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행 21:27-40
5/16/2021 주일 낮 예배
여러분, 네덜란드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튜울립이 생각 나기도 하고 풍차가 떠오르지요. 네덜란드는 ‘낮은 땅’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네덜란드는 전 국토의 ¼ 정도가 해수면보다 낮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예로부터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하는 지역이 많아, 홍수로 부터 자신들을 지키고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 댐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척지가 국토의 1/5 정도나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척지를 만드는데 풍차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네덜란드에 풍차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3세기경인데 당시에는 방아를 찧는데 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규모가 커져서 밀가루를 만들거나 기름을 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물을 빼내는 관개 배수용으로 풍차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산업 혁명때 증기 기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네덜란드에는 11,000개가 넘는 풍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풍력 발전에 사용되는 세 날개 풍력 발전기는 네덜란드 풍차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것입니다.
풍차를 통해서 네덜란드사람들의 지혜를 엿 볼수 있습니다. 어려운 자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결과 풍차와 같은 작품이 발명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지요.
이처럼 환경적인 장애물과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오히려 그 고난을 디딤돌로 삼아 번영의 결실을 맺는 개인과 나라들의 사례를 우리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만큼 외세로 부터 침략을 많이 당한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혹자는 930여차례나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역사학자는 5천년 한민족 역사에 90회 이상된다고 합니다. 외세의 수 많은 침략에서 생존한 민족이다 보니 그 어떤 민족보다도 강인한 민족이 된것입니다. 특히 근대 역사 가운데 일본의 35년 식민 통치, 3년간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화는 서양에 비해서 백년이상 늦은 1960년대에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불과 40-50년만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였고, 외국 선교사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백여년만에 전세계에 2만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외세의 침략, 식민통치, 전쟁이라는 고난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온 국민이 희생하고 노력한 결과 경제적 번영과 선교의 열매를 얻게 된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자신이 처한 척박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한 예가 수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 혹은 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30년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의 40년 생활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목자로서 보낸 40년의 시간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영적 지도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제자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만사형통할 것이다. 사업도 잘되고 건강의 축복도 받고 자녀들도 성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생각과 믿음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품에 안고, 등에 업고 키우듯이 주의 품에 품어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것처럼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그들의 떡반죽 그릇이 차고 넘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축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고난이 한꺼번에 닥치기도 합니다. 평생 모았던 재물을 순식간에 잃기도하고, 가족을 잃기도하고,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갖히기도하고 불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뜻(계획)이 있슴을 알아야합니다. 흔히 ‘변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모난 성품을 다듬어시고,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한 사람만이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는자가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달은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 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난의 훈련을 통해 그들이 철처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는 백성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2-3)
오늘 본문 말씀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게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게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악한 무리들의 소동 (27-30)
바울은 이미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도 무리들의 큰 소동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고,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이후 곧장 수리아로가는 배를 타지 못하고 마게도냐(북쪽 내륙지방)를 거쳐서 돌아가게 된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맞아 고린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선상에서 바울을 해할 간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바울은 환난과 결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것은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결례 의식과 더불어 서원한 네 사람을 위하여 결례 의식에 따른 비용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들은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오해를 풀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위한 양보’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시아에서 온 성난 유대인들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고 외치기를 바울이 유대인들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인(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더렵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전은 헤롯 성전을 말하는데, (*지도에서 보는 바와같이) 성전 구역은 크게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전 내 구역이 있고 이곳은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이며, 이스라엘 남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그 앞 봉헌대 지역은 여인의 뜰이었습니다. 그 외부가 이방인의 뜰인데 이방인들이 그 울타리를 넘어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게 되면 로마시민이라 할지라도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방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금지된 구역들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이방인들에게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가면 죽음의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된 공고문이 바깥뜰과 금지 구역들을 분리시키는 장벽에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29절 내용처럼 그들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이 정한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바울을 스데반처럼 합법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돌을 던져 죽일려고 작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자신이 율법을 어기고 할례과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결례 의식을 행하고 서원한 네 사람의 결례 의식 비용까지 담당한 바울이었습니다. 자신이 성전을 모독할 의사도 없었고 실제로 모독하지 않았는데 유대인들로부터 오해를 사서 핍박을 당하게 된것입니다.
• 천부장을 사용하심 (31-36)
분노한 폭도로 변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려는 그 순간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예루살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알려집니다. 당시 로마는 예루살렘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하여 안토니아 요새라는 로마군 수비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수비대의 최고 책임자가 글라우디오 루시아라고 불리우는 천부장이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높이가 약 25미터로 성전보다 높이 있어 성전안을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북쪽에 있는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천부장이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소동이 일어난 현장으로 달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만약 천부장 일행이 조금 늦게 도착하였더라면 바울은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고위 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바울을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 로마 군대의 천부장의 손길을 사용하셔서 성난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을 구출해내십니다. 에베소에서도 큰 무리의 소동을 진정시키고 바울을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낸 사람은 에베소의 고위 관리였던 서기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이방사람들조차 사용하고 계심을 보게됩니다.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예언의 성취, ‘환난과 결박’)무리들에게 바울이 누구이며 그가 무슨일을 하였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일관성이 없는 말로 대답하자 천부장이 소동으로 인해 진상을 파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인해 군사들에게 들려서 요새안으로 급히 들어갑니다.
• 백성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은 바울 (37-40)
안전한 영내로 들어가면서 바울이 천부장에게 말할 권리를 얻고자 할때에 바울에게 헬라말을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헬라말을 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더러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명을 이끌고 감람 산으로 간 애굽인 거짓 선지자가 아닌지 묻습니다. 약 4년전에 한 애굽 출신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하여 4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서, 자신의 명령 한 마디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질 것이며, 그런 다음 그들이 로마의 수비대를 쳐부수고 그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총독 벨릭스는 군대를 파견해 수 백명을 도륙했는데, 그 지도자는 도주해버렸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도주한 애굽 거짓 선지자가 아닌지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며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부장에게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합니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요새의 높은 층대 위에 서서 유대 백성들에게 아람어로 복음을 증언하게 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기 전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감옥(2년)에 있는 동안 모두 4번에 걸쳐 복음을 전합니다. 첫번째는 유대 백성들에게, 두번째는 유대 종교와 사법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세번째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마지막으로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앞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 사건들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눈이 멀게 된 사울을 영접하고 안수를 주게 된 아나니아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것이며,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친히 권면한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 전하기를 힘썼습니다. 고난 중에도 그는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소동과 폭행중에도 바울을 보호하시며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천부장과 같은 이방인 로마 군인을 통해서 바울의 생명을 폭도들로 부터 구해내시고, 소요를 일으킨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바꾸어 선을 만들어 내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형들의 모함과 시기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린 요셉의 생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나,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던져졌을 때에도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 대신이 되고, 그 형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꿇어 엎드렸을 때에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후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5,7-8)
요셉은 자신을 애굽의 종으로 팔았던 형들에 대한 미움의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경험한 인생의 모든 굴곡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4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그가 당한 고난과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선한 섭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의 신앙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처한 고난과 환난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계획 가운데 나를 연단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보게 하시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웨인즈빌 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나를 통해서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섭리가 증거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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