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섬기는 일꾼의 자세
•본문: 행 20:13-38
4/11/2021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가량 복음을 전한 이후 소아시아를 떠나 2차 전도 여행 때 개척한 교회들을 두루 다니며 제자들을 권면하고 교제를 나눕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위해 빌립보로 돌아가 배를 타고 드로아에 상륙하여 일주일간을 체류하게 됩니다. 드로아를 떠나기 전날 밤에 밤 늦게까지 말씀을 강론하다가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다시 살려냅니다. 그날 밤이 지나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앗소,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에베소를 지나서 곧장 돌아가는 여정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년동안이나 머물면서 기도와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곧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가 드린 구제 헌금을 가지고 속히 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차선책으로 강구한 것은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한 것입니다. 며칠간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당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로 교인들을 목양하고 교회를 이끄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행전에 등장하는 여러편의 사도 바울의 설교문 중에 유일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한 설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에베소 교회 영적 지도자들에게 전한 바울의 고별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섬기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28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를 값으로 치르고 사신 교회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전(ransom)으로 치르고 산 교회이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음부의 권세조차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이므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일이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내 몸처럼 여기고 섬기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믿음의 고백위에 “내 교회”(my church)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 교회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고, 회개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침례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를 임명하여 지속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의 내용을 살펴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일꾼의 자세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겸손과 눈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에베소 교회들과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보인 모범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자세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사울은 스스로 큰자라고 생각했고 가문과 학문과 사회적인 지위에서 우월의식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관은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겼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고 주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구원하시고 직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었고, 또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내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기까지 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은 바울처럼 먼저 겸손함으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 사회적 지위나 직분을 자랑하기 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충성되이 여겨 섬김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김을 받으려하기 보다 먼저 섬기며’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겸손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눈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눈물(울었다는 표현 포함)이라는 구절이 세번 나오고 있습니다. (19, 31, 37) 바울의 사역은 기도의 사역이었고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성격이 강직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소유한 동시에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뜨거웠기에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전도자였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나 실라를 비롯한 그의 동역자들을 대할 때 아비가 자식을 대하듯,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사랑과 긍휼함과 인내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의 열정과 눈물은 기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개척한 교회 성도들을 위해 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지키시고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늘 기도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바울의 사역의 동력은 눈물의 기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저와 우리 모두가 바울을 본받아 눈물의 기도를 뿌리는 주의 제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고난 중에 인내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계속해서 19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 바울은 1,2, 3차 전도 여행 중에 수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은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당한 핍박이었으며, 에베소에서는 이방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핍박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그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환난 중에도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비결을 체득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겪게 된 갖은 고난과 환난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전 1:4)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고백하기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character)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지체들을 섬길 때에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홀로 한숨짓고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중에 신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세번째는 물질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섬겼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순회 전도자들 중에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돈벌이 목적으로 전도 행위를 하러 다니는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탐심의 노예가 되어 복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교회 장로들에게 “너희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하며”(벧전 5: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어려운 성도들의 형편을 잘 알기에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낮에는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자신의 필요를 충당했고 주로 오후와 저녁, 안식일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가지 일을 병행하였기에 육체는 항상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텐트메이커로서 살았던 것은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20:33-35)
우리의 섬김의 동기가 물질이 되어서는 안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 섬기는 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장에서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것처럼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들에게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마땅하지만(사도들의 권리이지만), 자신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탐심의 마음을 버리고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영혼들의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기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줄 믿고 맡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온 교회를 위해 경성하는 자세로 섬겼습니다.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삼가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세코’인데요, ‘주의를 집중하다’ ‘전력하다’ ‘관심을 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도록, 탐심의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 침체에 이르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벧전 4:7)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제자들은 육체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기에 그들은 시험에 들었고 두려움에 휩싸여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 자신을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일꾼들은 온 양 떼, 즉 온 교회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무엘의 고백처럼 ‘결단코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병든 자가 나음을 얻고, 길 잃고 방황하던 자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되며,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던 사람이 사명을 발견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이웃을 위해,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을 위해 중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독일을 상반된 이념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양분하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어떻게 무너진 줄 아십니까? 혹자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소수의 중보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1982년부터 옛 동독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 기도회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동독 정부는 반정부 기도회를 허락하지 않았고 1989년에는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니콜라이 교회는 4개월 동안 여름 휴가기를 맞아 평화 기도회를 준비했고 그해 9월 4일 기도회를 재개했습니다. 이후 기도회와 월요 시위에 참가하는 인원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 났고 당시 라이프치히 인구 50만명 가운데 32만명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강경 진압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공산주의 동독은 사라지고 독일은 통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29-30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교회를 공격하는 사나운 이리(외부적인 공격)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내부적인 공격)이 에베소 교회에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공격과 내적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 ‘주의를 집중해서’ 경성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 늘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일꾼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부름받은 일꾼으로서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서, 겸손과 눈물로 교회를 섬기며, 고난 중에 인내함으로 섬기며, 청빈한 삶의 모본을 보이며, 영적으로 깨어 경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