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소망, 붙잡을 소망”
• 본문: 행 16:16-19
1/17/2021 주일 낮 예배
오늘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세 가지 사건중에 두번째 사건에 대한 내용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에는 유럽의 선교가 시작되는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가 회심하게 되고 그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는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루디아는 유럽 선교의 첫 열매로서, 빌립보 교회 설립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강권함으로 그의 집에 며칠간 머문 이후 바울 일행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도 바울 일행이 “기도할 곳을 찾아” 문 밖 강가에 나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한 루디아을 만나게 된 것처럼, 두번째 사건 또한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고자 결심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베푸십니까? 역대하 16:9 말씀에 기록한 대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신다는 약속입니다.
또 잠언 8:17에 기록하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한 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사랑을 입으며,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일행이 만난 그 귀신들린 여종은 점치는 일(fortune-telling)일을 통해서 주인들에게 “큰 이익”(돈벌이)을 주는 노예였습니다. 그 여종은 ‘퓌톤의 영’을 가진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퓌톤은 고린도 만 북쪽 파르나소스 산 기슭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과 신탁을 지키는 신화상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킵니다. 후에 ‘퓌톤’이란 말은 귀신들린 사람, 특히 점치는 사람이나 복화술로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점치는 일들, 한국에서는 철학관, 굿하는 집, 점보는 집, 사주팔자, 타로등으로 불리는 업종이 성행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Psychic reading, fortune-telling이라고 붙여놓은 shop들을 많이 보게됩니다. 미래의 운명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더욱 풍요로와지고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정신세계는 더욱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인생의 무목적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은 아마도 신통방통^^한 점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미래의 운명을 알려주고, 가문이나 사업의 정보, 중요한 일에 대해 조언등을 해주어서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무속인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은 여러 주인들에게 소유된 노예여서 점치는 일을 통해서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주인들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 여종은 용한 점쟁이였기 때문에 고객들이 줄을 섰을 것이고, 점쟁이 비지니스로 인한 수익은 상당하였을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점으로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earned a great deal of money)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종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려있어 자신의 정체성은 잃어 버렸고, 그리고 그의 인생은 주인들의 돈벌이 수단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여종은 악한 영에게 매여 있었고, 그리고 사악한 주인들의 탐욕의 쇠사슬에 매여있었습니다.
마치 ‘앵벌이’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부모 없이 집 나온 아이들에게 접근하여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 뒤, 그들을 하수인처럼 이용하여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적선을 하게 하거나 생활용품등을 팔게 하고 그 수익을 갈취하는 ‘나쁜 어른들’로 인해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그 일행들을 따라와 소리 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17) 귀신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잘 압니다. 누가복음 4장과 8장에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눅 4:34),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눅 8:28)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종도 바울 일행을 보고 그들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그들을 일컫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였고,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빌립보 사람들)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언듯듣기에는 전도자들을 환영하는 말같기도 하고, 복음 전파를 지지하는 말같기도 하지만, 귀신들린 여종의 말은 바울 일행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여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을 마술과 연관시킴으로서 복음의 능력을 훼손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유일한 구원이 아닌, 그 여종의 신적인 능력에 의한 구원(건강, 평안)으로 곡해시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훼방하기 위해 바울 일행을 따라 다니며 소리 지르며 괴롭혔습니다. 여러날 이러한 행동이 계속되자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피곤할 만큼 신경이 쓰이고 화가 나다”는 의미) 돌이켜 그 귀신에게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그 여종에게서 즉시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베드로도 평생 성전 미문에 앉아 적선에 의지하여 살던 앉은뱅이를 보고 외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이름의 권세로 모든 악한 영을 내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대적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게 되자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지게”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 주는 여종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이 떠나가게 되자 그 여종은 더 이상 돈벌이 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인들의 사악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그 주인들의 악함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귀신들린 여종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시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그를 하나님(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임무를 주신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주인들은 여종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두번째로 주인들의 악함은 여종을 통해 거두어 들이는 수익(돈)이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소위 황금 만능주의에 사로 잡혀있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돈에 자신들의 소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이 가져다 주는 행복, 돈이 가져다 주는 파워, 돈이 가져다 주는 안락함에 취해서 인생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종에게서 신통한 능력이 떠나게 되자 그들 입장에서는 그 여종이 돈벌이에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실은 그 여종은 바울을 통해서 온전한 인격체로 회복되었지만, 탐욕이 가득한 주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의 존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word play(언어 유희)를 하고 있는데요, 동일한 동사를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18절 마지막에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에서 “나오다”(exelthen)라는 동사와 19절에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에서 “끊어지다”(없어지다, 사라지다)(exelthen)동사는 동일한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귀신이 여종에게서 나갔을 때, 그 여종의 주인들의 소망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탐욕이 가득한 여종의 주인들이야말로 악한 영에 사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영, 교만의 영,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살았던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가자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소망 또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소망을 걸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 앞에서 장사가 없다. Show me the money! 라고 노래 부르며 삽니다.
재물 때문에 형제간에 분쟁이 생기고, 부모 자식간 관계가 단절되고, 법정 소송을 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악으로 빠뜨리는 세 가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일 2:16) ‘리차드 포스트’라는 작가는 현대인들의 우상을 ‘돈’ ‘권력’ ‘섹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아이러니 한 사실은 여종을 소유하고 있었던 주인들이야 말로 영적인 노예 상태에 있었습니다. 물질의 노예, 탐욕의 노예, 교만과 거짓 영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스스로 말씀하실 때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고 하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물질의 노예된 자에게, 권력과 명예에 노예된 자에게, 자기 의와 교만의 영에 노예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 거룩과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된 자들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온갖 죄악의 쇠사슬에 매여 억눌린 자들을 진리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진리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과거에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악의 쇠사슬로 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것은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헛된 소망의 끈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처럼 물질이 나의 소망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생의 자랑이 , 안목의 정욕이, 가족의 평안이, 금쪽같은 자식들이 나의 의지할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사라지되)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굳건한 반석이시며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배 중 불렀던 새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가사를 제가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은혜로운 찬송가를 작사한 분은 에드워드 모트라는 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모트는 런던의 음침한 뒷골목에서 생활하다가 16살에 가출을 하여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가구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손재주가 있던 그를 눈여겨 본 주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를 따라 교회 갔습니다. 그날 존 하야트(John Hyatt) 목사가,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원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소년의 마음을 두드렸고 그 자리에서 “잘못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요. 하나님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모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였고, 18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어느날 평소처럼 출근하는 중에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체험을 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공장 뒤편 언덕 큰 반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석처럼 변함없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노래하였는데 그의 고백이 이 찬송이 되었습니다.
My hope is built on nothing less. Than Jesus’ blood and righteousness; I dare not trust the sweetest
나의 희망은 기초를 두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움에, 나 감히 세상의 달콤한
frame, But wholly lean on Jesus’ name.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구조물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이름만 의지하도다. 굳건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내가 서리니 다른 모든 터는 가라앉은 모래라 (찬송 원문)
그 후에 그는 1852년 55세의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되었고, 21년동안 호샴 교회에서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놓아야 할 거짓 소망의 끈과 붙잡아야 할 소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모습들을 버리고, 재물과 탐욕의 끈을 끊어버리고, 굳건한 반석 되신 예수님의 이름만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께만 소망을 걸고 살아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