자들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고, 기도하며 순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곧”(immediately)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10)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거나 미루면 안됩니다. 핑계를 대면 안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나를 보내소서”(Lord, Here I am. Send me now)

미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 방해 공작을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젊은 엘리트 출신의 마귀가 크리스천을 죽이자고 제안할 때에 늙은 마귀가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때리면 매 한 대에 예수 믿는 자가 열도 더 생긴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가두면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므로 손해라고 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전략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에 늙고 지혜로운 마귀가 지혜를 짜내었습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사랑도 하자.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라고 속삭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이 마귀의 최대 성공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미루지 말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제를 보내소서’ 하지 마시고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먼저는 기도로 도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선교의 시작이요 마지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고, 사역자를 세워 주시고, 교회가 세워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권세를 결박하여 주시고 복음에 굶주린 영혼들을 예비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님들과 가족들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 중보 기도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2021년도에는 선교 사역을 위해 개인적으로, 새벽 기도회로, 금요 중보 기도회로 모여 더 많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물질 후원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물질의 후원없이 사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먹이시기도 하셨지만, 수넴에 사는 부유한 여인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음식과 머물 방을 예비함으로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올 한해 어려운 중에도 우리 교회를 통해 선교사님들을 꾸준히 후원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올 해 부터 시작된 “Snack In a Pack” 사역을 통해 지역에 거주하는 10명의 학생들에게 도움(주말 식사 제공)을 주게 되었고, Samaritan Purse 기관을 통해 55명의 고아들을 돕게 하셨고, 또 올 해 부터 저희가 속한 SBC 국제 선교부(IMB)를 통해 전세계 165개국에서 사역하는 3,700여명의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기 위해 Lottie Moon 선교 헌금에 동참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10분의 선교사님들과 3개 기관에 약 5만 4천불의 재정 지원을 하게 하셨고, 개별 성도님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페루의 아이들과 목회자, 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만 3천불과, 우물 사역에 4천 5백불을 지원하게 하셨습니다.

지난주 SBC 총재이신 Ronnie Floyd 목사님이 보내오신 편지를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요약: 4억 6천 7백만불 협동 선교 헌금, 1억 5천 9백만불 라티문 선교헌금(역사상 두번째 높은 금액), 암스트롱 부활절 헌금 4천 9백만불, 모두 6억 7천 5백만불 헌금 동참. 416명 선교사 파송, 남침례교 구호 단체 (적십자와 구세군에 이어 미국에서 세번째로 큰 재난 구호 단체)통해 국가적 재난 당한 분들 위해 753,977끼니 제공, 7,975개 복구 작업, 6,813건 복음 전파, 875명 영접, Send Relief(해외 구호 단체) 통해 77개국 700개 이상 프로젝트, 23만개 N-95 마스크 전달, 30만 끼 식사 제공, 6개 신학교 통해 25,023명 학생 유치, 3,287명 졸업)

우리의 작은 헌신들이 모아져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이 전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시간과 재능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팬데믹으로 올 해는 중단이 되었지만 선교 바자때 음식 준비와 배달등을 통해 사역에 동참하며, 앞으로 가능하다면 선교지를 방문하여 이발, 건물 보수, 여름 성경학교, 의약품과 의류 전달등의 사역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건강, 재능을 드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 한 해는 Covid-19 팬데믹으로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선교 사역에 적극 동참케 해 주셔서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님이심을 인정하고, 성령께서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고 꿈과 환상으로, 말씀으로 보여 주실 때 겸손히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년에도 우리 모두가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영혼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기도와 후원, 시간과 재능을 드려 선교 사역에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
Exemple
sermon date 2020-12-20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 본문: 이사야 9:1-6, 요한복음 3:16
12/20/2020 성탄 축하 주일 예배

함께 시청한 체코에서 제작한 ‘The Most (Bridge)’(다리) 라는 단편 영화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찢어지는 고통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처럼 기쁘고 즐거운 날, 이처럼 무거운 내용의 영화를 소개해 드리는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 of great joy), 즉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오신 날은 우리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날이지만, 하늘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내어주어야만 했던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귀한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탄절 주일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흑암의 권세 아래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함께 봉독한 이사야서 본문 말씀의 배경은 B.C. 720년경 남 유다 아하스왕 시대의 일입니다.

아하스는 우상을 섬기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따라 행했던 왕이었습니다 . 이에 하나님은 아하스와 유다를 징계하셔서,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공격하여 많은 무리가 사로잡히고 용사 12만명이 하루만에 살육당합니다. 아하스는 두려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앗수르가 적으로 돌변해 아하스와 유다를 침략합니다. 이에 유다 백성들은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리게 되어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8:21)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 뿐인 참담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8:22)

그런데 이사야 9장은 소망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어 성경 NIV 는 9:1 “Nevertheless”로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의 힘을 신뢰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입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을 것이다(1절).
전에 멸시받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후에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1절).
흑암에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칠 것이다(2절).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실 것이다(4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흑암의 고통 가운데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구원자)를 그 땅에 보내시어 흑암에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될것이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 1:9)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택하신 백성들을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기 위해(골 1:13)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낮은 자리에 오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약속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는 그 어느 때보다고 어둠이 온 세상을 가득 덮고 있었던 암울한 한 해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 빼앗긴 자유로 인한 불편함, 무엇보다도 영적인 곤고함과 갈급함.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흑암의 고통 아래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탄생 소식은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던 것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자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이 회복되며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하고 있는 모든 멍에는 벗겨질 줄 믿습니다.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고백처럼 “돋는 해(메시아)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눅 1:78-79)

둘째는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불길이 자신을 집어 삼킬 때에도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은 희생하고 아이를 가슴에 품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자신의 피붙이를 위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종종 있습니다. 또한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을 우리는 ‘의인’이라 부르며 그의 고귀한 희생을 칭송합니다.

2001년 1월 26일 저녁 7시15분, 도쿄의 아카몬카이 일본어 학교에 유학중이던 이수현(당시 26살·고려대 무역학과 휴학)씨는 신오쿠보 역 구내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선로에 떨어지는 것을 본 그는 곧장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씨와 함께 뛰어든 일본인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당시 47살) 등 셋은 안타깝게도 선로를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10년동안, 그가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그날에 추모제가 일본 현지에서 열렸으며, 그가 죽은 신오쿠보 역과, 그가 재학하던 고려대학교 세종 캠퍼스에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을 ‘의인’이라 칭하고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추모하는데, 하나님은 죄로 인해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 그의 하나 뿐인 아들,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롬 8:32)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본 것처럼 수 많은 열차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과, 아들을 잃고 비통해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새 찬송가 294장은 일본인 ‘미타니’라는 분이 작사한 곡입니다. 1-2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1.하나님은 외아들을 주시는데까지 세상 사람 사랑하니 참 사랑이로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2.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우리 원수같이 대적하나 사랑하여 주네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우리, 원수같이 대적하던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죄악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평민인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의 특권과 지위를 포기하는 것도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어찌 온 세상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름을 ‘우유’)을 너무 사랑해서, ‘우유’랑 대화하고 싶어서 1년간만 ‘개’로 변해서 ‘우유’와 친밀하게 소통하며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우유’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어찌 동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더 파격적인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같은 피조물에서 다른(하급 동물) 피조물로의 변이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재가 되신 그 분은 피조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황실에서 나신 것도 아니요, 엄청난 부를 누리며 권력을 행사하던 헤롯 가문에서 나신 것도 아니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명예를 누리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의 가정에서 태어 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이름없는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호텔이나 근사한 여관에서가 아니라 냄새나고 더러운 말 구유(말 먹이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를 드린 사람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가난한 목동들이었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기 위해 별을 보고 수 만리 길을 걸어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며 예물을 드린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 wise men,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 아이 중 두 살 아래 있는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온 세상의 환영을 받기는 커녕,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이 자행되는 고통의 시기에 아기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급히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낮아지는 삶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세상으로 오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임하셨습니다.

서른 살이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고(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함), 이후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고,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어부들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유명한 학교를 다닌 적도 없으시고,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 안수를 받으신 적도 없으시고, 박사 학위같은 명예로운 졸업장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였던 주 대상은 이스라엘의 평범한 백성들이었고, 세리와 창기를 비롯해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명예와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으셨고, 머리 둘 곳도 없는 나그네 처럼 순회 전도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낮은 자리에 임할 것을, 섬김의 삶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너희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그리스도인의 삶은 밀알처럼 썩어지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가르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흉악한 범죄자들의 형틀인 십자가를 지셨고, 로마 군병들의 채찍에 맞으시고 침밷음을 당하시고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여섯 시간의 기나긴 고통을 온 몸으로 다 겪으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나님께서 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탄절 주일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우리도 본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 주일에 우리는 ‘The Most’ 영상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약속으로,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참 빛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버리시고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저와 성도님들 모두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