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 어둠에서 빛으로 (사도행전 26:1-23)

Posted on 7월 4, 2021

Exemple
sermon date 2021-07-04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 설교 – 어둠에서 빛으로 (사도행전 26:1-23)

• 본문: 행 26:1-23
7/4/2021 주일 낮 예배

신약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180도 다른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분봉왕 헤롯 아그빕바 2세 앞에서 전한 자신의 ‘신앙 간증문’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는 사도 행전에 모두 3번에 걸쳐(9장, 22장)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회심은 초대 교회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구약 율법에 심취하였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말할 만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 사울은, 성전을 모독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나사렛 출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초대 교회)을 박해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생각하고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위임장)을 받아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을 돌아 다니면서 그들을 처벌하고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더우기 그들에 대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가서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26:9-11) 여기까지가 그의 인생의 B.C. (Before Christ)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뒤짚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성도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협과 살기(murderous threats)가 등등하여’(9:1) 그들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기 위해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부터 214 Km가량 떨어진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낮 12시가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의 동행하던 사람들을 둘러 비춥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다 땅에 엎드러졌을 때, 하늘로 부터 히브리 말(Aramic)로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씀은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루는 다른 부분(9장, 22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씀입니다. ‘가시채’(goad)는 동물을 몰 때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를 말하는데 끝부분에 쇠붙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다’는 당시 민간에 널리 사용되던 속담을 인용한 것인데,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가는 짐승이 반항하기 위해 뒷발질하는 것이 쓸데 없는 행동인것 처럼 ‘쓸데없는 저항’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강한 빛으로 그에게 임하셨고,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하는 행위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순간 공포에 휩싸였고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26:15)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였는데, 강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사울이 자신을 박해하고 있다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14),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

이 구절을 통해서 핍박받는 교회, 고난 중에 있는 교회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복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고난받고 핍박받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눈물을 보고 계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된 성도들은 지금도 신앙을 지키는 것 때문에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그 길에서 그 빛의 광채로 인해 볼 수 없게 되어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22:11)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엘리트 중의 엘리트요 율법에 흠이 없을 만큼 도덕적인 사람으로 자부했던 사울은 강렬한 빛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교만과 악행을 꺾으시는 주님의 손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치 앞으로도 나아 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다메섹에서 유대인들로 부터 칭찬받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위해서 그를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문을 열게 하셔서 핍박자 사울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 주시고 그를 형제로 받아 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의 목적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22:14-15)

예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찾아 오셔서 그를 변화 시키신 목적은 모든 사람 앞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복음 전도자 바울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내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셨는지,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사울에게 들려주신 말씀 중에 그를 찾아 오신 목적(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26:16-17)

사울이 본 일과 장차 그에게 나타날 일에 종과 증인을 삼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종’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요, 로마의 전함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예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인데 사형 집행이 유예되어 대신 중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노 젓는 일만 할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울을 찾아 오시고 그를 ‘종과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의 기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나의 육체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고후 5:15)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갈때,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참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썩어질 것들에 얽매여 죄에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갈 때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는(갈 2:20) 복된 인생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은 한 마디로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중에 18절 말씀은 사울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 포함) 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복음의 의미, 예수 믿어 구원 얻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사울을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I am sending you to them to open their eyes and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to God, so that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 and a place among those who are sanctified by faith in me. (Acts 26:18, NIV)

1) 그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2)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power)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3) 그 결과(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4)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들 가운데 기업을 받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근거로하여 복음의 본질에 대해 상고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 복음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고 영생을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정통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4-16)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보고 들을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천국을 보게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부터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7살때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영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였고, 11살 때 선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18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권고로 해군에 입대하여 소위 후보생이 되었으나 엄격하고 고단한 선상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탈영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체포되어 옷을 벗겨 매를 맞고 면직되고 아프리카 노예 상선에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끔찍한 15개월간의 노예 생활 이후에 그는 노예 무역선의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748년 3월 10일 노예 무역선을 타고 항해 하던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그는 과거의 신앙 고백, 부르심, 경고, 방탕한 생활, 노예선에서 구출받은 사건등을 생각하며 “만약 내가 오랫동안 대적했던 성경 말씀이 사실이 아닐까?” 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노예 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돈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1750년 2월, 어머님의 친구의 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하게 되었고, 리버풀에서 조수 측량사로 근무하면서 여가 시간에 성경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고 이후 시리아어,라틴어, 불어까지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발견였습니다. 1764년 오올리에서 목회자로 청빙받아 사역을 시작하였고 15년동안 목회에 전념하였습니다.

존 뉴턴은 노예 무역선의 선장과 같은 부도덕한 일을 하던 그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찬송시를 적었습니다.

“Amazing grace How I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존 뉴턴의 눈을 뜨게하였고, 그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복음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 8:12)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적으로 흑암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요 1:9) 하지만 어둠 가운데 거하던 유대인들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요 1:5)

하지만 참 빛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고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요 8:12) 마태는 이사야서 9장 1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큰 빛’으로, ‘사망의 땅과 그늘에 거주하던 자에게 비취던 빛’ 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5-16)

복음은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어둠의 일을 좋아하며,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빛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redemption), 곧 죄 사함(forgiveness)을 얻었도다” (골 1:1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power of darkness)에서 건져내어(rescued)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 동안 노예로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노예되어 육체의 소욕(desire)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아들의 나라 즉 영생과 진리와 평화의 나라로 옮겨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흑암=사탄과 동일어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믿기 이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엡 2:2) 살았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을 말합니다. ‘지금 불순종 하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2:2)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 천국, 구원, 심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안개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쾌락과, 이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며 살게 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추깁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라고 속삭입니다. 십자가를 버리고 영광의 면류관에만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좁은 길, 진리의 길을 걷지 말고, 넓은 길, 편안한 길을 걸어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안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서”(엡 6:10) “마귀의 간계를 대적해야 합니다.”(엡 6: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안에서 기도와 간구로 깨어 구함으로 대적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 살던 우리를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3.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고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선행을 많이하고 구제를 많이하고, 심지어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죄인이며,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롬 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를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의 ‘죄’(하타)는 ‘(과녁을) 빗나간’ ‘무지한’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에 못미친다는 뜻입니다. 상대적인 죄가 아니라 절대적인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인간의 속성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두려움과 불순종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이 사는 세상에 살인이, 미움이, 전쟁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고, 이웃과 원수되게 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만드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시기 수천년, 그 이전의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구속사)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구원자)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메시야는 죄 가운데 있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 제물(화목 제물)로 드려질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월절’(Passover)은 가장 큰 명절이요 축제일입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고집스러운 바로 왕과 애굽의 우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마지막 재앙은 모든 동물의 초태생과 가정의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로의 가정을 비롯하여 애굽의 모든 가정마다 죽음의 심판이 임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던 고센 땅에는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고 그곳을 뛰어 넘었다고 해서 유월절이라 명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뿌린 집마다 “그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셨다”(출 12: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성경적 용어로 대속 제물, 화목 제물-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예수님)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심을 믿으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의롭게 되는(칭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로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4.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얻게 합니다. ‘기업’은 구약 성경에서는 ‘땅’을 의미했지만,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유산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믿는 자들은 보이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육신의 장막은 무너지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고후 5:1)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mansion)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

또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성경의 약속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잠자는 첫 열매가 되신 것 처럼,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것입니다.” (고전 15:52)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 갈 때, 날마다 천국의 소망, 영생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복음의 본질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 복음은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우리의 눈을 뜨게하여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 복음은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 예수님을 통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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