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본문: 사도행전 17:16-34
02/14/2021 주일 낮 설교
사도 행전에는 많은 20여개의 설교문과 연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한 설교와 연설, 변증은 11개 가량 되는데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전도 설교는 사도 행전의 다른 설교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덴(아테네)에 거주하는 헬라인들, 신화와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증거한 복음 설교라는 점에서 다른 설교와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로 부터 쫓아 온 유대인들로 부터 핍박을 받아 급히 몇몇 형제들의 도움으로 급히 배를 타고 그리스 반도 남쪽에 위치한 아덴(아테네)으로 피하게 됩니다.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함께 사역하고 있었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두고 혼자 아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덴이 어떤 도시인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아덴은 B.C 5세기경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과 같은 철학의 대가를 배출한 곳으로, 당시에도 정치적인 권력은 잃었지만, 철학, 문화, 예술 등 헬라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소와 더불어 세게 3대 대학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아덴은 수많은 신전들, 사당들, 신상들, 제단들로 가득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거대한 금과 상아로 된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상의 번쩍이는 창 끝은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 다른 곳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의 상들, 주피터, 비너스, 머큐리, 바카스의 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17:16) ‘격분하다’(paroxyno)는 졸도나 간질 발작(paroxysm)에 쓰이는 의학 용어로서 ‘노하게 하다, 성나가 하다, 화를 돋구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속이 뒤집어 진’것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아덴 시내를 거닐다가 온갖 우상으로 뒤덮힌 도시를 본 후에 그의 마음속에 의로운 분노가 치밀러 올랐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의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는 동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북왕국이 사마리아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또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습니다.’ 즉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 대해 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울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영광과 찬송을 우상들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 바울은 속이 끓어 올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상 숭배자들에 대해 이러한 마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피조물에 불과한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고, 사람이 만든 조각상이나 신화에 나오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이 가졌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바라 보면서, 황금 만능주의와 뉴에이지 사상, 포스트 모던니즘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바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을 떠난 이 시대와 세상에 대하여 ‘의로운 분노’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가졌던 마음의 고통과 안타까움이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먼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터(marketplace)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며(reasoned)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하며(disputed) 복음을 전하였고, 지식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
오늘 설교는 바로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다가 그들에 의해 붙잡혀서 아레오바고라는 곳에 가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 설교입니다. (뉴욕 맨하튼 리디머 교회, 팀 켈러 목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강가에서, 감옥에서, 장터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피쿠루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당시 대표적인 두 철학 체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에피쿠로스(Epicurus, 주전 341-270년)의 후학들이 세운 학파로서 삶의 주된 목적이 쾌락과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행복은 순간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만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지만, 바울 시대 무렵 좀 더 감각적인 사상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유물론자들이나 쾌락주의자들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 주전 320-263년)의 후계자들로서 사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고 자신의 자족과 자립을 깨닫고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전성기에는 몇가지 훌륭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바울 시대에는 거만한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다!”) 이런 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오늘날 뉴에이지 추종자들이나 범신론자들과 일맥 상통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서서 복음을 전한 아레오바고는 문자적으로는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아레스는 전쟁의 신(로마, Mars)입니다. 이후 아레고바고는 법정이나 회의가 열리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가 도시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아레고바고 회의는 종교와 도덕 분야에서만 권위를 행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의 법정, 의회와 같은 곳에서 그것에 모인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보기 전에 전도 대상자들인 아테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몇가지 기록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가득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하자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new teaching)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17:19)라고 하며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갑니다. 21절에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the latest ideas)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복음 설교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22-31)
바울의 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23절은 서론,24-29절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 존재됨에 대해서, 30-31절은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론 (22-23)
서론에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일컬어 “너희를 보니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칭찬과 경멸의 내용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종교적이고 헌신적인’라는 의미도 있고, 부정적으로는 ‘귀신을 두려워하는, 미신적인’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아덴을 다니며 발견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에 대해 언급합니다. 아덴 사람들은 축복을 놓치거나 심판을 당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서까지 우상을 만들어 세워 두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아테네 인근에서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비문이 적힌 제단들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전도 설교의 서론을 마무리합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함 (24-29)
바울은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합니다.(존 스토트 목사, 사도행전 강해 참조)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 계시->특별 계시)
-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천지의 주재(author)이시다. 인격적 창조주(<->스토아 학파, 범신론)이시며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의 인격적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그 분이 피조물인 인간들이 만든 신전에 살고 계신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 하나님은 생명을 유지하는 분이시다. (25)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생명을 공급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한다. -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26)
인류는 한 조상(혈통)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온 땅에 거하게 하시며, 민족들의 흥망성쇠의 정확한 때(카이로스)를 계획하셨으며, 각 나라가 차지할 일정한 지역을 정하셨다. 즉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설계자시다. (<->에피쿠로스 학파, 만사가 우연에 의해 좌우)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 -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동력이며 존재 이유이시다. (28)
28-29절은 당시 유명한 두 명의 시인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이것은 그레데 시인 에피메니데스(주전 600년경)의 ‘크레티카’에서 인용한 것.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의 목적 발견할 수 없다.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시다. (29)
‘우리가 그의 소생(자손)이라’ 이것은 시칠리아 시인 아라투스(주전 315-240년)의 ‘매노메나’와 클레안테스(주전 331-233년)의 ‘제우스 찬양’에서 인용한 것. 구속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아버지이시지만, 창조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으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자손)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이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다”(29)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형상이나 조각품으로 대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 (30-31)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영적 무지(‘알지 못하는 신’ 경배)에 대해서 폭로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증거한 이후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하나님이 알지 못하였다거나 그들의 변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관대한 자비로서 그들이 받아 마땅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이어서 설명하기를 “이는 정하신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부활)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셔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심을 믿고,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이 진리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한 증거’가 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종교심은 많으나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아테네 지식인들에게 만물을 창조하시고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지식인들의 관심사와 익히 잘 아는 문학 작품등을 인용하여 복음의 진리를 이끌어 내고 있으며, 사변적인 지식으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아테네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였습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영혼 불멸은 인정했지만, 죽은 몸의 부활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아직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믿지는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들어보고 나중에 판단하겠다는 말이지요.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을 시간은 항상 ‘바로 지금’입니다. 미루면 구원받을 기회는 지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몇사람이 바울을 ‘가까이 하여’(‘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에 달라붙다/연합하다’) 믿었는데, 그 사람들의 이름은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라는 여인이었고, 무명의 몇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 전도의 열매는 많지는 않았지만, 이방 세계에 큰 도전을 주는 사건이었고,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은 무엇입니까?
첫번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영혼들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기진한 영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세상에 대한 탐욕을 보고 우리 마음 속에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열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두번째는 복음을 전할 때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로 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바울이 헬라 철학과 문학과 예술에 심취한 아덴의 지식인들에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하고, 문학 작품을 인용하여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였던 것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수 있는 소재와 환경을 이용하여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도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 모두 복음 전도 설교의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됨을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듣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믿는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