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
• 본문: 행 14:8-28
11/29/2020 주일 낮 예배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이 그들을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자, 핍박을 피해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참고로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으로 부터 남동쪽으로 약 32Km,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부터 약 209Km 떨어져 있는 로마의 식민지 도시였습니다.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했는데,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이곳을 다시 방문하여 디모데를 여행의 동반자로 픽업하게 됩니다. (행 16:1)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약 97Km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A.D. 47-49년, 약 3년동안 두 사도는 배를 타고,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너고, 광야에서 수 많은 밤을 지새며 복음 전파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택함을 받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부르셨음을 확신했고, 환난과 핍박 중에도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고후 6:4-5)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기적과 과분한(?) 환대와 더불어 극심한 박해의 내용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이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는데요, 세번에 걸쳐 본문에 기록된 “믿음”이라는 단어에 촛점을 맞추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상고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 구원 받을 만한 믿음 (8-10)
두 사도가 루스드라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할 때 한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선천성 앉은뱅이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He listened to Paul as he was preaching)”, 즉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아쿠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것을 의미합니다. ‘순종하다’(obey)라는 헬라어 동사는 ‘휘파쿠오’인데, 이 동사는 ‘휘포’(아래에서)와 ‘아쿠오’(듣다) 두 단어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즉 순종한다는 것은 ~아래에서 주의 깊게 듣고 따르는 것을 의미함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먼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잘 듣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고 제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질병(핸디캡)으로 인해 절망 가운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움직일 수 도 없고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행 3장에 기록된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 뱅이처럼 그도 사람들의 적선에 의존하여 생명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 특히 선천적으로 타고난 중대한 질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 믿었기에, 핸디캡을 가진 본인과 그 가족들은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소망 없이 살아가던 그 사람에게 누군가 한 가지 소식을 들려 주었습니다. 유대인 두 사람이 루스드라에 와서 새로운 도(New Way)에 대해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곳 주민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웃 도시 이고니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해 들었기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도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걸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앉은 뱅이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군중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 두 사도가 가까이 눈으로 보이는 곳에 앉아서 사도들을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9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구원 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영어 번역본에는 대부분 “faith to be healed”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고침받을 믿음”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소조”는 “형벌(심판)으로부터 구원받다” “위험, 파멸로부터 구조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가진 믿음이 죄로 부터, 심판의 형벌로 부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 해석할 수도 있고,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얻으리라는 믿음이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그 사람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바울의 말에 빠져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메세지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 속에는 “구원 받을 만한 믿음” “치유되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구절에서 발견하게 되는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그들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마태복음 15장에 기록된, 가나안 여인(수로보니게)의 믿음을 보시고 귀신 들린 그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 가실 때 가나안 여인 한명이 나아와 소리 질러 외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묵묵부답이셨으나 나중에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자가 예수님께 절하며 다시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은 더욱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대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막 5:21-34) 거의 죽어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기 위해 제자들과 길을 가던 중에, 열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무리들 가운데 끼어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데 그에게는 한가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절박한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깨달으니라”(5:29)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심을 알았고,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이 그에게서 한 여인에게로 나감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둘러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실 때 그 여인이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 모든 사실을 아룁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두 여인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불치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에 살던 맹인이요 거지였던 바디매오도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막 20:46-52)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꾸짖었지만 개의치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고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은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도 동일한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그의 눈을 뜨게하였습니다.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믿음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병으로부터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이러한 간절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되 간절한 마음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우리의 시선을 그에게 집중할 수 있기를 발바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히 12: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반드시 계신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 포기의 믿음 (11-18)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앉은 뱅이에게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태어나서 한 번도 제 발로 딛고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믿기지 않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방언(루가오니아)으로 소리 지릅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이적을 행하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신들의 아버지격인 제우스(Zeus)라고 하고 바울은 신들의 메신저인 헤르메스(Hermes)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나바가 나이 들어 보이고 젊잖은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며, 바울이 주로 설교를 하였기 때문일것으로 믿어집니다. 두스드라에는 제우스를 섬기는 신당이 있었는데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무리들과 함께 두 사도에게 제사를 할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것은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그 지역을 방문하였을 때 한 노부부 외에는 그들을 환대한 사람이 없어서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노부부에게는 상을 주었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죽였기 대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기겁을 하며 옷을 찢고(큰 고통의 표시)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지릅니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 14:15)
쉽게 말하면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신들이 아닙니다.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저희가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진리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당신들이 하는 이러한 헛된 일들을 버리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방문화와 우상숭배에 젖여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내용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회당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구약을 많이 인용하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하였다면, 루스드라에서는 이방인 청중들을 대상으로 천지와 만물의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태양이나 바다, 산들과 같은 피조물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이런 헛된 일들을 버리고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헛된 것들을을 버리고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섬기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의 것들(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과 삶의 방식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나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에 등장하는 사람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밭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잠시 견디다가 말씀(믿음)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믿음은 말씀은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말씀(믿음)이 결실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이 두 종류의 믿음 모두 열매맺지 못하는 병든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땅의 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의 것들(영원한 가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염려(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와 재물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중에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인해 사도 바울은 늘 감사하였습니다.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 뿐 아니라 멀리 아가야 지역까지 들렸는데 그들의 믿음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살전 1:9) 믿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믿음(살전 1:10)이었습니다.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였던 데살로니가는 우상 숭배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제국 숭배 사상과 더불어 여러 신비 종교가 혼합된 다신교적 사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종교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였는데 이 종교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으로 삼고 성적 탐닉을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였습니다. 이 종교 때문에 마게도냐 지역은 지나칠 정도로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지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 문화 종교적인 상황 가운데 살고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자 과거에 그들이 섬겼던 헛된 우상들을 다 치워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포기하고 참된 믿음의 대상이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복음 성가에 있는 가사처럼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 3, 뒤돌아 서지 않겠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참된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길 바랍니다.
• 고난을 이기는 믿음 (19, 22)
기적을 행한 두 사도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것을 겨우 말렸는데, 이후 두 사도에게 엄청난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으로 숭배받기까지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울은 동일한 지역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두 가지 사건이 짧은 시간내에 두 사도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군중들은 이렇게 쉽게 돌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향해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라고 소리쳤던 예루살렘 주민들은, 얼마지 않아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쳤던 군중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약 209Km나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과 약 32Km 떨어진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겪은 온갖 고난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갖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이 구절에서도 루스드라에서 돌로 맞아 거의 죽게 된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듯 수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였으나 그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그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하는 고난(남은 고난)을 대신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설파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도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character)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성숙된 인격을 가지게 되며, 정금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히틀러 통치 당시 독일에 존재하였던 많은 교회들, ‘독일 제국 교회’들은 생존을 위해 히틀러를 추종하고 변질된 복음을 전하였을 때, 본 회퍼를 비롯한 소수의 ‘고백 교회’ 교인들은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민족 우월주의에 대해 반대하였습니다. 탁월한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 회퍼는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히틀러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고 진정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짓 메시아 히틀러를 추종하는 행위를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로 전락시킨 행위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핵심을 ‘믿음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동참’으로 규정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그리스도가 오직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는 자로서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듯이, 제자들도 오직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은 자로서만, 오직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로서만 제자가 될 수 있다. 제자도(Nachfolge)는 예수 그리 스도의 인격과의 결속으로서 그를 따르는 자를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곧 십자가 아래 세운다.” (본 회퍼, 제자도, p. 80)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 루스드라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습니다.
두 사도는 파송지였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 빠른 길을 선택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였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서 돌아 가는데 그 이유는 제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믿음의 연한이 짧은 초보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친 환난은 그들에게 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환난이나 핍박 중에도 우리는 믿음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하고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뒤흔들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붙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고난의 학교 졸업장’ 없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두 사도는 각 지역 교회에서 장로들(사역자)을 택하여 금식으로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파송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 하나님께 행하신 일들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것을 보고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심으로 세계 선교가 이루어져 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스드라에서 복음 전파와 기적, 고난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참된 믿음의 본질에 대해 상고해 보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간절함을 가진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세상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저와 우리 웨인즈빌 침례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