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각오의 신앙
• 본문: 사도행전 21:1-14
4/25/2021 주일 낮 예배
‘일사각오’라는 말은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담당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일사각오’라는 말은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인 고 주기철 목사님이 1935년 9월, 모교인 평양 장로교 신학교 사경회에서 전한 설교의 제목입니다.
고 주기철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과 더불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사님입니다. 주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고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4월 21일, 4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신사는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의 신을 제사하는 사당이자, 일왕이나 나라를 위해 순국한 군인(전범)들과 조상들의 위패를 모아놓고 숭배하는 곳입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못이겨 카톨릭과 장로교를 비롯해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신사 참배를 공식 결의하였지만, 주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할 수 없다며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참고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교단차원에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유일한 교단은 침례교회입니다. 1935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선포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1944년 5월 10일에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침례교단에서는 매년 5월 10일을 신사참배거부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940년 2월, 7개월간의 옥고를 겪고 잠시 풀려나서 그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전한 설교에서 그는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는데 제목은 ‘5종목의 기도’이었습니다. 4번째 그의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번째는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주기철 목사님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에서도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생명 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제국의 중심부 로마를 거쳐 땅끝이라 여긴 스페인까지 전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여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도 참조)
*밀레도-로스-로도-바다라-(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고)-두로-돌레마이-가이사랴-예루살렘
수리아 두로에서는 7일간 머무르며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제자들은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레마이로 출발합니다.
육로로 가이사랴에 이르러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에게 예언을 합니다. 아가보는 약 15년전에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닥칠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매고 있는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예언합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실로 사람 아히야가 솔로몬 왕국이 어떻게 분열될 것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새 옷을 12조각으로 찢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애굽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어떻게 포로 되어 끌려갈지를 보여주기 위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 동안 지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performance 를 통해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듣게 된 가이사랴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울며 간청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그의 단호한 결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두로에서 제자들이 바울을 만류할 때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고, 가이사랴에서 선지자 아가보도 “성령이 말씀하시되”라고 하면서 예언을 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예언과 금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한 메세지는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을 고난에 대한 경고/예언의 메세지이지 바울의 사명을 막는 ‘금지’의 메세지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도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도바울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였기에 그가 겪을 고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권면한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경고는 성령께서 하신 것이지만 간곡히 말한 것은 인간적인 요청”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 바울이 앞으로 겪을 고난에 대해 알려 주었지만 바울의 일사각오의 신앙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고백을 듣고는 가이사랴의 모든 제자들은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은 주기도문의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의 원대로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구하는 기도인줄 믿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대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엘리야 선지자는 모든 백성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왕상 18:21) 새 번역은 “여러분이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겠습니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믿고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따르도록 촉구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정복 전쟁을 다 마치고 지파별로 땅을 다 분배한 이후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세겜에 모아놓고 고별 설교를 합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4-15)
엘리야처럼 여호수아처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신앙 생활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히 전진하는 삶입니다.
바사 제국의 왕궁에서 아하수에르 왕의 총애를 받는 왕후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인 유대 민족이 멸절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금식하고 왕의 규례를 어기고 목숨을 걸고 왕앞에 나아가며 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스 4:16, “If I perish, I perish.”)
만약 에스더가 자기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고 평안한 삶을 살려고 했다면 이런 무모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스 4:14) 라는 모르드개의 말을 잘 새겨듣고 결단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죽게 된다면 죽을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에스더의 위대한 결단을 통해서 하만의 음모가 드러나고 유다 민족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사각오의 신앙을 지켰던 성경에 기록된 또 다른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다리오 왕의 신임을 받는 총리 다니엘을 음해하기 위해 다리오의 신하들이 계략을 꾸밉니다. 30일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규례를 공포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하던 습관대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결국 신하들의 고발로 인해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다니엘의 신앙을 평가합니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으면 죽이리이다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한 다니엘을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셔서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왕 고레스 시대까지 귀하게 쓰임받게 하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니엘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고, 이방 왕 다리오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로 하며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보상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헌신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예언하신 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잡혀 심문을 당한 이후 로마 총독의 명령에 의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갈 때에 수 많은 로마 군인들이 호위하여 가게 됩니다. 그는 로마에서 2년간 가택연금 상태로 있으면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전승에 의하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마게도냐를 재방문하였고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A.D. 67-68년경 두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된 이후 재판을 받고 처형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우리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습니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단호한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15년전 한국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를 방문하여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한재성 선교사의 간증을 요약하여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한재성 선교사님은 한국 기독교 침례회 선교부 파송으로 1997년에 중앙 아시아 카자크스탄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비자 문제로 카작을 떠나 4년간 필리핀에서 사역하다가 카작을 잊지 못해 2004년 4월 다시 카작으로 입국하여 사역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04년 9월 13일, 한 선교사님이 두 딸을 학교에 라이드 해주러 간 사이에 두 명의 강도가 한 선교사님 아파트에 침입하여 혼자 집에 있던 한 선교사님의 아내 김 진희 선교사의 목숨을 빼앗아갔습니다. 최근에 정착한 한 선교사집에 정착금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돈을 훔치기 위해 아파트 관리원을 가장하여 집에 침입하였고, 김진희 선교사의 손과 발을 묶고 테이프로 입을 봉하고, 돈을 내놓지 않자 갖은 고문을 하였고 결국 쇠파이프로 머리를 내리쳐 죽게 하였습니다.
한재성 선교사님은 나중에 <땅 끝에 남은 자>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에서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2004년 9월13일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 열쇠로 집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소리가 나질 않았다. 살펴보니 전기선과 전화선이 잘려져 있었다. 다시 열쇠를 넣어 문을 열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안쪽에서 괴성과 함께 문이 내 쪽으로 덮치듯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쇠파이프가 내 머리를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막았지만 나의 왼쪽 머리는 터졌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괴한들이 떠나고 난 후, 아내의 모습은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처참했다. 손과 발이 뒤로 묶여져 있었고 얼굴은 옷가지 가려져 있었다. 옷가지를 들추는 순간, 아내의 머리에서 흐른 엄청난 양의 피가 거실 바닥에 쏟아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맥박을 확인했으나 뛰지 않았다. 가슴을 짚어 보았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제발, 제발, 아내를 살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아내가 숨 쉬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하나님 제발…’
장례식을 마칠 무렵 갑자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 아내를 받았느니라.’ ‘오, 주님. 그러셨군요. 제 아내 주께드리오니 받으소서.’나는 두 손을 들어 하나님께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올려드렸다’”
사랑하는 아내를 자신이 섬기던 현지인들에 의해 잃고 슬픔에 잠기기도 했지만 한재성 선교사는 아내가 피를 뿌린 그땅을 품고 현지인들을 섬기기 위해 지금도 카자크스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재성 선교사야 말로 이 시대의 사도바울처럼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을 빼앗은 그 민족을 미워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한재성 선교사는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분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웨인즈빌 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없어도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한 번 뿐인 인생을 복음을 위해 살고,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