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 본문: 행 17:1-9
1/31/2021 주일 낮 예배
사도행전에 초대 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여러개 있습니다. 제자, 증인, 신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붙여진 호칭,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7:6 에 보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천하를 소동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1차 전도 여행 중에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냅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복음 전파를 시기하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달려들어 루스드라로 급히 피하게 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 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준 사건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환생한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여겨 그들에게 제사할려고 하자, 급히 그들을 말리며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인해 바울은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됩니다.
2차 전도 여행중 빌립보에서도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좇아낸 일로 인해 그 여종의 주인들이 자신들의 수익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장터 관리들 앞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16:20)고 고발합니다.
빌립보에서 있었던 더 놀라운 사건은 감옥에 갖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찬송하고 기도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죄수들의 매인이 것이 벗어지게 된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감옥의 간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가는 곳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소동들이 일어난것은 그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마음문을 열고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요 ‘구원의 능력’이 되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훼방거리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했습니다.
먼저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한 데살로니가 도시에 대해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남서쪽으로 약 53Km 떨어진 암비볼리로 갔습니다. 암비볼리는 B.C. 167-146년에 마게도냐 북부 지방의 수도이기도 했던 도시로서 빌립보 지방보다 더 큰 정치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그곳을 거쳐 계속 남서쪽으로 진행하여 암비볼리에서 약 43Km지점에 있던 아볼로니아를 지나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던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주전315년에 카샌더(Cassander)왕이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요 자신의 아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인데 로마가 데살로니가를 주전146년에 자치적 영토로 만들었을 때 수도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명의 큰 도시로 마게도냐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160Km나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는 유럽에서 빌립보에 이어 두번째로 교회가 세워진 지역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은 그들을 대적하던 자들로 부터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는 호칭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통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을 찾아가 세 안식일(3주)동안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reasoned with them from the Scriptures, 논증하고), 뜻을 풀어(explained), 증언(proved, 증명)하였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강론하고, 뜻을 풀고, 증언하였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고난), 죽은 자 가운데서(십자가에서 죽으심) 다시 살아나야 할것(부활), 그리고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구원자, 메시야)라고 전파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마찬 가지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메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 구원자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17장 하반부와 18장 전반부에 기록된 아덴과 고린도 지역에서 전도 사역중에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증거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행 26장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의 변화를 간증할 때에 자신의 복음 전도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3)
단순한 생명의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분이 세상의 구주되심, 이것이 전부요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revealed,계시되어), 믿음으로 믿음에(from first to last,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복음,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하 인용문) 1904년에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은 20세기 전 세계에 부흥운동의 문을 여는 부흥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이 부흥의 불길은 유럽뿐 아니라 1905년에는 웨일즈 선교사들이 많이 나가있던 인도와 호주와 아프리카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1906년에는 미국의 아주사 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 현장을 다녀온 미국목사 존스톤의 도전으로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평양 대 부흥운동은 중국 만주의 부흥으로 이어진다.
웨일즈는 과거 여러 차례 부흥을 경험했던 곳이었지만 웨일즈 대 부흥 직전 웨일즈의 상황은 비참했다. 자유주의 신학, 다윈의 진화론, 성경의 고등비평이 신학교에 깊이 침투하자 성경에 대한 권위의 상실로 교회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교회에 등을 돌리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현재 웨일즈에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한 부흥이다” “강력한 성령의 임재만이 유일한 치유책이다”라고 말하면서 부흥을 사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 1903년에 웨일즈에서 케직 사경회가 열려 목회자들 사이에서 각성이 일어났다. 참가한 목사님들이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2, 1903년에 4명의 웨일즈 청년들이 부흥을 사모하여 6개월동안 매일 밤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합류했고 기도의 열기가 강하게 타올라 성령의 임재로 영적 자도자들과 잠자는 영혼들을 깨웠다.
3, 1904년에 26세의 젊은 신학생 이반 로버츠가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쓰임받기 시작한다. 그는 12살 때부터 탄광에서 일하면서 몇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에 전념했는데 부흥이 일어나기 12년 전부터 웨일즈의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친구들과 부흥에 관해 나누었다. 1904년 봄에 비상한 영적 체험을 했는데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 4시간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체험을 했고, 3-4개월 동안 매일 새벽에 이런 기도체험이 계속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웨일즈와 세계 여러 나라에 역사하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웨일즈 남서부에 있는 뉴캐슬 엠린에 소재한 예비 신학교로 들어간다. 그 근처에서 Seth Joshua 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나를 굴복 시켜 주소서, 나를 굴복 시켜 주소서! ” 부르짖다가 13년간 기도하며 사모하던 성령충만을 체험한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웨일즈 전역을 다니면서 구세주에 대해 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찼다. 이때 성령께서 어찌나 강하게 임하셨든지 그는 하나님께 이제 그만 손을 거두시라고 간청해야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로버츠는 이 경험 후에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로버츠는 여러 차례 환상을 보는 가운데 그는 활활 타고 있는 지옥불의 모습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무수한 영혼들이 지옥 불을 향해 달려오는 환상을 보았다. 또 세계를 뻗어있는 팔과 그의 손에 100,000의 숫자가 기록된 종이를 보기도 했다. 로버츠는 10만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하며 10만명을 구원하는 꿈을 친구들과 나누었다. 10월이 되면서 그는 고향의 모교회인 모라아교회의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점점 불타올랐다. 그는 신학교 교장에게 고향에 돌아가 1주일간 집회하고 돌아오겠다고 허락을 받고 고향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부터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나 회중들이 눈물바다를 이루며 가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대부분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예수 이름으로 이제 성령을 보내주소서”, “더욱 강하게 임하소서”이었고 , 성령을 보내달라는 기도가 그의 집회의 특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부어주소서, 강하게 부어주소서, 더욱 강하게 부어주소서” 라고 그들은 기도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부흥이 그를 따라 다녔다. 악명 높은 죄인들, 술주정군들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절하듯 땅에 쓰러졌고 원수들이 화해했다.
11월에는 이반 로버츠와 성령께 사로잡힌 몇몇 사역자들을 통해 부흥의 불길이 전 웨일즈로 번지면서 이반 로버츠는 웨일즈의 요한 웨슬리로 불리웠다.
가장 기억에 남을 일들이 남 웨일즈에 있는 탄광마을들에서 일어났다. 부흥의 물결이 탄광 지역에 몰아칠 때 지하 63m 떨어진 갱도에서 80명의 광부들이 마태복음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아멘을 외쳤다. 광부들 사이에 많은 기도회가 열렸고, 광부들의 노동이 질적으로 개선되었다. 낭비벽이 줄어들었고, 술과 개으름과 도박이 줄어들었으며 말을 부릴때 욕설과 발길질이 없어졌다. 로버츠가 분명히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조직하고 지배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성령님께 순종했다. 부흥운동이 전 웨일즈로 번지면서 1년 동안 10만명이 주님께로 인도 되었다. (강순영, 웨일즈 부흥)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개인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할 때 경건한 헬라인(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함을 시기하여 시장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성을 소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야손(Jason)이라는 사람의 집에 침입하여 바울 일행을 찾아 끌어내려고 합니다. 아마도 야손의 집에 바울 일행이 머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야손과 및 형제들(성도들)을 끌고(dragged)읍장들(헬. 폴리타르크. 문자적으로는 도시 통치자, 5명으로 구성된 자치 단체에 속한 행정 장관들)앞에 가서 소리 지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손이라는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손은 ‘치료하는 자’ ‘돌보아 주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인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이외에도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의 동역자가 된 사람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20:4)도 있습니다.
야손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하는 동안 자신의 집을 그들의 거처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것은 가족들과 사회 공동체로 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 위험하고 담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문화 속에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야손은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로 부터 받는 따가운 시선도 견디어 내었습니다.
핍박을 두려워했다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였기에, 그는 기꺼이 바울 일행을 위해 자신의 거처를 제공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설립과 확장의 기록인 사도 행전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지식으로 예수님을 믿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유럽 선교의 첫 열매였던 루디아도 예수님을 믿은 후 온 집안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도록 했고 모두가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바울 일행의 쉼터로, 빌립보 지역 성도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극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이후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온 몸의 상처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침례를 받은 후 그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온 집안이 기뻐하였습니다.
야손은 바울 일행을 맞이하였다는 것으로 인해 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손의 집에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한 불량배들에 의해 끌려 읍장들 앞에 던져지게 됩니다. 하지만 신중한 읍장들 판단으로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됩니다.
누가 천하를 어지럽게 할 만큼 영향력있는 사람들입니까? 바로 야손처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며, 복음의 지경은 넓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신의 복음 사역에 헌신하고 동역한 동역자들 서른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야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리라”(롬 16:21)
야손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변화되고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닷물에 3.5% 소금으로 인해 짠 맛이 나는 것처럼,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 마다 세상이 요동하며 세상은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고후 2-3장)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며(고후 2:14),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알고 읽게(고후 3:2)됩니다.
사도 행전 24장에는 벨릭스 총독에게 고발당한 바울을 일컬어 변호사 더둘로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24:5)고 하였습니다. 악성 바이러스가 소리 소문없이 급속하게 퍼져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것처럼, 바울은 복음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더둘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성 종양과도 같은 존재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바이러스, 구원의 바이러스라는 말이기도합니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복음이 전해진지 140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전 국민의 ¼ 이상이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이, 복음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미미해 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많아지고 크리스찬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믿는 자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서른 세명의 사람들을 일컬어 ‘민족 대표 33인’이라 부릅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들이 16명이나 되었습니다. (천도교 15, 불교 2)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지만,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컸음을 짐작케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야손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부패해가는 이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들 앞에 끌고 와서 고발한 내용은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였습니다.
신성 모독죄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죄였다면, 로마인들이 신으로 받드는 황제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을 섬긴다는 것, 즉 반역죄는 로마인들에게 가장 악한 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씌운 죄명은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고 로마 황제에 대항한다는 반역죄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가이사는 우리의 주(퀴리오스)이시다’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고, 불에 타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 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술로 고백할 뿐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으로 천하를 소동케하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담대히 고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복음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 위해 희생하고 섬김으로 천하를 소동케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입술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삶속에서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