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 복음을 위한 양보 (사도행전 21:17-26)

Posted on 5월 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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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date 2021-05-09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 설교 – 복음을 위한 양보 (사도행전 21:17-26)

•본문: 행 21:17-26
5/9/2021 주일 낮 예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분명한 정체성과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가 그리스도인들의 그것들과는 배치되는 경우가 많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윤리 규범과 도덕율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실제로 추구하는 삶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입니다. 공동체를 위하기보다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 살기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천국, 영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생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고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자를 일컬어 ‘어리석은 부자’(Fool Rich)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택하는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하지 말고 좁은 길, 험한 길을 선택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만하는 ‘길’(the Way)은 성공과 안전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the way of Cross)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바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4b-1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아야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살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NIV.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The Message” 성경(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화에 너무 잘 순응하여 아무 생각없이 동화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대신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속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거기에 응하십시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는 늘 여러분을 미숙한 수준으로 끌어 낮추려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여러분에게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시고 여러분안에 멋진 성숙을 길러주십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세상 속에서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가져야하고 또한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해야하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 판단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방 문화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이 직면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성경적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끼리 송사나 주의 만찬이나 은사들과 같이 교회내의 문제들 뿐 아니라 고린도라는 이방 도시 가운데 살고 있는 고린도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판단해야하는 교회 밖의 문제들-예를 들면 음행, 결혼,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전 8장 전부를 할애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 이교 제단에 드린 제사 음식 중 남은 음식은 제사장과 드린 자와 그의 친구들이 신전 축제에서 먹거나 식육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자신들이 그런 고기를 먹는다면 이교 숭배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거를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by 팀 켈러)
1) 예배의 원칙: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8:6) 우상 숭배는 결단코 피해야합니다. (고전 10:14-18) 또한 우상 숭배하는 행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상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자유의 원칙: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8:8) 음식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상으로 섬기는 신은 실체가 없는 가짜 신이므로, 음식 안에 우상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10:25)고 합니다.
3) 사랑의 원칙: a) 만약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믿는 자들에게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권리)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8:9) “만약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8:13)
b) 만약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9:19)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9:12)
c) 만약 그것이 허용된 관습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적 성장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자유를 행사하지 말아야한다. (참조: 크리스찬 의사 결정 가이드 도표)

이 도표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사결정을 할때 참조하면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사도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문제 앞에서 의사결정을 할때에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지혜롭게 판단하여 의사결정을 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고합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후 바울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 가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수 만명이 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그들은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듣게 된 소문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고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금한 것이 아니라 표피만 자르는 외형적 할례-할례는 마음에 해야-를 반대한 것입니다.
할례 문제에 관한 바울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였고, 이방인이었던 디도는 복음의 원칙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할례를 행치 않았습니다. 할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필요하다면 할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수 만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은 것은 당시 상황을 짐작해보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초대 교회 사도와 성도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종교를 만들거나 개종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먹기를 거부한 사건이나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바울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자리를 피한 것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도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틀에 매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적개심을 가진 수 만명의 유대인들로부터 보호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인 중에 서원한 네 사람을 데리고 함께 결례(purification rite)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바울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서원한 네명은 일시적으로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나실인은 일정 기간, 또는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약한 사람을 말합니다. 헌신한 기간동안 나실인은 포도주나 독주를 금해야했고(민 6:3),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으며(민 6:5), 시체를 만지면 안되었습니다. (민 6:6-8) 만약 어쩔수 없이 시체를 만지게 되었다면 장기간의 정결 예식을 행해야했습니다. 즉 일곱째날에 자기 머리를 깎고, 여덟째날에는 산비둘기 두마리와 집비둘기 두마리로 제사드려야 했고 그 후 헌신의 기간을 다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민 6:9-12)
야고보는 바울에게 서원한 네 명과 함께 바울도 결례를 행하고-이방인 지역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부정함을 면하기 위해- 네 사람의 결례 의식에 따른 비용을 대신 지불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는것과 제사장에게 바칠 제물-비둘기 8마리, 네 마리 양-은 상당한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부담스런 제안이었고,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순순히 기쁜 마음으로 응합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6)
바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울은 율법 그 자체는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됨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야고보의 제안대로 율법에 기록된 결례 의식을 행한 것은 단지 복음 전하고자 하는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아직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연약한 믿음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족하지 않기 위해 유대인인 그가 율법의 요구에 스스로 복종한 것입니다.
이전에 행 15장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내린 결론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나 율법의 멍에를 매게하지 말고, 단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우상 숭배, 음행, 피, 목매어 죽인것를 금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원칙)은 타협하면 안되고 반드시 지켜야하지만, 비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In essentials unity, non-essentials liberty, all things in charity)”( 루퍼투스 멜레니우스)
바울은 누구보다도 원칙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바리새파의 지도적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구별된 자’)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금식, 정결 규례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613개로 분류하고 그 율법을 한개라도 어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구약의 율법 뿐 아니라 장로(이전의 율법 스승)들의 유전까지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였던 바울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변화되어 복음 안에서 ‘융통성있는’(flexible)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원칙주의자’ 바울을 ‘관용과 포용의 사람’ 바울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준과 원칙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잣대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한계와 문제점은 바로 율법의 형식을 준수할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율법의 참정신을 잃어버린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것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자로 고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의 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칙주의자’임을 자랑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러보내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실수와 허물을 책잡기 보다 ‘허다한 허물을 덮는 사랑’을 베푸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된다면 나의 시간과 물질, 나의 고집, 나 안에 가득찬 자기 의를 희생하는 우리가 되어야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을 듣고 그와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는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소위 ‘통큰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가 결례를 행하고 서원한 네사람의 비용을 부담한 동기가 유대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핍박을 면하기 위함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양보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된 것을 자랑하였고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 9:3)라고 할 정도로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사도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안에서 자유한 자였으나 스스로 율법에 복종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을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이웃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머니 주일’입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며, 자녀들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기도와 눈물로 섬겨주신 어머니들에게 또한 감사와 큰 박수를 드립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떤 어머니로 기억되시기를 바라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어머님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함이 풍성한 어머니’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어머니’로 기억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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