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핍박과 복음 전파” (사도행전 8:1(b)-8)

Posted on 7월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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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 “핍박과 복음 전파” (사도행전 8:1(b)-8)

“핍박과 복음 전파”
• 본문: 사도행전 8:1(b)-8
7/19/2020 주일 낮 예배

우리는 지난 주 스데반의 순교에 관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신성 모독죄’로 고발 당하여 적법한 절차도 없이 분노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어 갈때,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청년 사울. 그는 아마도 스데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었던 자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 직후 이어지는 내용을 연결하는 구절로, 의사요 역사가였던누가는 의도적으로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8:1(a))(And Saul was there, giving approval to his death)라고 적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사울이 거기에 있었고 스데반의 죽음을 승인하였다’

사울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그가 그곳에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있게 하신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나님은 핍박자 사울으로 하여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의 피를 토하는 설교를 듣게 하시고,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성령 충만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울을 그곳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겠지만 나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아니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강한 빛으로 나타나셨을 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당시 그가 목격한 강렬한 사건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큰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8장 1절 하반절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대한 큰 핍박의 시작을 알리는 사인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이스라엘 인근, 유럽과 북 아프리카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헬라 문화에서 자랐고, 헬라 말(Greek-speaking)을 했으며, 회당(Synagogue)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비롯하여 초대 교회 일곱 집사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로 짐작됩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면서 히브리 문화에서 자랐고, 당시 히브리 평민들이 사용한 아람어(Aram-speaking)를 구사했으며,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는 구절로 보아, 교회에 대한 핍박이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던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서 성도들을 돌보았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 대한 핍박은 성도들을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흩어지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스페이로’(diaspeiro)인데요, 이 단어는 헬라어 ‘씨앗’(seed)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씨앗을 논과 밭에 흩뿌리는 것처럼 성도들은 온 지역에 ‘흩뿌려지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스스로 뿌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뿌려지게 된’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면서, 핍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초대 교회 성도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디아스페이로’라는 단어에서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단어는 자신과 부모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을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방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디아스포라’ 성도들입니다. 태어나고 정든 고국과 부모 형제를 떠나, 머나먼 이방 나라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입니다. 자의적으로 이동하였든지, 타의적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이주하였든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에 ‘흩뿌리신 복음의 씨앗들’(the scattered seeds of gospel)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성령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핍박을 통해 그들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핍박은 성도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통해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복음이 전파된지 100여년만에, 전체 인구의 약 20%나 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며, 국내에 이만여 교회와 해외에 6천여 교회가 선교에 힘써 미국 다음으로 전세계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국가가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19세기 하반기와 일본 강점기, 한국 전쟁으로 인한 고난과 핍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물리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궁핍함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했고,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 전파를 위해 희생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의 제목을 “핍박과 복음 전파”라고 붙여 보았는데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먼저는 사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지난 주 본문이었던 사도행전 7장 하반부에 두 번 등장하고, 오늘 본문 8:3에 다시 등장합니다. 세 번에 걸쳐 기록된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박해자 사울입니다.

그는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다소 출신으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중 한명입니다. 가마리엘 이라는 대학자 문하에서 엄한 율법 교육을 받았고,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것으로 보아 당시 기득권층에 있었던 가정에서 태어난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헬라 말과 히브리 말(당시 아람어)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학문에 뛰어난 총명한 학자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경건파, 율법 준행),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에 힘썼으며,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의분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현장의 책임을 맡은 자가 되지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3절,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교회 파괴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그는 교회를 진멸하기 시작합니다. (began to destroy, began ravaging) ‘진멸하다’의 원어 (헬, lymaino)는 사자나 곰, 표범등의 야생동물이 먹이의 살점을 뜯어 헤치는 흉포함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사울은 마치 포악한 들짐승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짐승처럼 끌려 나왔고, 그들은 감옥은 넘겨졌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하는 행동이 율법을 보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단중의 이단인 ‘나사렛 교’ ‘그리스도교’를 발본색원하여, 철저하게 그들의 모임과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키는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그러한 열심은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고, 교회를 뒤흔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하늘로 부터 강한 빛으로 인해 땅에 엎드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 때 하늘로 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습니다. 다시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9:5)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핍박자 사울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녕코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실 일 또한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포악자, 죄인중의 괴수 사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실 수 있고, 원하시면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악을 바꾸어 선을 만드시고, 광야에서 샘이 터지게 하시며,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박해자 사울을 전도자 바울되게 하시고, 속이는 자 야곱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살인자, 도망자로 40년동안 숨어 지내던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격이 모나고 배우지 못하고 평범한 어부로 지내던 다수의 갈릴리인들을 택하사, 세상을 복음화하는 위대한 사도로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렘 10:23)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왕들을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영광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두번째 인물은 빌립입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더불어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전도자 빌립’(행 21:8)이라 불리던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자신과 동일한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하였고, 이후 사울에 의한 극심한 박해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과 더불어 복음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전하였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는 지리적으로 북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으로, 정확히 말하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에 의한 사마리아 전도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위해서는 사마리아와 유대와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분노를 가지고 유대인들을 경멸했습니다. 본래 사마리아인들은 B.C. 722년에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주민들을 강제로 포로로 잡아간 후에 이방인들과 결혼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후손이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 대신 이방 나라에서 이방인들을 데려다가 그곳에 이주시켰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 정착민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 근거한 전통을 일부 유지했지만 이방 종교를 흡수해 혼합시켰고, 그결과 사마리아 지역의 종교는 유대교나 이방 종교와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충실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성경의 하나님을 거역하는 부패하고 부정한 종교로 간주했습니다.

바벨론 유수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성벽 건축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거절 당했고, 그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성벽 재건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수세기동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을 오염시키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배교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증오심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B.C. 130년에 하스모니아 왕가의 유대인 왕 요한 헤르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성전은 그 후로 재건되지 못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여전히 그리심 산이 합법적인 예배 장소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천명도 채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 수가 성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 조차 하지 않았고, 남쪽 유대인들이 북쪽 지역으로 갈때 사마리아 지역 땅을 밟지 않기 위해 우회하여, 요단강 동편으로 가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 지역으로 빌립 집사가 복음을 들고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의도적으로, 계획적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금지된 구역’(Red Zone)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 집사는 그 장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말씀의 약속대로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일곱 집사 중 한명이었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종과 종교와 문화와 편견의 장벽을 뛰어 넘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다다음주에 함께 나눌 본문인 8장 후반부에 보면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 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 또한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였기에 가능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명령했고, ‘성령이 그를 이끌어 수레로 가까이 가라’고 하셨고,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 이후,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가자’ 홀현히 내시로 부터 사라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한 빌립 집사를 통해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자,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도들을 통해서도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던” (행 5:12)것처럼 빌립 집사의 사역을 통해서도 표적과 이적이 일어납니다.

7절에 보면,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게만 초자연적인 권능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신도 중 한명이었던 빌립 집사를 통해서도 ‘사도적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 (고전 4:20)고 하셨습니다. 복음 전파와 동시에 나타난 초자연적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증거하는 사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12명의 선택받은 사도들만을 통해서 이루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사도와 더불어, 성령 충만한 스데반과 빌립 집사를 통해서 크게 확장 되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이후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바울 또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직접 선택한 열두제자중 한명은 아니었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핍박자로 청춘을 불태웠지만, 그를 변화시키셔서 능력있는 사도로 사용하심을 보게 됩니다.

빌립의 복음 전파로 인해 성중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결과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8: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악한 영이 쫓겨가고, 질병이 치유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사회가 건강하게 됩니다. 변화된 공동체, 변화된 개인의 삶의 모습은 “기쁨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인생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인생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평화 평화로다 하나님 주신 평화 이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날 구원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날마다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 가운데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찬송과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웨인즈빌 침례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박해자 사울과 전도자 빌립의 상반된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중의 괴수였던 사울을 변화시켜 위대한 전도자로 만드시는 분이시고, 성령 충만한 빌립 집사를 통해 원수처럼 여긴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인생의 걸음이 우리에게 있지 하니하며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고백하며,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 손에 붙들려 하나님 나라위해 쓰임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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