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기적”
•본문: 사도행전 16:20-40
1/24/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빌립보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사건 중에 마지막 사건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지난 주에 나누었던 두 번째 사건, 즉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게 되는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19절을 보시면, 점을 잘 쳐서 자신들에게 많은 수익을 가져다 주던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게 되자 여종의 주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사업이 망하게 되었고 ‘수익의 소망’을 잃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가 난 그들은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 낸 장본인들인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관리들의 손을 빌어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0절에 기록된 ‘상관들’ 은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빌립보 도시의 행정과 사법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두 명의 치안 판사 혹은 집정관을 말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그들에게 고발한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유대인들인 이 사람들이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20)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1)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점쟁이 비지니스가 망하게 됨-였는데, 다른 이유를 둘러대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반 유대주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유대인들이 로마 식민지인 이곳에 와서 도시를 혼란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안정을 중요한 통치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심각한 죄목에 해당된다고 생각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이방 풍속(불법 종교)을 전한다고 고소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이방 종교의 포교를 금하는 로마법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 보면 ‘보통 관례상 전파하는 종교가 법률과 로마 생활의 관례를 범하지 않는 한, 즉 그가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범죄에 연루되지 않는 한 그것을 시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인들은 영리하게도 자신들의 원래의 이유를 숨기고 다른 이유들을 내세워서 지방 공무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두 명의 치안 판사들은 바울과 실라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람들을 시켜 ‘불순 분자’ 유대인 두 명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옷이 벗겨지는 수치를 당했고, 매로 맞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유대인들로 부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로마 당국자들로부터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고 (루스드라에서 이방인들에 의해) 한 번 돌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빌립보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강가 기도처에서 준비된 영혼인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고,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여심으로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되었고 그 뿐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유명한 점쟁이였던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로마 식민지 빌립보에서 복음이 거침없이 증거되나 싶었는데, 바울 일행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상관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그들을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는데, 그들이 갇힌 감옥은 그곳에 있는 감옥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감옥’이었고 그들의 발에는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차꼬는 두 개의 긴 나무토막에 구멍 두개를 뚫고 거기에 두 발목을 고정시켜 쇠로 된 자물쇠로 채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꼬를 죄수들의 발목에 하나 채우고, 다른 하나는 손목에 채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중범죄자들도 아닌데도 중죄인들에게 채우는 차꼬를 채우고 사람들이 문 입구를 지키고 이었습니다.
아마도 등에서는 매로 맞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렸을 것이고, 온 몸은 멍이들고, 매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든 형편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헌신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따뜻한 환영은 커녕 수 많은 매질과 깊은 감옥에 갇힘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면 보통 우리는 낙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신음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따질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희들에게 이러한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주님께 순종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이곳까지 왔는데 왜 저희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왜 이런 고난을 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밤중에 깊은 감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두 명의 전도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낙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아마 이런 찬양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지키리로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얼마나 크게 찬송하고 기도하였던지 그 감옥에 있던 다른 죄수들도 다 들었다(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것이 더 벗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찬송과 기도는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큰 지진으로 인해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기적은 바울과 실라안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때에 그들안에 있던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는 다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예기치 않은 큰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면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사업이 갑자기 망하거나 믿었던 사람으로 부터 사기를 당하면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시련은 우리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고 때로는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하기도합니다.
갈릴리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났을 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힘들때 자주 하는 말이 ‘아이고 죽겠네’이죠. 제자들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주님 어찌 천하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십니까?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이고 죽겠네’라고 하지 말고 ‘모든 문제의 해답은 주께 있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문제만 바라보고 있으면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았는데, 그들이 놓친 것은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서 차꼬에 차여 있으면서 환경을 탓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감사하면 감사할 조건이 생긴다”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찬송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찬송하면 기쁨의 노래가 솟아납니다”
찬송과 기도는 연약한 우리들안에 자리잡고 있는 불신앙과 염려, 근심, 원망의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또한 영적인 무기력증으로 인해 약해지는 우리 심령에 찬송과 기도가 더욱 절실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찬송과 기도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케합니다.
역대기하 20장에 보면 유다 여호사밧 왕이 통치하던 때에 모압과 암몬, 마온 족속이 유다를 공격해 오게 됩니다. 강력한 군대로 무장한 연합군을 맞서 싸워 전쟁에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직감한 여호사밧은 “두려워하며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였습니다”(대하 20:3) 백성들에게 금식 기도를 선포한 이후 자신도 여호와의 전 뜰 앞에 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며, 열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대하 20:17)
이에 여호사밧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들에 외칩니다.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20)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20:22) 적군들끼로 서로 죽이는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그들이 전멸합니다.
여호사밧도 인간인지라 강력한 적군이 쳐들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염려와 근심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성가대의 찬송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야고보 기자도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6)
“너희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5:14-15) 성도님들 중에 질병이 있으신 분들, 수술하게 되신 분들은 기도를 요청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부탁은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요 부끄러워 숨길것도 아닙니다. 당당히 기도 요청을 하시기를 바라고 온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적은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것이 벗어졌을 때 죄수들 중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27절에 보면, 감옥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간수는 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로 생각하고 칼을 빼어 목숨을 끊을려고 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가 탈옥하면 그를 지키던 간수가 그 죄수의 형량만큼 형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간수는 책임감이 투철한 로마의 퇴역 군인 출신이어서 자결함으로써 수치와 고통을 덜고자 했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할때에 캄캄한 곳에서 들리는 음성에 그는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질문합니다.
“선생들이여(헬. 퀴리오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
이 질문은 인간이 던져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영벌로부터의 구원은 누구로부터 얻는 것입니까? 인간이 찾아야할 길과 진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삶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로마인 간수는 두려워 떨며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그가 평생토록 가지고 살았던 질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였고, 퇴역한 이후 감옥의 간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 하루 그냥 성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감옥터를 뒤흔들었던 큰 지진은 그의 영혼을 송두리채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가난해졌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휘어감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간수는 “어떻게 하여야”(행위)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였는데, 전도자의 대답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구원 받는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내가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전도자들은 간수에게 뿐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 날 밤 온 가족이 믿고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의 터가 움직이고 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것이 풀어지고, 그 와중에 죄수들이 한 명도 도망가지 않은 것도 놀라운 기적인데 더 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진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된 것 또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어릴 때 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된 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게 된 것도 아니요 나의 의지로 예수님을 믿게 된것도 아닙니다. 죄악 가운데 거하며 죄로 인한 형벌로 영벌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세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발을 당하여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과 핍박은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불행한 일, 고통스러운 일, 시련과 환난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으로서 부터 선을 만들어 내기도 하시며, 시련으로부터 정금같은 믿음을 만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짐을 통해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시며, 환난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유럽 선교가 시작되었던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한 구원의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그의 온 집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귀신들린 여종도 고침을 받게 되었고, 감옥의 간수와 온 집이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빌립보 교회의 창립 멤버로 신실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맞고 차꼬에 차여 깊은 감옥에 갖히게 되었으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처럼,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늘 찬송하며 기도함으로 우리 인생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는 큰 지진을 가져와 옥의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것이 풀어지게 된것처럼,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세상 근심과 염려, 원망과 불평의 쇠사슬이 풀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는 삶을 통해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