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 이고니온 전도: 전파되는 은혜의 말씀 (사도행전 14:1-7)

Posted on 11월 15, 2020

Exemple
sermon date 2020-11-15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 설교 – 이고니온 전도: 전파되는 은혜의 말씀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 전도: 전파되는 은혜의 말씀”
• 본문: 사도행전 14:1-7
11/15/2020 주일 낮 예배

우리는 지난 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한 말을 반박하고 비방하며,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 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서 가게 된 지역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부터 남동쪽으로140키로 떨어진 이고니온(Iconium)입니다.

이고니온은 지금은 터키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인 코냐(Konya)인데요, 지정학적으로 시리아에서 고대 그리스 도시인 에베소와 로마로 가는 대로가 있는 관문입니다. 무역상들이나 여행객들도 많이 방문했던 도시로서 고대에도 번성한 지역이었습니다. 비시디아 산맥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이고니온 평야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밀을 생산하는 유명한 곡창지대였습니다.

이고니온 단어의 의미는 ‘형상’ ‘초상’이라는 뜻인데, 이 도시이름에서 우리가 지금 컴퓨터를 사용할 때 마우스를 움직이면 바탕화면에 나타나는 그림기호를 가르키는 ‘아이콘’(icon)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이고니온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어서 전도자들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귀담아 듣고 유대인들과 많은 헬라인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이고니온 전도 사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중심으로 핍박 가운데서도 계속 전파되는 은혜의 말씀에 관해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원어에 보면 1절 말씀은, ‘아우토’ (‘같은 방식으로’(as usual))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하였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두 사람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회당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구약에 정통한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였고,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에게 구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풀어 가르침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했고, 경건한 이방인들에게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되심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1절에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의 사도됨에 대해 확실히 믿고 있었고, 바나바 또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은 아니었지만 사도적 권위와 능력을 가진 인물임을 변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원래 사도(apostle)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르키는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르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도는 함께, 한 팀이 되어, 연합하여 선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울의 영적인 멘토가 되어 그를 예루살렘 교회에 추천해 주고, 지지해주고, 다소에 칩거 중이던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가이드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이후 사울이 선교 사역에 주도권을 가지고 이방인 선교의 전면에 나설 때에도 그는 뒤에서 기도로 후원한 탁월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복음을 위해 희생한 사람, 마치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해 부름받는 침례 요한처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의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두 사람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예수님 믿는 형제들(신자들)에게 악감을 품게 합니다.

‘악감을 품다’라는 단어는 ‘괴롭게 하다’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고 볼 수 있고, 그들에 대해 적의와 악감을 품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과거나 지금이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을 불어 넣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서 믿는 자들을 물리적으로 박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두 사도는 오히려 담대하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3절은 원어로 보면 ‘운’(oun)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그러므로’(therefore) ‘따라서’(so)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박해가 있으면 위축되고 도망하게 되는데, 두 사도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오래 머물며 주의 복음을 전합니다.

세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짧은 시간 머물며 복음을 전했지만 이고니온에서는 동일한 핍박이 있었는데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초기의 핍박은 상대적으로 강도가 세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 전파가 상당한 기간 가능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박해의 강도가 세어져 두 사도를 돌로 쳐서 죽일려고 달려들었을 때, 그들은 인근 지역으로 피하게 됩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고니온이 당시에 지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곳에 오래 머물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의 두번째, 세번째 전도 여행시에도 이고니온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을 격려한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땀과 눈물을 쏟은 곳이기에 아름다운 열매도 있었습니다.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회심한 자들로 인해 나중에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갈라디아서가 이고니온을 포함한 남부 갈리디아 지역 성도들을 위해서 쓰여진 사도 바울의 서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두 사도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전하지 않고, “주를 힘입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를 의지하여’(with reliance upon the Lord)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이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완악한 영혼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케 하시고, 말씀을 받게 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구한말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조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조선의 땅에 묻힌 선교사님들 중 한 분을 소개합니다.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이하 인용문)
테네시 의과대학을 개교 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학교의 교수로 남아 달라는 학교 당국의 제안을 만류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땅 끝이 어디인지 찾다가 조선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준비한다. 선교 본부에 조선으로 파송을 요청하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1884년 장로교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일본으로 갔다가 알렌과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한 후에 조선 땅을 밟는다. 알렌의 뒤를 이어 2대 광혜원 원장을 맡아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음을 맡는다. “조선과 조선사람들을 더 ..더..뜨겁게 사랑하고 싶소. 그동안 다하지 못한 것…”병원의 조수들, 집안일을 돕던 일군들 모두 불러 모았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다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죽음을 맞는다. 정부에서는 양화진 언덕을 허락해준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처음으로 묻힌다. 양화진은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의 아내와 자녀들도 계속해서 한국의 선교를 위해서 삶을 드렸다.

존 헤론 선교사님은 자신의 지식이나 재능을 의지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고, 주님을 힘입어, 주님을 의지하여 구원의 복음, 영생의 복음을 우리 민족에게 전한 순교자입니다.

세번째 주목할 단어는 “담대히”입니다.

유대인들의 적대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담대한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주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경을 바라보기 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때론 거친 폭풍 가운데 흔들리는 배위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처럼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그들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어쩔 줄 몰라 했습니까? 흔들리는 배위에서 곤한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그들은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풍랑이는 거친 바다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올라가며 순례자들이 노래하였던 시편의 고백처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날마다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두 사도가 오래 동안,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이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도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십니다. 표적과 기사는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며,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됨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행전 여러 곳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 중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사역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 집사의 사역 가운데 표적과 기적이 나타났고, 그 밖에 여러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행 2:4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표적’(세메이온)은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스스로 보여주시는 기적이며, ‘기사’(테라스)는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적 자체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것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육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표적과 기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게 되고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에 배가 파선되어 멜리데라는 섬에 가까스로 구조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을 피우다가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그의 손을 물고 있는 것을 원주민들이 보게 됩니다. 모두 다 이제 바울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더 아무 이상도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을 신이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추장)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는데 바울이 들어가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되고, 섬에 있는 다른 병자들도 고침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은 없지만 그곳에 있는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일은 지금도 선교지에서 동일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결국 하나님께서 두 사도들을 통해 하시는 일은 “자기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시는 일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능력있게,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입니다.

왜 복음(기쁜 소식)을 “자기 은혜의 복음”이라 하였을까요? 복음은 주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도적으로 행하신 구속 사역의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은혜(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안되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뿐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도록 내버려 두신 분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독일에 야누스 코르작이라는 소아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의사를 그만두고 유대인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독일군에 의해 고아원 아이들도 수용소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아이들이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자, 자신의 사비를 털어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며 아이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1942년 강제 거주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학살 당하기 시작했고, 아이들 192명도 Treblinka라는 수용소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코르작은 그 아이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도 그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여 기차를 타고 수용소로 가는 아이들과 함께 하며 그 아이들을 달래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기차역에 도착하였을 때에 수용소 장교가 그에게 도망칠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기차를 처음 타서 무서워하면 누군가 그들의 손을 잡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난 결코 아이들을 떠날 수 없다네.” 결국 그는 192명의 아이들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억, 수십억, 아니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고난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게 죽으신 위대한 사랑의 스토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죽을 이유가 없었던 코르작이라는 독일 의사가 유대인 고아들과 함께 죽어간 것처럼, 죽을 이유가 없었던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인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은혜는 십자가 위에서 죄악된 세상 가운데로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은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인 우리에게로 지금도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Amazing Grace)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두 사도가 전한 은혜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두 사도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던 사람들 – 이방인, 유대인, 관리들-은 모두 합세하여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율법을 어기고 참람한 말(신성 모독)을 하였다고 돌로 쳤으며, 예수님도 동일한 죄목으로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도망하여(피신하여) 루가오니아 지역에 있는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핍박과 환난 중에도 중단되지 않고 아시아 지역에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고니온에서의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의 반대와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오래 머물며, 주를 힘입어,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했던 두 사도처럼, 우리가 처한 환경 가운데서 주를 힘입어, 주를 의지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두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케 하심을 믿고, 죄인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며,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온 세상으로 흘러 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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