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제자 아나니아 (사도행전 9:10-19)

Posted on 8월 16, 2020

Exemple
sermon date 2020-08-16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 예배 – 제자 아나니아 (사도행전 9:10-19)

“제자 아나니아”
• 본문: 사도행전 9:10-19
8/16/2020 주일 낮 예배

역사상 유명한 인물 곁에는 그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훌륭한 조연 역할을 했던 2인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주연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그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위대한 조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상 5장에 보면 아람이라는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존귀함을 받은 권력의 실세였던 나아만 장군에게는 치명적인 핸디캡이 있었는데 그는 나병 환자(한센병)였습니다. 불치의 병이자 사람들이 혐오하는 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에게 이스라엘에서 노예로 잡혀 온 소녀가 그 여주인(나아만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왕하 5:3) 이스라엘에서 아람의 포로로 잡혀 온 소녀에게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에 대한 정보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주인의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노예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가게 되고,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몸을 담구어 씻었을 때 나병으로 인해 썩어가는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노예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그 소녀는 무명의 한 사람이었고 천하디 천한 노예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의 한 장면을 완성하는 조연으로 쓰임받게 하십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무명의 조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 되게 하는 예수님의 최초의 기적 사건에 쓰임받았던 종들입니다.

당시 혼인 잔치에서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어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로 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정결 예식에 사용하던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지금 포도주가 떨어져서 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이 큰 불편함을 겪고 있는데,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물이 가득한 항아리를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니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았던 마리아는 그 종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할 것을 말하였고, 그 종들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들이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물로 된 포도주”는 최상급 포도주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요 2: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 그 무명의 하인들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함께하신 가나의 혼인 잔치는 최초의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수종들던 무명의 하인들은 그들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훌륭한 조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부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 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해 공부하며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과 누가 복음을 기록한 의사 누가 역시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조연으로서 쓰임받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열 두명 가운데 포함된 자도 아니었고, 헬라말을 하는 이방인었습니다. 헬라 문화 속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의사였던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바울의 두번째 전도 여행부터 마지막 로마 투옥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함께 한 신실한 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떠나간 후에도 끝까지바울 곁에 남아 있었던 충실한 친구였습니다. (딤후 4:11)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박해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되기까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쓰임받았던 조연들이 있었기에 그 놀라운일들이 가능하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위대한 조연들 중에 또 한명의 이름은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나니아’이며, 다른 한명의 이름은 다음 주에 함께 나누게 될 본문의 주인공 ‘바나바’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신학자는 ‘아나니아’를 일컬어 ‘기독교 교회의 잊혀진 영웅들 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헬라어 ‘아나니아’는 히브리어 ‘아나니야’에서 파생된 것으로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다’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행 5장에도 탐심으로 인해 성령을 속임으로 심판을 받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주인공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고, 행 23:2 에는 제사장 ‘아나니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나니아’는 오늘 본문과, 나중에 바울이 예루살렘 감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회심 사건을 언급할 때 한 번 더 등장(22:12)하는 것 외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성경에 더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행 22:12에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잘 지켜 행하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그의 경건한 삶을 통해 주위 모든 유대인들로 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인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9:10 에서는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것이며, 다메섹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신실한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 아나니아’ 그가 누구인지, 그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는 헬라어로 ‘마테테스’인데 ‘배우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만타노’에서 유래된 명사입니다. 제자를 의미하는 영어 ‘disciple’도 ‘배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 ‘disco’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한마디로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자’를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쓰이는 ‘제자’라는 단어는 1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명의 제자들, 사도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따라 사는 크리스찬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 시간을 함께 하면서 예수님으로 부터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삶을 통해서 배우는 자,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 삶의 방식, 말하는 습관 조차도 스승되신 예수님처럼 변화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의 정의가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 따르는 자’라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 아나니아’는 어떠한 자이었기에 과연 예수님의 제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그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자였습니다.

10절에 보면 다메섹에 있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나니아는 평소에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였던 자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주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반응하였던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 모세, 사무엘 처럼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섬기던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이 그를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실 때 처음 두번까지는 엘리 제사장이 부른다고 생각하여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세번째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10)이라고 응답합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 3:1) (In those days the Word of the Lord was rare; there were not many visions.)

온 사회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영적 지도자가 깨어 있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지 않게 되고, 환상(하나님의 비전) 또한 나타나지 않게됩니다. 이러한 영적 기근의 시대에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어리거나 영적 분별력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하고 기도에 늘 깨어 있을 때에는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나를 통해 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제자 아나니아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이었기에 환상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속히 반응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아나니아는 자신의 의지와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제자였습니다.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에게 직가(Straight street)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은 강하고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시력을 잃게 되어,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유다의 집으로 오게 되었고, 삼일동안 보지도 못하고 금식 기도 하는 중이었습니다.

사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이었기에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 기도 시간에 하루에 세번씩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일년에 한번 속죄일에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할 정도로 기도와 경건 생활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울은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준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기도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의 비유에 있는것 처럼 ‘자기 의’를 세우고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는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삼일간이나 금식하며 하나님께 드린 사울의 기도는 분명 달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기도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신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기도하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또한 그 이전에 ‘태양보다고 강한 빛’에 거꾸러져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환상중에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합니다.” (13)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주님도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저도 여러 성도들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전해들었는데 그는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악한 자입니다. 어떻게 저보고 그런 사람을 찾아가라고 하십니까?’라는 말이지요.

계속해서 그는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한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습니다.” (14)

사울이라는 자는 지금 이곳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찾아내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부터 체포 영장(위임장)을 가지고 이곳에 온 위험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나니아에게는 당연히 포악한 사울에 대한 거부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에하나 잘못되어 자신도 체포될 뿐만 아니라 다메섹에 있는 크리스찬 공동체에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변명하지 말고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울은 주님께서 택하신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5)

‘그릇’은 헬라어로 ‘스큐오스’인데 ‘도구, 장비, 그릇’의 의미입니다. 사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과 권력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께서 친히 ‘택하신 도구’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사울의 일생은 자신의 성공과 안일을 위해 달려 온 ‘자신의 그릇’을 채우기 위한 일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복음을 위한 택한 그릇’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그가(사울)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1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은 자들을 핍박하는 사울이 변화되어,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는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과 핍박에 대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사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주님의 그릇이며,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더 이상 핑계 댈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사울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은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더 이상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 두려움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순종의 길은 때로는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나가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순종의 길은 노아처럼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입니다. 순종의 길은 모세처럼 세상의 최고 권력자 바로 앞에 서야하는 두려움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과 고집과 계획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아나니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번째로 아나니아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품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주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울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였을 때 아나니아는 순종하여 사울이 머물고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그가 한 일은 사울에게 안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주님께서 환상 중에 사울에게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안수하면서 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형제 사울아!” (Brother Saul!) 아니니아에게 사울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나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는 다메섹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울은 박해자였고 사악한 자였고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구절입니다. 그는 마지 못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시력을 잃고 삼일간 금식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한 영혼을 위로하며, 그를 자신보다 더 위대한 사역자로 세우기 위해 동역의 마음으로 나가갔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품는 관대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대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을 대할 때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는 우리에게 예수 믿는 공동체,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2:44-46)

초대 교회의 유무 상통하는 삶을 오늘날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초대 교회의 중요한 원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모습입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주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과오를 범치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더 크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사역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품었고 그를 세워주었습니다.

안에 충만하신 성령은 그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기도할 때 동일하게 사울에게도 충만하게 부어짐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된 저와 우리 성도들은 아나니아가 가졌던 관용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고, 겸손히 새로운 영적 지도자를 세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이민 교회들과 다수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나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라, 먼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먼저 대접 받을려고 하고, 나의 것은 주지 않을려고 하고, 먼저 다가가 섬기기를 꺼려 합니다.
과거의 전통과 관습은 성경의 권위 이상으로 엄중하게 생각하지만, 매일 새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둔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편견과 아집, 우리 스스로에게 익숙한 비성경적인 가치관의 틀을 과감히 깨뜨릴 때, 성령은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울을 새로운 사역자로 세우는데 쓰임받았던, 그리스도의 제자 아나니아를 통해서 참된 제자의 삶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나의 계획과 주장, 가치관을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품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였기에 박해자 사울을 찾아가 ‘형제 사울’로 그를 부르며, 안수하여 기도함으로 성령으로 충만케 하였고, 주님이 택하신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은 조연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름없이 빛도 없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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