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본문: 행 6:1-7
6/7/2020 주일 예배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며 공부하면서 초대 교회의 시작과 확장, 고난과 핍박,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셨던 인물들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원리)은 오늘날 현대의 모든 교회가 배우고 본받아야할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고 외치고 있고, ‘초대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초대 교회가 행한 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내의 갈등의 해결 방법과 위임(역할 분담)의 원리입니다.
먼저 교회내의 ‘갈등 해결 방안’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5장까지 말씀을 공부하면서 초대 교회가 직면하였던 내외적인 어려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고 그들은 옥에 갖히고 채찍에 맞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셔서 주의 천사들을 보내 옥문을 열고 그들을 옥에서 이끌어 내기도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외부적인 핍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구원자)’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위선과 거짓의 영이 초대 교회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부부의 죽음으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은 수년간 평온함 가운데 성장하고 있던 초대 교회내의 내부적인 이슈가 발생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그룹이 있었는데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이후 자의적 타의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지역에 흩어져 살던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대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된 유대인들이라 짐작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지역에 거주하였고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헬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하였고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정통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평민들의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히브리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열두 사도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그룹에 공존하고 있던 초대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헬라파 유대인들 중 과부들이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음으로 인해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에 준행하기 위해 구제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마다 도움이 필요한 지역 거주민들을 위해14끼를 먹을 수 있는 돈을 지급해 주는 ‘Quppah’ 라는 주간 구제 사역과, 매일 매일 먹을 것이 부족한 비거주자와 단기 체류자들을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여 음식을 배달해 주는 ‘Tamhuy’ 라는 매일의 구제 활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크리스찬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유대인들의 구제 사역을 따라서 공동체내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데 힘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인것은 아니었겠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를 집행하던 사도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던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애굽 군대로 부터 구하여 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고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하며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필요를 구하여야 했지만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반복하였고 그 댓가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원망과 불평이 싹트기 시작하였지만 사도들의 지혜로움으로 말미암아 더 큰 문제로 발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먼저 열 두 사도는 모든 제자(성도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공동의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사도들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즉 공동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문제들은 소수의 리더들이 결정하기 보다 전체 회중에게 알리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참여할 때 회중은 공동체의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책임과 역할을 맡게됩니다.
2)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회중에게 제안합니다.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소홀히하고 ‘접대’(또는 ‘재정 출납’, 디아코네인 ‘시중들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너희(회중)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은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접대(구제)하는 사역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겠다’
3) 온 무리는 사도들의 제안에 기쁨으로 동의하고 지혜를 모아 7명의 섬기는 자를 택하고 사도들 앞에 세웁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7명(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은 모두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로 보아 그들 모두 헬라파 유대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소위 ‘통큰 양보’를 한 것입니다. 구제 사역 전부를 소외 되었던 헬라파 유대인들 중 신실한 성도들이 감당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나 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성숙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리와 권한을 주장하기 보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나의 주장, 나의 뜻만 관철시킬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양보하는 성숙함을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없는 존재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야하는 자입니다. 섬기는 일이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4)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합니다.
회중이 선택한 7명의 일꾼들을 사도들 앞에 세웁니다. 초대 교회내의 영적 질서를 보여줍니다. 모든 회중이 참여하여 지혜를 모아 7명의 일꾼들을 선택한 이후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영적 지도자들에게 일꾼들을 천거합니다.
영적 지도력을 부여받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온 교회에 대하여 7명의 일꾼들이 교회를 대표하여 구제 사역을 담당하도록 확증하고 선포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비한 능력이 있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동체내의 영적 질서를 존중하여 영적 지도자들이 회중 앞에서 기도하고 안수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영적인 질서를 존중하고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안에 영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훼손되면 교회는 건강하게, 능력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크게 두 번째로 ‘역할 분담’ (위임)의 원리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2절 말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를 근거해 볼 때 문제가 발생할 즈음에 예루살렘 교회내에서 사도들이 구제 사역의 책임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Apostle)은 말 그대로 ‘보내심을 받은 자’,즉 복음 전파를 위해 주님께서 택하시고 세상 가운데 보낸 자들인데, 초대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그 대부분의 일들을 그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정적인, 관리적인 착오가 발생되기도 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누락된 것 또한 의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행정적인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짐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 내에 발생된 문제로 인해 사도들의 직무가 보다 분명해 지게 되었고 그들은 본연의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본연의 직무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4절)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려야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했기에 기도에 헌신하여야 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에 보면 느헤미야가 유대 총독으로 두번째 예루살렘에 와서 행하였던 개혁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랫만에 돌아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혼인하여 율법을 어겼음을 보고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분리하였습니다. 또한 십일조와 다른 예물의 저장실로 마련된 성전의 방을 차지하고 있던 대적 도비야의 세간을 다 밖으로 내어 던지고 청결케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한 일중에 하나는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여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한 것을 발견하고, ‘레위 사람들을 불러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고’ (느 13:11), 즉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끔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는 바로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헌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제 사역과 다른 행정적인 사역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의 primary duty(task)는 ‘기도와 말씀 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이 구제 사역과 같은 행정적인 일에서 자유롭게 될 때 그들은 본연의 사역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온전히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의 원리에 근거하여 배우게 되는 것은 목회자(사역자)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해야하며, 다른 행정적인 일들이 그들의 주요한 업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서 구제 사역을 전담할 7명의 사역자들이 선택받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습니까?
3절 말씀에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야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늘 깨어 있는 자들, 육신의 생각과 소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아 성령의 뜻에 따라 행하는 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충만한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지혜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지혜가 있다는 의미는 믿음에 근거하여 실제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고 맡은 일들을 효과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충만한데 문제 해결 능력이 없고 자기 방식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려고 한다든지, 소위 ‘하나님의 음성’에만 의존할려고 하는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르긴해도 7명의 일꾼들은 믿음도 확실했고 구제 사역을 잘 할 수있는 기술과 재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로 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인격과 성품이 부족하여 늘 사람들과 갈등하고 싸우고 상처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성령의 열매가 삶 가운데 드러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말씀에 녹아있는 성도는 삶 가운데, 인격 가운데 너거러움과 배려와 양보, 사랑과 인내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7명의 일꾼들은 교인들로 부터, 이웃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걸맞는 착한 성품의 사람들이어야했습니다.
이러한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구제’(1절), ‘사역’ (4절) ‘접대’(2절)입니다. 1, 4절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디아코니아’ (사역, 섬김, 봉사)이며, 2절 ‘접대하다’는 단어 또한 이와 어원이 같은 ‘디아코네인’(섬기다, 시중들다)이라는 동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7명의 선출된 일꾼들을 일곱 집사라 칭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집사’라는 직분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집사’라는 직분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빌 1:1, 딤전 3장)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원래 의미는 ‘일꾼, 수종자, 섬기는 자, 사환’이라는 의미입니다. 어원은 ‘디아코니아’ ‘디아코네인’과 동일합니다.
초대 교회의 구제 사역을 위해 선택받은 7명의 일꾼들은 한마디로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waiter’들입니다. 고급 식당에서, 연회에서 단정히 차려입고 수건을 두르고 손님들의 테이블을 오가며 섬기는 이들을 연상하면 될것같습니다.
2절 ‘접대를 일삼는 것’ (wait on tables)이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나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은 성도들은 교회내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인정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자들이며, 교회의 식구들을 먼저 섬기며 돌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주의 만찬을 행하시기 전에, 스승이신 주님은 친히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와 스승으로 이렇게 행하였으니 너희도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는 ‘섬기는 자’들입니다. 7명의 일꾼들이 구제 사역을 위해서 섬기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섬기는 자’들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 시간과 물질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서 교회에서의 모임이 축소되고, 성도의 교제가 사라지고, 선교와 봉사의 사역이 stop 된 것 같습니다. 이럴때일수록 ‘섬기는 자’로 부름받은 우리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의료 혜택이 열약한 선교 현장에서 선교 사역이 일시 중단되어 답답함 가운데 지내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주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님들이나 이웃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직면한 내적인 문제 해결 방법과 역할 분담의 원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지혜롭게 원망과 불평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주도하되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며 칭찬받은 7명의 일꾼들을 택하였습니다. 교회내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양보와 배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본연의 업무인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게 되었고, 지혜롭고 성령충만한 일꾼들은 구제 사역에 충실히 봉사하게 됨으로 모두가 ‘제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7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지혜롭게 해결되고, 사도들과 사역자들이 본연의 사역에 집중하게 되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퍼지게 되었고, 성도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게 되었고, 심지어 유대 종교의 리더라 할 수 있는 제사장들 중 다수가 ‘그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웨인즈빌 침례교회도 아름다운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일꾼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은사를 따라 섬기는 자로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