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 21:1-11, 사 53:5)

Posted on 3월 29, 2021

Exemple
sermon date 2021-03-28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 설교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 21:1-11, 사 53:5)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3/28/2021 종려주일 예배
• 본문: 마 21:1-11, 사 53:5

프랑스 파리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개선문이 ‘에투알’ 개선문입니다. ‘엘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1805년 12월 4일 프랑스 군대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오스텔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건축토록 한 승전 기념물입니다. 높이가 50M, 폭 45M나 되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에게 영광을 주고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는 선전물이었습니다. 옛 로마에서 승전한 장군과 군대가 들어올 때 개선문을 만들어 환영하던 그 전통을 그대로 따라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것은 그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1806년에 착공되었지만 그가 살아 생전에 완공되지 못하고 1836년에서야 완공되었고, 1840년에 세이트헬레나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죽은 그의 유해를 싣고 온 운구 마차가 그 웅장한 개선문 아치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로마 시대때나 19세기 프랑스에서도 이처럼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과 그 병사들을 환영하는 의식은 동일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장군들과 황제의 화려한 입성과 비교해 볼때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입성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세상의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분명 ‘승리자의 입성’이었고 ‘진정한 왕’의 입성이었습니다.
종려 주일 아침에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 겸손한 왕의 입성 (1-6)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4번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다른 방문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제자들에게 여러번 예언하신대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처럼 희생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스스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 벳바가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베다니-에 보내시며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가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십니다. 당시 남의 나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왕족과 랍비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퀴리오스)는 단순한 주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말하면 그 주인이 내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귀 주인은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순종한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과 마차같이 위엄있는 것을 타지 않고 나귀/나귀 새끼를 타시길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5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스가랴 9:9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정복자나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자로서가 아니라 온유하시고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면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또한 나귀는 다윗 왕가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습니다. 삼하 15-16장에 보면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감람산을 넘어 나귀를 타고 피신을 갔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는 감람산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귀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위해 이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죄인들을 위해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초라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나귀를 선택하신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 20장 하반부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위해 예수님께 로비를 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한 명은 주의 우편에, 한 명은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라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5-28)

우리들도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섬김을 받으려하기 보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질려고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세워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낮아지고 서로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 영광의 주님의 입성 (7-9)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고 그 위에 예수님이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로마 제국 전역에서 운집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차를 보고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예수님을 열열히 환영하였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고 나무가지로 길에 깐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신다는 의미의 퍼포먼스입니다. 열왕기상 9장에 보면 예후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친구들이 그렇게 예후를 환영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겉옷은 사람들의 전재산과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벌 밖에 없는 겉옷을 보면 그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겉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재산과도 같은 겉옷을 길에 펼친 것은 왕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

유대인들은 시편 118:25-26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오 구원하소서’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음역으로, 내용상 간청이지만 찬양의 표현으로 굳어져서 예수님 당시에는 “~께 찬양을 드린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즉 ‘다윗이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가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가 주님을 찬송합니다’ 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성전으로 나아가는 왕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시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할 때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 왕에 비유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왕 중의 왕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알았고,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 정도로 알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고 성전을 모욕하는 이단아로 낙인되었습니다.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여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선동가로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복되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는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우리의 왕께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려야 합니다. 겉옷을 길에 펼치며 왕의 입성을 축하한 백성들처럼 우리들도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 95:6-7)

2천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재림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이 타는 백마를 타고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계 19)

요한 계시록 4장에는 우리가 천국에서 드려질 천상의 예배의 모습이 밧모섬에 유배중인 사도 요한의 환상을 통해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 이십사 장로들과 각종 생물들이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찬송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우리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호산나 호산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왕이신 주님을 경배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늘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 구원자 그리스도의 입성 (사 53: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한마디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골고다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일주일 동안 행하신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일에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월요일에는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수요일에는 쉬시고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되십니다. 금요일 새벽까지 불법 재판을 받으신 후 금요일 오전 9시경에 골고다 언덕위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경 운명하십니다. 이후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시고 주일 이른 새벽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중죄인들이 지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나를 위해 조롱과 모욕, 배반과 수치를 당하시고, 침뱉음과 채찍에 맞으시고, 양손과 양발에 대못에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 쓰시고, 허리에 창을 찔리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원합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파사에서 사용하다가 로마 제국에 도입되어 주후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대개 노예나 외국인 반역자들의 사형에 사용되었습니다. 손목과 발목에 약 20cm 크기의 대못이 박히면 몸무게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집니다. 손발의 신경이 다 끊어지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늘어져 있으니까 가슴의 근육이 당겨져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호흡을 할 수 없으니 온 몸에 산소가 부족함으로 몸 전체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그 뿐 아니라 손과 발에서 흐르는 출혈로 말미암아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극악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잔인하고 끔찍해서 로마 시민에게는 결코 행해지지 않는 처형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은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 스러울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신명기 21:3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저주와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예수님이 허리에 창에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상함을 받으시고 정신적으로 상함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다닌 불순종의 자녀이며,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창에 찔리시고 배반 당하시고 수치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을 상속자의 지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화평케 되었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원수처럼 여겨지는 이웃들과도 화목케 되었습니다. 샬롬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보통 십자가 형벌을 받는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십자가형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나무 기둥에 묶인 채로 끝에 뾰족한 납 덩어리와 뼛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으로 맞았다고 합니다. 이는 극도로 잔인한 형벌이었는데,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스런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고통으로 부터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대신 그 고통을 담당해 주시니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한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는 크고 작은 질병 가운데 있고, 때론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의 모든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나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깨끗케 하옵소서!

찬송가 143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립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번 한 주간 이러한 찬송가 가사와 같은 고백을 담아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종려 주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겸손하고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경배와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그리스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에게 나를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는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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