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팔복 1)(마태복음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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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마 5:1-3
9/19/2021 주일 낮 예배

오늘부터 몇 달간에 걸쳐서 마태복음 5-7장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 설교’(Sermon on the Mount) ‘산상 수훈’(Beatitude)라고 일컬어집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4명의 기자가 조금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 복음서(Gospel)인데요 복음서 중의 진주는 마 5-7장에 기록된 “산상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마태 복음은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5개의 강화(설교)문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 그 5개의 설교문 중 첫 번째가 마 5-7장에 기록된 “산상 설교”입니다.

산상 설교는 왕이신 ‘예수님의 취임 연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의 백성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NIV Study Bible)

* 5:1-12 팔복, 축복의 선언 5:13-20, 6:1-7:23 구제, 기도, 금식,물질에 대한 윤리적 교훈 5:21-48 유대 율법적 전통과 대조하여 가르치심

8복을 구분하면 “가난한 사람들(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의 겸손에 관한 세 가지 복,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에 관한 세 가지 복,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화평케함, 의를 위하여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함)에 관한 두 가지 복”으로 묶어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스캇 맥아트)

산상 설교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 1)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너무 높아 실현 불가능한 것(이상주의적 관점)이다. 2)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시대(천년왕국)에 실현될 미래의 규범이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 3) 제자들만을 위한 것(알버트 슈바이처) **4)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요 법칙이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산상 수훈 설교집의 제목을 ‘기독교 대항 문화’(Christian Counter-Culture)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어거르지고 거스러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좇지 말고, 천국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레 18: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대항하여 살아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본받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모습을 본받지 말아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해두고 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6:2-18 참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가르침)

• 복에 대하여
한자 복(福)을 파자(破字)해 보면, 보일 시(神을 의미)+한 일+입구(한 사람)+밭 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미는 신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밭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동양적인 의미로 볼 때 복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자기 몫의 밭(분복, 기업)이 있음을 알고 만족하며 살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니 너무 큰 욕심을 가지지 말고 자신의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 때 행복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질려고하고,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세상의 성공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은 물질의 복, 무병장수의 복, 자녀 성공(출세)의 복, 명예와 권력의 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객관적인 기준에서 많은 부를 소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빈곤감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이미 많은것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적인 복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복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창 1:28) 또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 가운데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실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b)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으로 삼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믿음의 후손)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벧엘로 돌아와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이름 야곱->이스라엘, 후손의 축복, 땅의 축복), 요셉을 통해서(임마누엘의 축복, 형통함의 축복,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b))흘러 넘칩니다. (성경적 개념의 복은 내가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요 이웃을, 공동체를 복되게)

시편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 말씀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아쉐레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2편 마지막 절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3-6),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받게 된 죄사함의 축복(7-12), 마지막으로 구원과 우리가 받을 기업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축복(13-14)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령한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복의 개념에 대해, 누가 그 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는 당시 종교적인 의미 외에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였습니다. (축복된(blessed), 운좋은(fortunate), 행복한(happy))
산상 설교 본문에 기록된 복(마카리오스)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happiness)과는 다른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happen(우연히 일어나다)에서 유래되었는데, 마카리오스는 우연히 얻게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3절에서 그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임을 말씀합니다. 3절과 10절(8th 복)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복들은 미래 시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현재 이 세상에 살아 가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리며, 경험하며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 심령의 가난함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첫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가 복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흔히 가난하다는 말은 경제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이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교만함과 자기 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속에 영적 교만과 자기 의로 가득 채워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물질을 의지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중심에(사상에) 하나님이 없다하며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ex. 다니엘서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의 최후, 행 12장 헤롯 아그립바 왕)

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으며, 자기 의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음을, 인생은 안개와 같으며 먼지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호흡을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다스리시고 영벌의 심판과 영생의 축복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혼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ex.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아이, 운전하는 아빠 신뢰)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 18:1)에게 경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대표)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라고 합니다. (상대적인 의를 자랑, 판단하는 눈, 외적인 경건, 율법의 행위 강조, 자신은 의인이라 여김)

반면에 세리(매국노 취급 받는 사람, 불의한 자의 대표)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함,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함,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만 구함, 죄인임을 인정)

예수님의 판단: 누가 의로운 자인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8:14)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예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세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인물들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 받지 못한 인물들이 몇명 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 빌라도, 부자 관원은 자기 의와 세상 지식, 권력과 물질로 인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그들의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여 영생을 얻었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의와 지식과 과거의 추악한 삶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통회하는 마음,겸손한 마음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 중에 과거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 아십니까?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을까요?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간음죄, 살인 교사죄, 분노(나발), 교만(인구조사)) 요셉, 다니엘, 사무엘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인간적인 연약함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 듣고) 눈물로 침상을 띄울 정도로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백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4,7,9,17)

다윗은 자신의 죄를 주님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고 죄 용서를 구합니다.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broken spirit), 통회하는 마음(contrite heart)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처럼 ‘깨어진 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그러지고 거스러진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따르지 말고, 이 세상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세리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다윗처럼 영적으로 가난한 자, 겸손한 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인 교만과 자부심과 자기 의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만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셔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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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마 4:23-25
9/12/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 기간 중 행하실 3가지 사역을 요약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심(teaching), 전파하심(proclaiming), 고치심(healing)입니다.

23절.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사” :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갈릴리 호수 인근에 204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2백개가 넘는 도시와 마을을 걸어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 가르치심 (teaching)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회당(synagogue)은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로서 그곳에서 예배, 재판, 율법 교육등이 이루어졌습니다. 회당이 생기게 된 것은 포로기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드릴 수 없게된 유대인들이 흩어진 곳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세운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10명 이상 모여 사는 곳에는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회당을 찾으셨습니다. 이후 사도 바울도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고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되심과 구주 되심을 전하였습니다.

‘가르치다’라는 뜻의 헬라어는 ‘디다스코’인데 ‘교훈적인 설교를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 에스라서에 기록된 율법 학자요 제사장인 에스라는 2차 포로 귀환시에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영적 개혁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뛰어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결심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에스라 7:10)한 것입니다.

3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로 쓰임받았던 총독 느헤미야도 성벽 재건 이후 제사장 에스라를 불러 예루살렘에서 큰 부흥 집회를 인도하게 합니다. 그 때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고, 백성들 사이에 선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들에게 율법서의 의미들을 해석하여 그 뜻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느 8:8) 이것이 바로 가르침의 사역이었습니다. 말씀의 선포와 더불어 가르침의 사역이 함께 이루어질 때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9)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백성들의 마음속에 찔림이 있었고 눈물의 회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준 말을 밝히 앎이라”(느 8:12) 말씀이 깨달아지고 이해가 되니까 모든 백성에게 큰 즐거움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 ‘디다스코’는 헬. ‘다오’에서 유래된 동사입니다. ‘다오’는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즉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함을 의미합니다. 잘 배우는 사람이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배우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give attention to the words of the Laws)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하였고”(느 8:13-14)

공동체의 리더들이 솔선수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해서 학사 에스라를 찾아왔습니다. 배울려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에스라에게 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They found written in the Law) 그들이 오랫동안 율법서에 기록된 초막절 절기를 지키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배울려는 마음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눅 4장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 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기독교 교육학자 루이스 쉐릴(L. J. Sherrill)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표현이 신약 성경에 47회나 나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칭호도 전도자나 설교자보다는 ‘선생’이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음서 42회)

예수님은 탁월한 교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Parables)를 통해 가르쳤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무려 28개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 비유: 눅 15장 탕자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은 흔히 ‘천국 비유장’이라 불립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롯해 6가지의 비유를 통해 천국의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청중들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고 진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데 사용되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훈련 방법의 핵심은 “삶을 통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가르침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무시며 생활하면서 살아있는 지식을 전수하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우선 순위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관계가 사역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대조적인것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행하지 않으면서 율법과 전통을 지키라고 가르쳤던 반면에 예수님은 “내가~행한것처럼 너희도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가르치신 주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로마 군병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포로 귀환 시대에 영적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안에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많이 세워져서 진리의 말씀을 성도들과 불신자들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지식의 전달 차원을 넘어서 삶을 통해 제자를 양육하는 “제자삼는 제자”가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전파하심(Proclaiming)
예수님의 두번째 사역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선포)하심이었습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논증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파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케루소”입니다. 원래 의미는 전령관(messenger)으로서 왕의 공적인 명령을 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는 것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권위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그 권위를 가지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였을 때 무리들은 서기관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권위로 인해 놀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 기간동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4:23,24)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9:35) 예수님은 걸어서 온 갈릴리 마을들에 다시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소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여 로마에 가서 재판을 기다리며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2,3차 전도 여행의 총 거리를 합산해 보면 약 13,400 Km 가량 됩니다. 그 먼거리를 사도 바울은 걸어서, 배를 타고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주로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청중이 듣고 순종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한 메세지를 듣기를 싫어한 왕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거나 메세지를 왜곡되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메세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가 전한 메세지로 인해 사람들로 부터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말씀 선포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불붙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his word is in my heart like a fire)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10)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힌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진리를 선포하기를 열망하는 “불타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불타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령(messenger)은 왕의 명령을 신속히 백성들에게 선포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그 책임을 망각한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할 전령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전령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파수꾼(watchman)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파수꾼은 적의 동향을 살피다가 적이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알리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흔히 “전쟁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계(파수)하는 일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서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에스겔에게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6-7)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선포)해야할 메세지는 무엇이겠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시대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1:9)고 하였습니다.

죄악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그 아들의 영광스런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고치심(healing)
전체 복음서의 약 1/5이 예수님의 치유와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모두 72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27회는 개인의 질병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5-7장 산상 수훈 이후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8-9장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 장모, 귀신 들린자, 병든자, 귀신들린 두 사람, 중풍 병자, 혈루증 여인, 소경, 말 못하는 사람)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가르치시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의 질병, 특히 불치의 병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좇아 내어 주셨습니다.
23절.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튜 헨리는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가장 쇠약한 질병인 중풍병와, 정신적으로 가장 악한 병인 간질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큰 재난인 귀신들림을 고쳐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병, 모든 약한 것, 각종 병에 걸려 고통당함을 외면치 않으시고 친히 그들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전인적인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백성되도록 복음을 선포하셨고(영혼 구원), 사람들이 실존적으로 겪고있는 질병와 약한 것들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육체 구원)

예수님은 굶주린 영혼들과 병든 자를 보실 때 긍휼의 마음(compassion)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4) 이 말씀 이후 예수님은 저녁 먹을 시간이 되도록 먹지 못한 채 빈들에 모인 수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의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구한말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복음을 전한 서양 선교사들이 걸어서 말을 타고 한반도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펼친 사역은 의료 기관 설립과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조선의 수 많은 백성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의료 기관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으로 살았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근대식 교육을 통해 계몽되어 수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배재학당, 경동학교, 경신학교, 이화학당, 연희 전문대, 세브란스 병원등)

지금도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서 하는 사역들 중에 교회 개척과 제자 양육과 더불어 고아원을 운영하고 유치원과 학교를 세우고 병원/클리닉을 세우는 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출 15) 히브리어 “라파”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수선하다’ ‘다시 세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감싸 싸매시어 회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치유하는 광선”을 비추시어 우리의 질병과 약한 곳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원래 상태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든 것을 짊어지셨습니다.”((마 8:17. 사 53:4 재인용)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무너진 우리의 인생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허리케인과 지진과 같은 인생의 시련을 만나 절망하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무너진 우리 인생의 집을 다시 세워 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것은 육신의 질병에서 나음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노예됨으로 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치의 병에서 나음을 얻었더라도 예수님이 구원자되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은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마 9장에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친구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시기 전에 죄사함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서기관들이 이를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였을 때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음을(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치유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그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세 가지 사역,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우리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 잘 배우며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왕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내어 영광스러운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메신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여호와 라파)하나님께 나의 모든 연약한 부분을 내어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치유의 광선”을 비추셔서 우리의 모든 질병이 나음을 얻고 연약한 육체가 회복되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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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 본문: 마 4:12-22
9/5/2021 주일 낮 예배

•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의 시작 (12-17)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은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였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시험이었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험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마귀로 부터 오는 이 세가지 시험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4:7)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는 ‘성령의 검’과 같은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순종함으로 영적 전투에서 날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곳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자라나신 곳은 갈릴리 부근에 있는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는 갈릴리 호수 인근 마을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버나움이 사역의 본거지(base camp)였습니다.

갈릴리 서북안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세리 마태가 부름받은 곳이며,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이며, 귀신들린 사람들과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곳입니다. 현재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5세기에 지으진 바실리카식 교회당이 서 있고, 4세기의 회당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살면서 사역을 하게 된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서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으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사 9:1-2절 인용)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북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앗수르의 입장에서 볼 때 요단강의 서쪽에, 즉 ‘요단강 저편’에 있습니다. ‘해변길’은 갈릴리 해변 지역을 가리키는데 가버나움은 해변 마을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표현은 가버나움이 속한 갈릴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갈릴리는 과거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방화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이 이방인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지역 중심으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갈릴리 지역은 흑암이 지배하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소외받고 천대받던 그 어두운 곳에 큰 빛이 비칠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거하시면서 큰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마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우리의 삶 또한 이방의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처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심으로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 중에 복음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첫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침례 요한의 첫 메세지와 동일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태복음의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4회/32회 언급)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요 온 인류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 왕국’이 실현되었습니다. 귀신이 쫓겨가고 눈 먼자가 눈뜨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가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서,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고 물위를 걸어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흑암의 권세’아래 있던 백성들에게 ‘기쁨 소식’을 전하심으로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영생의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가지 조건이 있는데 회개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악을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 숭배하던 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나오는 것을 의미하며,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거짓말 하던 자들은 그 악한 행실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받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선포하였을 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들은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물었을 때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우리 마음 속에 회개가 일어납니다. 마음속의 뉘우침은 행동의 변화로 연결됩니다. 과거의 악한 행실들과 습관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회개하는 자들은 천국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심으로 천국이 가까이 다가옴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마음 속에 주님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신 성도님들은 날마다 주님앞에 나아갈 때 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실 줄 믿습니다.

• 제자들을 부르심 (18-22)
갈릴리 호수 인근 지역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우선 순위를 두시고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란 의미는 유대인의 스승인 랍비에게서 ‘배우는 자들’이었습니다. 랍비에게서 율법과 탈무드를 비롯한 유대 전통을 배우고 익히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나라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짐을 가르쳐줍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혼자서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실 수 있고, 천사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천국을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는 ‘소수 정예’의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지만,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 열 두명의 제자들을 양육하시는데 집중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6:21 “이때로부터”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이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제자들에 포커스를 맞추어 ‘제자도’(discipleship)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십자가 지는 삶’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삶’ ‘서로 발을 씻기는 겸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명의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신 4명의 제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은 갈릴리 해변입니다. 어촌 마을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지식인들과 비교하면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을 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평범하고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기후에 대처하는 유연함과 강인함,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보통 그러하듯 그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명의 제자들 중 첫 제자 4명을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시험을 치르고 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여 선발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르심’(calling)에는 3가지 종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우리를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섬김에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주신 은사(달란트)에 따라 봉사하고 섬기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특정 사역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부름받은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구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종(사역자)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흔히 말하는 풀타임 사역자(목사, 전도사, 선교사) 뿐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의사, 교수, 교사,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포함됩니다. 의료 선교사, 컴퓨터 기술 선교사, 농업 선교사, 언어 선교사, 교육 선교사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목회 영역도 세분화 되어 전문 목회자(어린이, 음악, 행정, 선교, 실버, 설교)가 각광 받는 추세입니다.

예수님께서 4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1) 모두 갈릴리 어부들이었고 자신의 일(어부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이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4:18)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4:21) (ex. 모세, 다윗:목자, 아모스:농부, 예레미야/에스겔:제사장 가문)

2) 예수님은 명령하셨고 그들은 순종하였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4:19)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20)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부르시니”(4:21)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22)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실 때 다른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단지 제자들이 할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원어: 사람의 어부)로 만드시는 일이었습니다.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생선을 잡아 삶을 연명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아 그 후로는 “사람의 어부”, 즉 영혼을 구원하는 제자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동일합니다. “곧” 즉시로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과 재산과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았고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ex.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예수님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 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려면 문자적으로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버려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도 아내가 있었고, 바나바도 사유 재산이 있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 삶의 목적이 바뀌어야 함을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음으로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3) 예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일생의 사명’(life mission)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주신 일생의 사명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기에 그들은 평생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험이 오고 환난이 닥칠 때에도 사명은 그들을 붙잡아 주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낙심,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과 대화하시며 음식을 나누어 드시며 그들에게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생선이나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갈릴리 어부’로 살지 말고 ‘사람들의 어부’로서 살아야 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 가운데 헤매며 목적 없이 살던 우리를 찾아 오셔서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주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기억하며 붙들고 사는 성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길 힘은 사명을 회복하고 사명에 충실함에 있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조건에서 보면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이었으나 주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셨고, 그들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들의 어부”로 만들어 주십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즉각적으로 온전히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제자로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사명을 기억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는 천국의 일꾼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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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본문: 마 4:1-11
8/29/2021 주일 낮 예배

믿음 생활하다보면 시험에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시험, 사람과의 관계로 인한 시험, 육신적인 연약함으로 인한 시험등 각양 시험으로 인해 믿음에서 흔들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라고 하는 단어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시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시험, 영어로는 test, trial 로 표현하는 시험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시험(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예가 욥이라는 인물이었죠.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는데 사탄이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의 풍성한 소유물을 치시면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욥의 재산과 가족을 빼앗아 가게하고 그의 몸도 상하게하는 엄청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욥은 그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서도 ‘그를 단련하셔서 순금 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며 흔들림없이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는 일꾼이 됩니다.

야고보서에는 시험을 이긴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시험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욥처럼 믿음으로 시험에서 승리하여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두 번째 시험은 영어로 유혹, 미혹을 의미하는 ‘temptation’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서 받으신 시험은 바로 두 번째 시험, ‘유혹’이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두 번째 시험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1)하나님은 시험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아무도 죄에 빠지도록 미혹하지 않으십니다. 죄에 빠지도록 미혹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사단의 이름의 의미가 ‘미혹하는 자’(tempter), ‘고소하는 자’(accuser)입니다.

2)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악(사단)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신 본문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미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에 빠지도록 마귀가 시도했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3)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험’은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test, trial)이라기 보다 우리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시험’(유혹, temptation)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안에 자리잡고 있는 욕심(탐욕)은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죄가 자라나서 결국 사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원자(메시아)임을 증거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귀에게 시험 받으심과 그 시험을 물리치심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자 사단의 궤계를 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첫번째 아담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함으로 실패한 인생이 되었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이기심으로 모든 인류의 구원자의 자격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 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히 4:15)가 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들처럼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시험 받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시험 받을 때에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면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서 3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한가지씩 살펴 보면서 시험의 의미와 시험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육신의 정욕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 성도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신 것은 이 세가지 시험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입니다. 3절 말씀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매우 허기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 인간이셨기에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육체의 모든 한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피곤함, 허기짐, 슬픔, 십자가의 고통)

마귀는 예수님의 약한 부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필요한 육신의 문제, 원기를 회복시켜 줄 빵을 가지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원래의 의미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돌을 명하여 빵이 되게 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이것은 마귀의 교묘한 전략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사용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은 더군다나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허기지고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때문에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빵으로 그들의 허기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전하기 위해 행하신 이적이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약점을 간파하고 예수님을 미혹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류의 조상 하와가 어떻게 마귀의 시험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단이 간교한 뱀의 모양으로 나타나 하와에게 속삭입니다. (창 1:1-6)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의 대답입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원래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1:16-17))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약점을 사단은 교묘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사단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는 사단의 꾐에 넘어가고 맙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자리 잡게 되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 스럽게 보이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금단의 열매가 탐스러운 열매로 바뀐 것입니다. 죄가 자리 잡은 하와의 마음속에 세 가지 죄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습니다.

1)먹음직 스럽게 보임(육신의 정육) 2)보암직하게 보임(안목의 정욕) 3)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임(이생의 자랑)

사단이 예수님께 던진 첫번째 시험은 “육신의 정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돌을 명하여 빵이 되게 하여 너의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던진 첫번째 시험은 우리 크리스찬들을 유혹하는 강력한 시험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물질이 제일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Money matters, Show me the money!

성경은 우리에게 물질이 악하다거나 살아가는데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이 더 중요한 가치,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맘몬을 너의 주인으로 삼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 (예화. 물질적으로 성공한 이민자의 실패)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예수님은 떡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먼저 채우는 것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물질 중심의 삶을 살라는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은 연약한 육체를 가진 존재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코에 생기(하나님의 영)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육적인 필요가 다 채워져도 영적인 필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아니하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필수적인 영적 양식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책망과 교훈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등이요 빛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예수님은 신명기 8:3 말씀을 인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인생의 주인되심과 공급자 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의 존재 근원은 떡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 하나님 자신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물질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라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들(먹을것, 마실것, 입을것)을 채워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생의 자랑
두번째 마귀의 시험은 “이생의 자랑”의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마귀는 시편 91편을 인용합니다. 마귀도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합니다. 시편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명하여 너를 보호하여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때 천사들을 보내 죽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고도 마실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출 17:3)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출 17:6)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시험한 행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의 궤계를 꿰뚫어 보시고 신명기 6:16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두 번째 사단의 유혹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과 같은 유혹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때 천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보호하여 몸의 상함이 없이 사뿐이 지상에 내렸다면 사람들은 박수치며 환호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며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웅적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입증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세울려는 줄 아시고 무리들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내 이름을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명예를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명함에 각종 직함을 넣기를 좋아합니다. 감투를 얻을려고 합니다. 하지만 허영과 권력을 쫓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면 안됩니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겸손함으로 나를 낮추는 삶, 나의 유익을 먼저 구하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 무엇보다 나를 자랑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안목의 정욕
마귀의 세번째 유혹은 “안목의 정욕”에 해당하는 유혹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르되 만일 네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통치권, 소유권)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께 속삭이기를 지금 네게 엎드려 경배하면(절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을 손쉽게 얻게 해주겠다는 유혹입니다.

마귀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소유한 자도 아닙니다. 마귀에게 경배한다고 해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단지 거짓말로 유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 궤계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 지름길을 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신명기 말씀(6:13)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섬김의 대상, 경배의 대상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우상들을 내어 던져 버리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의 고백처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마귀의 유혹은 “안목의 정욕”(보암직스럽게 보이는)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고후 5:7) 보암직스럽게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면 살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안목의 정욕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미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귀는 순간 순간 속삭이며 유혹합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아라라고 미혹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마귀의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지켜 행함으로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하여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욕구을 채우는 것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신 세상의 영광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사탄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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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본문: 마 3:13-17
8/22/2021 주일 낮 예배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 4권을 ‘복음서’(Gospel)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3권을 ‘공관 복음’(Synoptic Gospel)이라 부르는데,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 본다는 의미입니다.

마태 복음이 다른 복음서인 마가, 누가, 요한 복음과 다른 특징을 몇가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태 복음은 주 독자층이 유대인들이어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 유대인이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로 선포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쓰였기 때문에 제일 앞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구약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약속과 성취’로서 두 시대(구약과 신약)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그래서 마태 복음에는 구약 성경을 다른 신약의 책보다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의 130번) 마태 복음에 자주 사용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졌다’라는 구절은 9번에 걸쳐 등장하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3. 마태 복음은 다섯 개의 위대한 강화 (discourses)를 중심으로 짜여있습니다. (5-7장 산상 수훈, 10장 제자들을 가르치심, 13장 천국 비유들, 18장 제자도, 24-25장 감람산 강화(종말))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열한 것인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구절로 매 설교(강화)가 마무리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태 복음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것은 마태가 모세 오경의 구조를 모델로 했음을 암시합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새로운 토라(율법)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위대한 모세’로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4. 마태 복음은 ‘교회’를 언급한 유일한 복음서(16:18, 18:17)이며, ‘하늘 나라’라는 구절이 32회나 등장하는데-‘하나님의 나라’는 4회-이는 유대인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뿐 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도 동일하게 침례 요한이 유대 백성들에게 외친 첫 복음의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한 첫 메세지도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theology of the Kingdom of God)은 구약 성경 창세기 부터 신약 마지막 성경 요한 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파괴와 구속,회복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많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속박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그 날을 소망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하늘 나라, 천국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국가를 이루는 세가지 요소를 주권, 국민, 영토라고 합니다. 1)주권은 국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체, 권력의 힘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2)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영토는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정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국민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즉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곳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 나라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며,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곳 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천국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그 왕국의 시민들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첫 메세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멀리 보이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죄로 부터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함께 읽은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공생애 부분부터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기 이전에 공생애의 첫 사역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왕의 즉위식’이라 붙였습니다.

‘즉위식’은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요 새로운 왕이 왕권을 이어받고 왕정을 시작함을 모든 사람 앞에서 선포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 ‘대관식’이 있습니다.
대관식(戴冠式)(Coronation)은 기독교 문명을 근저로 하고 있는 유럽 황실에서 왕이나 여왕이 즉위할 때, 기독교의 사제가 그 머리에 왕관을 씌어주는 의식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왕관을 머리에 얹어 준다고 하여 영어로 Coronation, 한자어로 대관식이라 칭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중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대관식 대신 즉위식 (卽位式)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황제는 천제(天帝)라 생각했기에 그 머리에 누군가가 왕관을 씌어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는다고 하여 즉위식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하신 일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마치 유럽 황실의 왕이, 중국의 황제가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모든 백성에게 공포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되심과 그 아들의 구속 사역이 시작됨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왕의 즉위식과 같은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며 인정하시는 왕의 즉위식이요 왕의 출정식과 같은 장면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침례의 의미에 대해 상고해 보기를 원합니다.

1. 모든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세례(침례)에 대한 성경적 기원은 구약의 결례(정결 의식)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자신의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 예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전통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유대교인이 될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는데, 할례 받은 후 상처가 아물면 그 사람을 데리고 강으로 가서 흐르는 물에 씻게 하고 물 가운데 세워 율법을 읽어 주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와 죄사함을 상징하는 의식이었고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요단강까지 친히 내려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 하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기에 침례 주기를 꺼리며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침례 요한은 스스로 말하기를 “너희로 회개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 부터 성령과 불로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침례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을 의미합니다. 침례 요한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구원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침례를 주는 순종의 행위가 결국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알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이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던 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순종함으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나의 생각과 이해력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라면 겸손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의 죄를 대신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시기에 회개나 죄 씻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할 구원자로 오셨기에 인간의 죄와 실패와 완전하게 동일시하시기 위해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들과 동일한 존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에 기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고, 종의 형제를 가지셨고,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높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스스로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고, 죄 없으신 주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례받으심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 메시아의 도래와 사역의 시작을 공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요한복음 1:31에서 침례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침례를 베풀므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구원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은 또 말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 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 1:33-34)고 말합니다. 침례 요한은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령이 비둘기 처럼 예수님 위에 내려 앉는 것을 보고- 확실히 알았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침례 받으심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왕의 출정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았던 소박한 의식이었지만,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4.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은 침례를 통해 회개와 죄사함의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친히 침례를 받으셨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되는 성도들이 지켜야할 의식으로 침례를 명령하셨습니다. (마 28:18-19) 그 명령을 주신 분이 스스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침례의 의미는 나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공중에게 증거하는 예식입니다. Baptism (수침례)을 지키는 우리는, 물 속에 들어갈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물 속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침례는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구원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4-5)

침례 받을 때 나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침례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주신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6-17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왔을 때 나타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현상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 보시는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형상이 비둘기 형상을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온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온 지면에 물이 감한 것을 전하여 준 동물이 비둘기였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증하는 현상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사 61:1-2 인용)

두번째 현상은 하늘로부터 음성(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기독교 이전의 메시아를 가르키는 말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는데, 예수님을 우리 죄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종으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사 42:1-7 말씀은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의 사명을 담당하실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례 현장을 하늘에서 지켜 보고 계셨고, 성령을 비둘기처럼 보내셨고, 친히 음성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구원자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 1년 이상의 시간을 통해 마태 복음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번째 일로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으로부터 침례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침례 받으심의 의미는: 1)모든 의를 이루는 것 2)우리 죄를 대신할 구원자이심을 증거 3)메시아의 도래와 사역의 시작을 알림 4)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심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겸손하게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침례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 거하며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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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 본문: 행 1:8, 2:42-47
8/15/2021 주일 낮 예배

제가 2019년 이곳에 와서 이 지역을 다니면서 보고 놀란 것은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저희 가족이 살았던 북가주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로 부터 반경 2마일 안에 제가 차 다니면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20여개는 되는 것 같은데 아마 그 이상 될 것같습니다. 마치 과거에 한국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곳이 김포 국제 공항이었는데, 밤에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서울 시내를 낮게 가로 지를 때 비행기 안에서 시내를 내려다 보면 사방에 빨간 네온사인 불빛의 십자가가 가득한 것을 보고 많이 놀라곤 하셨을 겁니다.

대한 민국의 개신교회가 5만 5천여개가 된다고 합니다. 치킨집, 편의점 보다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저희 교회가 속한 미국 남침례교(SBC) 교회가 현재 4만7,500여개가 되며, 미주리에는 1,800여개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 많은 교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 교단이 왜 그렇게 많은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죄악에 가득한 세상 가운데 수 많은 교회가 존재함으로 인해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세상에 소망이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지난 1년 7개월 가량에 걸쳐 사도 행전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시작과 확장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존재하는 수 많은 교회의 뿌리가 되었던 2천년전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와 유럽에 세워진 초대 교회의 모습을 살펴 보면서 과연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인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인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구별되는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해 처음 말씀하신 때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전에 교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신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종반부에 제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말하자면 ‘제자 훈련’에 집중하셨는데,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이 다가오심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고난 받으실 것과 십자가 지실 것,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세워질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주님은 “내 교회를 세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주신 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초월적 능력과 권세였고, 또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 열쇠는 기도의 열쇠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이 후에 주님께서 이 땅에 남겨 두신것은 제자들과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헬. ‘에클레시아’인데요 ‘부르심을 받은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교회’입니다. 화려하게 지은 건물,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엡 1:23)입니다. 인간의 모임도 아니요 화려한 건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는 곳, 그리스도의 영이 머무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주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입니다. 요 15장에 기록된대로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가지된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입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엄청난 죄의 댓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목적이 우리를 교회로 삼기 위함임을 말씀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교회입니까? 독생자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교회, 그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 사신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 행전을 일년 7개월가량 자세히 공부하고 강해 설교하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사역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도 행전을 중심으로 강의하실 때 두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1) 교회가 이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는가? 2)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는 존재하는가? 저는 이 질문에 감히 yes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가고 혼란 가운데 있을지라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교회의 영향력이 약해져간다 할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소망임을 믿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는 존재하는가? 사실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큰 교회, 영향력 있는 교회들이 존재하지만 이상적인 교회라 부르기에는 주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니지만 과거에, 약 2천년전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가 존재했는데, 그 교회가 바로 사도 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는 지금부터 2천년전에 존재하였던 과거의 교회이지만, 오늘날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할 교회의 원형(prototype), 교회의 모델입니다.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바로 그 교회”(the Church)의 모습을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1. 초대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 행전을 흔히 “성령 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행전에는 거의 모든 장(chapter)마다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빼고는 사도 행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 시작된(잉태된) 교회입니다. 사도 행전 1-2장에 보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자세히,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1:2)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1:8)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집(마가 요한의 집으로 추정)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명의 무리가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 충만하여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사도 바울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구제 사역을 담당할 일곱 집사들의 자격 요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은 빌립을 이끌어 광야로 이끄시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그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 전도에 확신이 없었던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명하사 의심하지 말고 형제들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을 때 그가 순종함으로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명에 순종하여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기를 멈추고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복음을 전함으로 유럽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분도 성령이시고 교회를 성장케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사람을 세우는 분도 성령이시고 사람을 파송하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고난 중에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도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늘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성령의 열매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초대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기도의 일생이었던것처럼 초대 교회도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된 것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 순종하여 마가의 다박방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던” 120여명의 무리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제비 뽑을 때에도 기도하였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침례를 받은 삼천명이 넘는 사람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가 풀려 난 이후에도 두려움 없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주된 일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이었고,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도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기도하였는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습니다.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 갈때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 주셔서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갖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헤롯이 그를 잡아 처형할려고 한 그 전날 밤에 주의 사자를 옥에 보내어 그를 감옥에서부터 이끌어 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한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큰 지진이 나며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매인 쇠사슬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그는 사역의 고비 고비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역경을 이기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초대 교회 교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빌 1:19)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려야합니다.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자의 기도를 제일 두려워한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지만,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 교회의 모범을 따라서 기도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강건케 되어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과 명령의 말씀이 사도행전 1:8 말씀입니다.

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조건) 2) 너희가 권능을 받고(준비됨) 3)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사마리아와<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복음의 증인됨)

성령이 임하시면 하늘로 부터 권능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권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힘, 권세, 권능, 강력함, 재능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 ‘다이나믹’ ‘다이너마이트’ 단어가 ‘두나미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눅 4:14) 병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함께 하셨습니다.(눅 5:17) 예수님은 열 두제자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눅 9:1)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설교할 때에도 증거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행 10:38)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병 고침의 역사로, 담대한 복음 전파로, 유무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 4:2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바로 초대 교회였습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믿음으로 나음을 얻기도 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술주정뱅이가 예수님 앞에 꼬꾸러뜨려져서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족 중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전혀 없던 가정에 한 사람을 통해 복음이 들어가서 온 가족과 식구들, 친척들까지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 기도하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십시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고,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연약함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초대 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공동체였을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칭찬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다”(골 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살전 1:3)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행 2장 42절부터 47절까지, 4장 32절부터 35절까지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자발적 나눔)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려운 성도들을 서로 도왔다는 의미입니다.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radical) 나눔과 헌신의 공동체였습니다.

공산주의를 시작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 구절을 근거로 빈부의 격차가 없는 이상적이고 평등한 사회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때 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탐욕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제도와 권력으로 ‘유무상통’하는 사회를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서로 돌보고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 종과 주인이 함께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편견과 차별이 없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품고 용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그들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전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습니다.

우리 웨인즈빌 침례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기도하며 특별히 연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5. 초대 교회는 선교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선교 공동체입니다. 사도 행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 충만받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천국 복음을 전파한 기록입니다.

‘증인’(메르튀레스)은 ‘순교자’(martyr)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과 제자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법정에서 사실대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 믿고 깨달은 것을 회당에서나, 유대인들 앞에서나, 이방인들 앞에서나, 로마 관리들이나 왕 앞에서나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공회 앞에 섰을 때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엄하게 경고하기를 이제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타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고, 빌립 집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자 사울을 찾아 오신 주님은 그를 변화시켜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고, 그를 통해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 큰 획을 긋은 사건은 바로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최초로 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일입니다.(행 13) 그 두 명의 선교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큰 희생을 감내하고 두 명의 지도자에게 안수하고 파송함으로 세계 선교의 장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큰 희생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큰 부흥을 허락하십니다.

지난 주 오후 예배 때 말씀드린 것처럼 모라비안 공동체는 성도 열 두명 중에 한 명 꼴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24시간 연쇄 기도 모임을 백여년간 지속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계 선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땅 끝까지 갔고(go),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았고(make disciples),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었고(baptize),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teach) 지키게(keep)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말씀으로 양육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변화되어 그들이 나가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 행전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꿈꾸는) 교회의 모델인 초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능력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대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웨인즈빌 침례교회도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이 시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받는 교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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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본문: 사도행전 28:16-31
8/8/2021 주일 낮 예배

우리는 작년 1월부터 사도 행전 말씀을 통해 초대 교회의 설립과 확장의 생생한 스토리를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교회에게 주시는 영적 도전과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행전의 마지막장 마지막 내용입니다.

사도 행전의 주제 구절은 행 1:8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 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어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에 전파되었고, 빌립 집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전해졌고, 사도 바울을 통해 온 아시아와 그리스 지역,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셋집)에 일차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자유의 몸이 되어 4차 전도 여행을 갔는데, 그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서바나(스페인)까지 갔으리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은 강력한 생명력이 있기에 극심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인종과 문화, 종교와 신분, 사회 경제적 상황과 국경을 뛰어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듣고 깨닫고 믿는 자마다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로마 시민권자인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수 개월의 거친 항해끝에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요 제국의 중심지로서,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정교하게 건설된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사방 팔방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도시처럼 로마도 이방 신전이 가득한 도시여서 카피툴린 언덕 위에는 주피터와 주노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여 로마의 남쪽에 위치한 압비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자신을 마중나온 로마 교회의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격려를 받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이 머물게 된 곳은 실제 감옥이 아니라 자신의 비용으로 세를 얻은 집(28:30)이었습니다. 바울은 중범죄자도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인물이 아니어서 자신이 살 거처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 같습니다. 가택 연금 상태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제한된 자유를 누리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시위대)이 24시간 교대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셋집에서 2년간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먼저 복음을 전한 대상은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다닐 때 먼저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교육, 문화, 종교의 센타였기에 회당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바울을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족 유대인들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하였습니다. 로마서 9-11장에 걸쳐 유대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영적 무지)되겠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마음속에 큰 근심과 끊임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고 하였습니다.

로마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원했기에 유대 공동체의 리더 몇 사람을 자신이 갇혀있는 셋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셋집에 거주한지 ‘사흘 후에’ 유대 지도자 몇명을 초청한것으로 미루어 바울의 선교 열정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길 정도로 힘든 여정을 보내었기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올에서부터 로마까지 여러날을 걸어서 왔기에 몸은 많이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복음을 전하기 원했기에 도착한지 삼일 후에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한 것은 그들이 유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셋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었는데 유대 공동체 리더 몇 사람을 먼저 만나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변화된 그들을 통해 복음이 로마에 있는 유대 사회에 급속토록 전파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20절까지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한 복음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유대인들이 자신을 로마 당국에 고발하여 죄수가 되었고, 로마인은 자신을 심문하여 무죄함을 알고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자신이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이나 법을 어기거나 로마법을 어긴것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증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으로 인해 심문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것,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구약 성경에서 반복해서 예언하고 있는 오실 메시아(구원자)에 대한 것입니다. 영원한 왕,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년동안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모든 고통에서 해방하여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시골 동네 나사렛 출신의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유일한 소망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을 듣고 유대 지도자들은 중립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당신의 고발과 재판에 관해 유대에서 온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바울에 대해 나쁜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단지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지 듣기 위해서 왔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전도 활동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마음 문을 열지 않은 채 자신들은 직접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도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유숙하는 집에 찾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였는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셋집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뿐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군인들(시위대, palace guard)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자신을 지키고 황제의 궁전을 호휘하는 수 천명의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로마의 중심부, 로마 황실에까지 전파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 셋집에 있을 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변화된 사람중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영적 리더였던 빌레몬의 노예였으나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로마 셋집에 있던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바울의 심복(심장)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것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서신서가 신약 성경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해 주었고 그를 종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형제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 자료에 의하면 그로부터 약 50년 이후에 오네시모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대표적 교회인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몬 1:10)이라고 칭합니다. 바울은 감옥과도 같은 곳에서도 영적 재생산 사역을 하였습니다. 제자 양육에 매진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디모데처럼 영적인 아들과도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심복(심장)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갇혀 있었으나 ‘쓸모없이’(useless) 보이는 한 영혼을 ‘쓸모있는’(useful)한 존재로 변화시켰습니다.

30절 말씀대로 바울은 2년간 로마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지식인이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나 군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재판 결과를 기다리면서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복음 전파를 위해 한 일은 4권의 성경을 집필한 일입니다. 소위 ‘옥중 서신’이라 일컬어지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여 편지로 남겼습니다.

쓰여진 순서대로 보면, 골로새서는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인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에바브라가 교회내에 침투한 이단의 문제를 가지고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 왔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서신서입니다.

빌레몬서는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쓴 사적인 편지로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두라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쓰여진 에베소서는 3년동안 눈물로 사역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두기고와 오네시모 편으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교인들에게 보내고, 빌레몬서를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전달케 합니다.

빌립보서는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서 빌립보 교회에서 파송한 에바브라디도편으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혀지내는 바울을 섬기도록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일꾼인데, 큰 병에 걸려 죽을 뻔 하였으나 완쾌되어 이 편지를 가지고 빌립보로 돌아갔습니다.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의 시간을 보낸 바울에게, 재판 결과를 기다리며 로마 셋집에서 보낸 감방같은 2년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 2년간의 시간이 허송세월하는 wasting time/killing time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를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로마 시위대 군인들과 황실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오는 제자들을 양육하는 시간이 되었고 오네시모와 같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갇혀 있는 동안 초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기록한 서신들 중에 4개를 신약 성경에 포함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로마 셋집에 매여 있었으나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두번째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인 디모데 후서에 기록한 바와 같은 의미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세상의 권력이 전도자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그의 손과 발에 쇠사슬을 채울 수는 있어도, 바울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쇠사슬로 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하지만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순교의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면서 믿음을 지켰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육체를 제어하는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기 보다 영혼을 멸하실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복음은 더욱 힘있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 방방 곡곡에서 교회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정부에 의한 핍박, 이슬람이나 힌두교인들에 의한 핍박,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핍박,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한 핍박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불타고, 선교사가 납치되어 고문 당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들에 의해 가족들이 목숨을 잃고 집을 잃기도 합니다. 고향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합니다. 직장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는 핍박 중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조차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고 감옥을 넘어, 전쟁의 상흔을 넘어, 인종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 세상 끝까지 전파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사도 행전의 마지막은 두 단어로 마무리되고 있는데요, ‘메타 파세스 파레시아’(boldly, ‘아주 담대하게’), ‘아콜루토스’(without hindrance,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입니다. 이 두 단어는 사도행전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외적인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핍박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아주 담대하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힘있게 전파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권력을 이기는 능력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고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주 되심-을 ‘담대하게’ ‘거침없이’(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전파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 행전은 30-31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이 셋 집에서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갑자기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고 무죄로 석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도 않고, 그 이후의 바울의 사역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습니다. 왜 누가는 갑자기, 조금은 어색하게 사도 행전을 끝마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로마에 전파된 복음은 그 누군가에 의해 그 이후로 계속 전파 되었고, 계속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복음은 지금도 땅끝까지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말하기를 사도 행전 29장(Acts 29)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가 써가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은 사도 행전 28장에서 마무리 되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멀리 나가지는 못해도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삶의 현장에서 아내로, 남편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섬기는 교회에서 사도 행전 29장을 써내려가는 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써 내려가는 사도 행전은 주님께서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welcome),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모든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하고 가르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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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 본문: 행 28:1-15
8/1/2021 주일 낮 예배

지난 7월 20일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존 창업자의 회사인 Blue Origin이 개발한 상업용 발사체가 지구 상공 100마일 우주에 다녀온 일이었습니다. 파일럿 없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발사체에 민간인들만 4명이 탑승하였고, 우주에서 몇 분간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캡슐을 타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7월 20일을 상업 우주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잡았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달에 최초로 발을 내딛은 날이 1969년 7월 20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거대한 로켓 새턴 V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3명의 우주인들이 탄 아폴로 11호는 발사한지 4일만에 고요의 바다(Sea of Tranquility)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3명의 우주인들 중에 최초로 달 표면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Neil Armstrong이었습니다. 닐 암스트롱이 귀환 후 방송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한 사람이 내딛은 하나의 작은 발걸음, 인류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도약)

저는 사도 바울의 로마행이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수개월의 거친 항해 끝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하였던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마침내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로마 입성은 너무나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인채로, 초라하게 로마 땅을 밟습니다. 그를 주목하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도착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로마 입성은 장차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이 위대해서라기 보다 바울이 그토록 전하기 원했던 복음의 능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문화와 종교, 언어, 국경의 장벽을 뛰어 넘습니다. 신분을 초월하고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관습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전염병처럼, 산불처럼 급속하게 전파되어 복음을 믿는 자들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실제로 바울의 로마 선교로 시작된 작은 발걸음(small step)이 어떻게 세계 선교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사건이 되었을까요?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로마로 가기를 원하는 자신의 염원을 담아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기록한 서신서가 로마서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이끌어 가는 탁월한 영적인 지도자는 없었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등을 서로 돌아가면서 읽고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하며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여러곳에 퍼졌습니다. 롬 1:8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들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어서 온 세상에 전파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 일행이 탄 배가 시칠리아 섬 수라구사를 거쳐 이태리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레기온에서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을 타고 보디올이라는 항구 도시에 도착하였을 때, 로마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바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백부장의 배려로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일주일간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바울은 로마에 셋집에 거하면서 찾아 오는 로마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였을 것이며 그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온 세상에 계속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셋집에 거주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그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 1:13)

사도 바울은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낸 2년 동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결과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이미 복음이 시위대 안에 들어갔고 로마 황실 사람들 중에도 회심자가 나왔으리라 짐작됩니다.
이후 로마 황제들에 의한 핍박이 있었지만 복음은 로마 제국 전역에 소리 소문없이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 핍박할 수록 복음은 더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로마 입성 이후 약 250년이 지난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핍박과 차별을 금지하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받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A.D.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하였습니다. 로마 정부와 황제로 부터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모든 사회에 영향을 미쳐 로마의 국교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살았던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100년이 지나면 이 지구상에 성경은 단 한 권도 남아 있지 않고 기독교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지 25년이 지난 후, 그는 죽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집은 성경을 인쇄하는 인쇄소와 성경을 보관하는 창고가 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 같았던 기독교는 더욱 번창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한 사람의 작은 헌신, 작은 발걸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부분은 멜리데섬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두번째 부분은 멜리데섬에서 로마에 도착하기 까지의 여정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 (1-10)
파선한 배가 도착한 곳은 멜리데(현재 몰타 공화국)라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멜리데는 시칠리아 남쪽 100 킬로미터 해상에 있는 섬으로서 로마로부터는 510킬로미터나 떨어져있었습니다. 그 섬의 주민들은 페니키아 혈통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폭풍을 만나 2주간 표류한 끝에 그레데의 미항에서 서쪽으로 약 75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문자적으로는 ‘야만인들, 그리스 말을 사용하지 않는 모든 민족을 그리스인들이 일컫는 말)이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특별한 동정, unusual kindness) 추운 날씨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을 피워 몸을 녹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에 불에 넣자 나무 가지 사이에 있었던 독사 한마리가 불의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것을 본 원주민들은 이제 바울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죽게 되는 것은 살인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사를 불에 떨어 버렸는데 그의 몸은 원주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상함도 없었습니다. 이 놀라운 현장을 목격한 원주민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는 것을 보고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하자 주민들이 바울을 헤르메스,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믿고 숭배할려고 함)
하나님은 멜리데에서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는데 첫번째 이적은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아무 상함도 없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적은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총독/추장) 보블리오의 부친의 질병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보블리오의 초대로 바울과 그 일행들이 사흘동안 그의 집에서 환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안수하자 그가 나음을 얻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섬에 있는 다른 병자들도 와서 고침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표적과 이적은 사도 행전에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 사도 바울의 손을 통해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표적과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되었고 그 결과 수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죄의 노예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표적과 이적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7-18)

그런데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과거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세계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북가주에 있는 한 한인 교회는 일년에 두 세차례 교인들을 훈련하여 선교지로 파송합니다.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이상 현지에 머물면서 현지의 선교사님들과 현지 교인들과 함께 짝을 지어 동네에 들어가 믿지 않는 현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언어도 안 통하고 현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성도들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현지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픈 곳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교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빌어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원주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로마에 입성하는 바울 (11-15)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세 달을 머문 뒤, 항해 하기에 적당한 시기인 2월 말 혹은 3월초가 되었을 때 260여명의 일행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한 배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여정:멜리데-시칠리아 수라구사(3일)- 이태리 반도 최남단 레기온(하루)-보디올(7일)-육로로 압비오 광장-트레이스 타베르네(삼관)-로마)

시칠리아 섬을 경유하여 이태리 반도 보디올에 도착하였을 때 그 인근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만났을 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3년전,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그는 로마 선교를 꿈꾸며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었습니다.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었고, 로마 교회와 바울과는 직간접적으로 관련은 없었지만 바울은 로마를 향한 불타는 마음과, 로마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로마를 방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9-10)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바울이 기도 중에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형제와 자매들을 얼굴을 맞대고 보니,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가득하였을 것이며,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로마 땅에도 존재하고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백부장의 배려로 바울은 일주일 가량 보디올에서 형제 자매들의 환대를 받으며 교제하면서, 길고도 거친 항해의 피로감에서 회복되었고 영적으로도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육로로 로마를 향해 걸어 가다가 로마로 부터 약 7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압비오 광장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리고 그곳으로 부터 약 14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트레이스 타베르네에 이르렀을 때, 바울 일행을 맞기 위해 로마 교회 형제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지체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며칠을 걸어서 바울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헌신한 형제 자매들을 만났을 때 바울은 감격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was encouraged)”(28:15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바울 곁에는그와 동역한 수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선교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고, 자신의 삶을 드려 선교 사역에 직접 동참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 전체를 할애해서 선교 사역에 동참한 소중한 동역자들을 로마 성도들에게 소개하며 그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선교의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기도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기도 편지를 읽으며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정한 시간을 내어 정기적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물질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와 정성을 담아 드리는 물질은 선교의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는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려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선교를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일입니다. 선교 바자에 시간을 내어 동참하고, 건강과 여건이 허락 한다면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님들을 격려하며 현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함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선교만큼 소모적이고 비효과적인 일도 없습니다. 자신의 교회의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요, 교회에 속한 교인들을 위한 것도 아니요,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순종/복종해야만 합니다. 의무감에서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우리는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형제들이 바울을 맞이하러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나왔는데, 본문에 기록된 ‘맞으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판테시스’인데요, 이 단어는 단순히 ‘만나다’라는 의미라기 보다 도시의 대표단, 또는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바울의 로마 입성이 갖는 상징성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발걸음이었지만, 바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 개선문을 지나 입성하는 ‘개선 장군’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울은 세상의 유명한 장군들이나 왕들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종려 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주로 입성하셨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누가가 가졌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사역을 이해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고후 5:7) (보는 것->세상의 관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 가운데 무엇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잠깐 있다 사라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보이지 않는 것에 포커스하여 살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로마 입성은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one small step’ 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one giant leap’(하나의 위대한 도약)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서 충성하고 헌신할 때, 우리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에 ‘큰 발걸음’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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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 본문: 행 27:27-44
7/25/2021 주일 낮 예배

오늘은 ‘영혼의 작가’로 불리는 켄 가이어(Ken Gire)의 책 ‘폭풍속의 주님’(원제:At Peace in the Storm)에 나오는 St. Patrick에 관한 글을 인용함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아일랜드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St. Patrick은 4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십 대 때 아일랜드에 노예로 잡혀 가서 목동으로 일했습니다. 노예 시절 패트릭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주님과 기도에 대한 사랑이 날로 자랐습니다. 스무 살 때 패트릭은 꿈에서 바다를 통해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해안으로 도망친 패트릭은 배를 타고 안전한 영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안한 삶을 살고 있던 패트릭에게 꿈을 통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이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부탁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사제를 거쳐 주교가 된 패트릭은 결국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땅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노예 시절에 알았던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아일랜드로 갔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아일랜드 전역을 다니며 설교했습니다. 전생과 윤회의 교리를 믿고 있었던 드루이드교를 주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대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패트릭은 가장 잔인한 폭풍을 기도로 이겨냈습니다. 패트릭은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이름을 딴 호심경 기도를 거룩한 방패삼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breastplate, 가슴막이)을 붙이고”)

“내 곁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좌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요새에 계시는 그리스도, 전차에 계시는 그리스도, 갑판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입술에 계시는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눈에 계시는 그리스도, 내 말을 듣는 모든 귀에 계시는 그리스도”

패트릭은 그리스도가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노예선 갑판에서 쇠고랑에 묶여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떨고 있는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열네살에 납치되어 살붙이 하나 없는 땅으로 끌려 갔을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인생을 바꾼 항해에서, 인생의 폭풍속에서, 패트릭은 자신과 함께 하셨던 그리스도의 임재를 깨달았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거친 폭풍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해도 보이지 않고 별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소망조차 없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로마행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짐들도 바다에 풀어 버렸고, 배의 기구들도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해 모든 사람들이 탈진하고 굶주려 죽기 일보직전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그들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7:24) 이 말을 들은 바울은 확신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릴것입니다”(27:25-26)

하지만 그 약속의 말씀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지 알지 못합니다. 27절 말씀에 보면 열나흘째(미항을 떠난 지)되는 밤이 되도록 그들이 탄 배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아드리아 바다(Adrian Sea, 이탈리아와 말타와 그레데, 그리스 사이에 있는 바다)에 이르렀을 때 사공들은 직감적으로 육지에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수심을 재어보니 스무길(37미터), 열다섯 길(28미터)정도 되는 것을 확인하고 해안에 가까이 온 줄 알고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사공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은 야밤에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다가 거룻배(구명선)를 바다에 내려 놓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구명선을 타고 도망하려는 것입니다. 계속 배에 있다가는 배가 파손되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 같으니까 안전한 구명선을 타고 야반도주를 계획한 것입니다.

큰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낙심하는 모습입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자포자기 하는 반응입니다. 두번째는 현실 도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공들처럼 내 한 목숨 살기 위해서 고난의 현장에서 빠져 나갈려고 애쓰는 모습니다. 세번째는 믿음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심한 환난으로 인해 낙심하지도 않고,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장에서 도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애쓰며,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땅히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엘라이자 휴윗(Eliza Hewitt)이라는 분은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1887년 필라델피아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녀는 문제 아동을 상담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학생을 조용히 타이르고 있었는데, 그 학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휴잇을 널판지로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로 휴잇은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상반신에 석고붕대를 감고 있어 대소변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였고,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치료 기간이 길어지자 주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던 자신에게 극심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흑인 여성이 흥얼거리며 병실을 청소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짜증썩인 목소리로 “이봐요, 청소하면서 뭐가 그렇게 좋다고 흥얼거려요!”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청소하던 그 여성은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 환경과 형편은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불평을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 즐거워요” 이말을 듣는 순간 휴윗은 수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되는 듯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불평으로 가득했던 휴윗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휴윗은 자신의 교만을 뉘우쳤습니다.

그 후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그녀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또 휴윗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떠 올리며, 휴윗은 사고 이후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했던 삶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교만하여 문제 학생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휴윗은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찾고 원망에서 용서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휴윗은 그 심정을 이렇게 찬송시로 적었습니다.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 에게‘> (원문)
내가 믿는 맘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니, 내게 아무 걱정이 없네
(The trusting heart to Jesus clings, Nor any ill forebodes)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노래하네. 짐을 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But at the cross of Calvary, sings, Praise God for lifted loads!)
삶의 길을 가며 난 노래하네. 주님을 찬양하고 찬양하네.
(Singing I go along life’s road, Praising the Lord, praising the Lord)
삶의 길을 가며 난 노래하네. 예수님께서 내 짐을 들어 주셨으니.
(Singing I go along life’s road, For Jesus has lifted my load)

휴윗은 ‘믿는 맘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니 내게 아무 걱정이 없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낙심하여 고난의 현장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짐을 대신 져주셨고, 그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그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구명선을 타고 도망갈려는 선원들을 보고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당신들이 구원을 얻지 못할것입니다”라고 하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버립니다. 선원들이 없이는 남은 항해를 무사히 마치기 불가능한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백부장과 군인들은 이제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 ‘죄수 바울’의 말을 더욱 신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선원들의 태도와 바울의 모습이 크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선원들은 자기 목숨만 건지기 위해 몰래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환난 가운데 처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폭풍우 가운데 요동하는 배의 키를 잡은 선장의 모습입니다. 폭풍우를 두려워하기 보다 배가 나아가야 할 목표점을 바라보며 배를 운전하는 강인하고 용감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배에 탄 사람이 모두 276명(37절)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날이 새어가자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합니다.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 미항을 떠난 지 열나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여 심히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배멀미로 토할 것 같았기에 음식을 먹지 못하였을 것이며, 심리적으로 심히 낙담되었기에 먹을 기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조만간 육지에 닿게 되고 구조될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4) 그들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배는 상하겠지만 그들의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육체의 고통이 심해지면 식욕 또한 사라집니다. 그런데 마음의 고통과 근심이 가득할 때도 식욕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면 밥 맛이 좋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는데, 마음속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면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밥맛이 없어 못먹습니다. 건강한 식욕, 맛있게 식사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음식을 먹기 전에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합니다.’ ‘축사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케리스테오’인데 성찬(주의 만찬)과 관련해서 사용되기도 하고, 음식 주심에 대한 감사나 일반적인 감사에도 종종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빵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미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음식을 나누어 먹기 전에 먼저 ‘축사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해 미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감사는 미리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의 미래에 행하실 일들에 대해 믿고 미리 감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서로 간에도 미리 감사를 표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성도님이 나에게 베풀어 준 사랑에 감사하듯이, 성도님이(집사님이) 앞으로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님이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 주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피스 메이커로서 가는 곳 마다 평화를 심고 위로를 전하고 기쁨을 전해주니 감사합니다. 미리 감사할 때 나에게도 매사에 감사와 기쁨의 복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밀을 바다에 버리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가다가 배가 드디에 해안가에 걸리게 됩니다. 배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갈 때 군인들이 죄수를 모두 죽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죄수가 헤엄쳐 도망하게 되면 자신들이 나중에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모든 죄수들을 구하시기 위해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백부장은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며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의 물건들을 의지하여 나가게 합니다.

선원들, 바울에 이어 세번째 사람 백부장에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가이사랴에서부터 로마까지 죄수들의 이송을 책임진 로마 군대의 장교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도착하였을 때 항해하기 위험한 시기이니 미항에서 겨울을 나면 좋겠다는 바울의 의견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서쪽 뵈닉스라는 항구로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친 풍랑으로 인해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 그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담대함과 확신에 가득찬 모습은 항해에 경험이 많은 선장이나 다른 뱃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의 마음 속에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제안대로 밤에 도망갈려는 선원들을 보고 군인들을 시켜 거룻줄을 끊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제안대로 모든 병사들과 죄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먹게 합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배가 해안가 모래에 걸렸을 때 죄수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인들이 죄수들을 다 죽이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먼저 내려 육지에 나가게 합니다.

이방인 로마 장교인 무명의 백부장은 이제 바울을 돕는 ‘보호자’가 된 것입니다. 단지 로마 장교로서 죄수 호송의 책임을 다 하려는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로마행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곁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도 하고, 천사를 보내어 말씀을 전해 주시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천부장을 통해 바울이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받게 하시고,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바울에 우호적인 마음을 갖게 하시고 그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갑판에서나, 감옥에서나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하시며,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하시며, 동역자를 보내 주셔서 위로 받게 하시며 기쁨을 나누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나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따라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 사역에 헌신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도움의 손길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빌 1:6) 우리 안에 시작하신 착한 일은 ‘구원의 사역’입니다. 시작하신 구원은 재림 주로 오시는 주님 앞에 다시 설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완성된 구원을 이룰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사야 43:1b-3a)

인생의 항해 중에 배가 파선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 가운데 지날 때에도, 강을 건널 때에도, 불 가운데 지날 때에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배는 손상되었지만 한 사람의 생명도 상하지 않고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항해 중에 파선하는 것과 같은 환난을 당할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원들처럼 내 혼자 살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고난의 현장에서 도피할려고 하지 않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항해 중에 하나님께서는 로마 장교 백부장과 같은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한 것처럼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우리의 인생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온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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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mple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항해
• 본문: 행 27:1-26
7/18/2021 주일 낮 예배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대략 80년 혹은 90년, 100년의 인생의 항해를 하다보면 순풍을 만나 평안한 여행을 할 때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광풍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직장 생활 할 때 97년말에 외환 위기(IMF 구제 금융)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가적인 위기 상황으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직장인들이 구조 조정 명분으로 일자리를 잃고, 자영업자들이 폐업하고,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도 어려움을 피해갈 수 없어서 전체 직원들의 30% 가량을 구조 조정하고,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하기도 했습니다. ‘금 모으기’등으로 온 국민과 기업이 힘을 합해 비교적 빠른 시간에 위기를 극복하기는 했지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았습니다. 누가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예상했겠습니까?

미국도 2007-2008년에, 1930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이후 최대의 경제적 위기였던 ‘금융 위기’를 경험하였습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회사들의 도산으로 촉발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퍼져서 전세계 금융 시장이 경색되고,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모기지 이자율이 치솟아 빚을 제 때 갚지 못한 집주인들이 집을 잃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직장을 잃게 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중산층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야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Covid-19 팬데믹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광풍’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입니다. 어제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코비드에 감염된 사람의 누적 총수가 1억 9천만명이며, 목숨을 잃은 사람이 4백만명이 넘습니다. 미국에서만 62만 4천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감염 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 목숨은 건졌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미국에서만 수십만명은 되리라 짐작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것처럼 바람에 밀려 평안히 순항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은 예기치 못한 풍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행전의 마지막 부분인 27-28장은 사도 바울의 로마행 여정의 기록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가는 긴 여정이었는데,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가이사랴에서 평안히 출발하였지만 얼마가지 못해 광풍을 만나 고생을 하게 되고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믿음의 항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영적 도전을 주는 귀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믿음의 인생 항해를 하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출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먼저 바울의 로마행 여정에 동행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한명의 이름은 2절에 기록된 마게도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입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데미 여신의 신봉자들이 소요를 일으켜서 주동자로 체포된 적이 있는데 그때 바울과 함께 체포된 사람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때 마게도냐로부터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왔던 신실한 일꾼입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골 4:10, 몬 1:24)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로마 감옥에서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네로 치하의 로마에서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은 1절에 “우리”라고 한 단어로 유추할 때 사도 행전의 기록자였던 의사 누가도 가이사랴에 있다가 바울의 로마행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몇달이 소요되는 기나긴 항해 가운데 바울에게 동행자가 있었다는 것이 바울에게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인생의 항해가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고,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며 위로가 되는 동역자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리스다고와 누가 외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 데 그 사람은 죄수들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는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입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인 그는 관대한 사람이어서 배가 시돈에 도착하였을 때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바울이 그곳의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나중에 타고 가던 배가 풍랑으로 파선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군인들이 죄수들이 도망하게 되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 죄수들을 죽이고자 하였을 때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27:43)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합니다.

‘이방 사람 율리오’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손길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무사히 도착하도록 하나님께서 로마 백부장 율리오를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여정 길목 길목 마다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여정을 지도를 참조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이사랴(‘아드라뭇데노’로 가는 배에 승선)-시돈-구브로 해안-루기아의 무라(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배로 갈아 탐)-니도-살모네-미항-뵈닉스로 가고자 하나 광풍을 만나 가우다 아래 거쳐-멜리데 섬에 도착)

본문 말씀을 근거로 믿음의 항해를 하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을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첫번째는,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9-11)
바울을 실은 배가 그레데 섬 미항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시기는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에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양력으로 9월하순에서 10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중해의 이 해역을 항해하는 일은 초겨울인 9월 중순이후에는 위험한 일로 여겨졌고,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1일 이후부터 겨울이 끝나는 3월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20여년동안 세 차례에 걸쳐 소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을 걸어서, 배를 타고 다닌 경험이 있는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근거로 지금 미항을 떠나서 계속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권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장과 선주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미항이라는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북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보내자라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기”(11)때문에 뵈닉스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선장과 선주는 항해의 전문가라 할 수 있었기에 백부장의 선택은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 틀린 결정이 아닌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백부장에게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은 늘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철저히 대비를 하고 준비를 한다고 할지라도 갑자기 몰아 닥치는 자연 재해 앞에 속수 무책인것이 현실입니다. (서부 산불, 동부 허리케인, 유럽 홍수)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의 경험과 지식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다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고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도 고백하기를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고 했습니다.

만약 백부장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바울의 말대로 했다면 죽을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항해를 하는 우리 모두, 사람을 신뢰하기 보다,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기 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향해의 선장되시는 하나님만 신뢰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인생에는 ‘순풍’도 있지만 ‘광풍’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3)
13절 말씀에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출발할 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순풍에 돛 달고서 배 떠나 간다’ 노래처럼 흥겹게 출항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Euraquilo)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는 ‘북동풍’(Northeaster)을 의미하는 센 바람입니다. 엄청난 역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배가 갈려고하는 반대방향으로 강한 바람이 몰아치게 되어 배가 정처없이 떠밀려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십년간 뱃사람으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과 선주도 예상치 못한 광풍이었습니다.

(예화: 2018년 7월, Table Lake at Branson에서의 Duck boat 전복 사고로 17명 목숨을 잃음, 현재 재판 중, 베테랑 선장이었지만 thunderstorm 예보에 주의 기울이지 않음)

우리의 인생 중에도 순풍처럼 평안한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유로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한적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배가 가지 않고 역풍을 만나 반대 방향으로 배가 떠밀려 가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탄 배가 광풍에 밀려 쫓겨 가고 있습니다. 가우디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배 뒤편에 매단 작은배,구명정, 배의 진행과 조종에 방해받음)를 잡아 끌어 올렸습니다. 태풍으로 배가 파선하지 않도록 줄로서 선체를 둘러감았습니다. ‘스르디스’(모래톱)에 걸리지 않도록 연장(돛)을 내리고 그냥(정처없이) 쫓겨 갔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잠잠해지지 않자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절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뱃사람에게 별은 방향을 지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인데 날씨가 흐려 별마저 보이지 않으니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배는 이리저리 표류하며 금새라도 세찬 풍랑에 뒤짚힐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 (살 소망)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을 잘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인생은 목적 없이 떠 다니는 배와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표류하는 배와 같습니다. 이정표가 되는 별도 보이지 않고 살 소망 마저 사라진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시편 107편에 혼돈에 빠진 인생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시 107: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순풍도 있지만 광풍도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인생의 항해 가운데 광풍도 찾아 오기 마련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풍만 주시지 않고 광풍도 허락하는 걸까요?

구원의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교만한 나의 죄를 회개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의 정욕을 구하며 살았던 나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만 붙잡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통중에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십니다.

시편 107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안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8-30)

인생의 광풍 가운데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고요케 하시고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선장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안심할 수 있습니다. (22-25)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소망을 잃어 갈 때, 한 사람이 일어나 서서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선장과 선주, 많은 선원들, 로마로 가는 죄수들을 통솔하고 있는 백부장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많은 죄수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22)
‘안심하라’는 선포는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이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배는 이리 저리 흔들리고 배에 싣고 있는 많은 짐들도 던져 버렸고, 배의 기구들도 버린 상황에서 폭풍으로 인해 배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금새라도 배가 뒤짚혀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선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자신의 경험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롯된 것임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3-24)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가이사 앞으로 인도할 것이며 당신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바울이 마치 선장이 된 것 같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목숨은 바울에게 달려 있다는 말씀이니까요. 주객이 전도되어 죄수 바울이 배의 모든 것을 책임진 사람이 되었고, 선장과 선주, 백부장은 두려워하며 바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하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여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 16:33하 )

또 사도 요한은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바울이 전한 메세지는 결국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배의 선장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배의 키를 잡고 계시며, 배는 파손될지라도 선원들과 모든 죄수들의 목숨을 보존할 것이며, 바울은 결국 가이사 앞에 서게될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 항해의 선장은 우리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배의 키를 내어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이것이 우리가 바울에게서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광풍이 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폭풍을 다스리시고 잔잔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며 배에 물이 차 올라서 배가 금방이라도 뒤짚힐 것만 같아서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 고물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라고 다급하게 외칩니다. 그랬을때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나신 후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였을 때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시니”(막 4:40) 제자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잠시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여호와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제단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을 때도 그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이 살려주심)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그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과 여러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믿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습니까?

풍랑이는 파도를 보고 무서워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는 믿음 가운데 굳게 서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인생의 항해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3가지 교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로,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인생의 항해에는 순풍도 있지만 광풍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 항해의 선장되시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 항해에서 승리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참고: 바울 로마 선교 여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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