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마 5:1-3
9/19/2021 주일 낮 예배
오늘부터 몇 달간에 걸쳐서 마태복음 5-7장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 설교’(Sermon on the Mount) ‘산상 수훈’(Beatitude)라고 일컬어집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4명의 기자가 조금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 복음서(Gospel)인데요 복음서 중의 진주는 마 5-7장에 기록된 “산상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마태 복음은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5개의 강화(설교)문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 그 5개의 설교문 중 첫 번째가 마 5-7장에 기록된 “산상 설교”입니다.
산상 설교는 왕이신 ‘예수님의 취임 연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의 백성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NIV Study Bible)
* 5:1-12 팔복, 축복의 선언 5:13-20, 6:1-7:23 구제, 기도, 금식,물질에 대한 윤리적 교훈 5:21-48 유대 율법적 전통과 대조하여 가르치심
8복을 구분하면 “가난한 사람들(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의 겸손에 관한 세 가지 복,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에 관한 세 가지 복,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화평케함, 의를 위하여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함)에 관한 두 가지 복”으로 묶어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스캇 맥아트)
산상 설교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 1)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너무 높아 실현 불가능한 것(이상주의적 관점)이다. 2)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시대(천년왕국)에 실현될 미래의 규범이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 3) 제자들만을 위한 것(알버트 슈바이처) **4)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요 법칙이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산상 수훈 설교집의 제목을 ‘기독교 대항 문화’(Christian Counter-Culture)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어거르지고 거스러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좇지 말고, 천국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레 18: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대항하여 살아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본받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모습을 본받지 말아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해두고 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6:2-18 참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가르침)
• 복에 대하여
한자 복(福)을 파자(破字)해 보면, 보일 시(神을 의미)+한 일+입구(한 사람)+밭 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미는 신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밭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동양적인 의미로 볼 때 복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자기 몫의 밭(분복, 기업)이 있음을 알고 만족하며 살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니 너무 큰 욕심을 가지지 말고 자신의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 때 행복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질려고하고,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세상의 성공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은 물질의 복, 무병장수의 복, 자녀 성공(출세)의 복, 명예와 권력의 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객관적인 기준에서 많은 부를 소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빈곤감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이미 많은것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적인 복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복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창 1:28) 또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 가운데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실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b)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으로 삼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믿음의 후손)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벧엘로 돌아와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이름 야곱->이스라엘, 후손의 축복, 땅의 축복), 요셉을 통해서(임마누엘의 축복, 형통함의 축복,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b))흘러 넘칩니다. (성경적 개념의 복은 내가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요 이웃을, 공동체를 복되게)
시편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 말씀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아쉐레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2편 마지막 절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3-6),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받게 된 죄사함의 축복(7-12), 마지막으로 구원과 우리가 받을 기업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축복(13-14)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령한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복의 개념에 대해, 누가 그 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는 당시 종교적인 의미 외에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였습니다. (축복된(blessed), 운좋은(fortunate), 행복한(happy))
산상 설교 본문에 기록된 복(마카리오스)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happiness)과는 다른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happen(우연히 일어나다)에서 유래되었는데, 마카리오스는 우연히 얻게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3절에서 그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임을 말씀합니다. 3절과 10절(8th 복)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복들은 미래 시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현재 이 세상에 살아 가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리며, 경험하며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 심령의 가난함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첫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가 복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흔히 가난하다는 말은 경제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이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교만함과 자기 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속에 영적 교만과 자기 의로 가득 채워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물질을 의지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중심에(사상에) 하나님이 없다하며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ex. 다니엘서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의 최후, 행 12장 헤롯 아그립바 왕)
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으며, 자기 의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음을, 인생은 안개와 같으며 먼지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호흡을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다스리시고 영벌의 심판과 영생의 축복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혼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ex.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아이, 운전하는 아빠 신뢰)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 18:1)에게 경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대표)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라고 합니다. (상대적인 의를 자랑, 판단하는 눈, 외적인 경건, 율법의 행위 강조, 자신은 의인이라 여김)
반면에 세리(매국노 취급 받는 사람, 불의한 자의 대표)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함,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함,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만 구함, 죄인임을 인정)
예수님의 판단: 누가 의로운 자인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8:14)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예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세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인물들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 받지 못한 인물들이 몇명 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 빌라도, 부자 관원은 자기 의와 세상 지식, 권력과 물질로 인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그들의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여 영생을 얻었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의와 지식과 과거의 추악한 삶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통회하는 마음,겸손한 마음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 중에 과거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 아십니까?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을까요?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간음죄, 살인 교사죄, 분노(나발), 교만(인구조사)) 요셉, 다니엘, 사무엘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인간적인 연약함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 듣고) 눈물로 침상을 띄울 정도로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백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4,7,9,17)
다윗은 자신의 죄를 주님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고 죄 용서를 구합니다.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broken spirit), 통회하는 마음(contrite heart)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처럼 ‘깨어진 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그러지고 거스러진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따르지 말고, 이 세상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세리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다윗처럼 영적으로 가난한 자, 겸손한 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인 교만과 자부심과 자기 의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만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셔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