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예루살렘 회의, 진리와 교제의 문제 (행 15:1-21)

Posted on 12월 6, 2020

Exemple
sermon date 2020-12-06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예배 – 예루살렘 회의, 진리와 교제의 문제 (행 15:1-21)

예루살렘 회의, 진리와 교제의 문제
• 본문: 행 15:1-21
12/06/2020 주일 낮 예배

기독교 역사상 많은 중요한 종교 회의들이 존재하였습니다. 특히 기독교 초기 시대에 열린 여러 종교 회의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이단들의 공격에 맞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진리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대표적인 종교 회의가 A.D. 325년에 열린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였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가 확립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결정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배격되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회의는A.D. 397년, 어거스틴의 지도하에 열린 ‘카르타고 회의'(The Council of Carthage)였는데, 그 회의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약 성경 27권의 목차가 확정되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진리 가운데 견고히 세우셔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었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최초의 종교회의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회의”(The Council of Jerusalem)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 문제의 발단과 안디옥 교회의 대응
먼저 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 그 배경이 나와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아마도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5절))이 유대로 부터 내려와 (유대 주의자들이 사도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대표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것을 의미) 안디옥 교회 형제들을 가르쳤는데,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였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서 훌륭한 영적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의 목회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파송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선교 중심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바나바와 바울이 교회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 교인들이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교리, 즉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거짓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그 사람들을 ‘거짓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 핵심은 할례였습니다. 할례(Circumcision)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로서,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할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를 혼돈에 빠뜨리고 교인들로 하여금 건전한 믿음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특히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한다고 (마 24:11)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진리의 말씀안에 거해야 하며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리라” (딤후 3:15)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적극적으로 맞섰습니다. 2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고 했는데, ‘다툼과 변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들은 엄청난 투쟁과 반목, 분열등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 단어들이 ‘폭동’ 혹은 ‘반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의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회의(The Council of Jerusalem)
안디옥으로 부터 480Km 떨어진 예루살렘에 도착한 일행들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들을 나눕니다. (4절)

4-22절까지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 회의는 3번에 걸쳐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환영하고 보고하는 전체 모임(4-5절), 다음에 교회의 모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아마도 한쪽에서 모인 지도자 모임(6-11절), 마지막으로 사도들과 장로들과과 전체 회중의 모임(12-22절)이 이어집니다.

첫번째 전체 모임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와,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행하신-특별히 이방인들의 구원-일들을 들은 후 바리새파 중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주장합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5절)

어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되었을 때 그들이 유대교에서 행하던 관습들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도 먼저 유대교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은 다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인들로 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갈라디아 지역에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져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는 멀리 안디옥까지 가서 ‘거짓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하고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행한 일로 인해 그를 책망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자(유대주의자)들이 오자 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먹다 말고 물러가자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베드로는 로마 장교 고넬료 구원 사건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셨고, 이방인들도 차별없이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셨는데도, 여전히 유대인의 음식 관습-이방인들과 식사를 금함-으로 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바울은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 바울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유대주의자(할례당)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구원의 복음에 율법의 행위(할례+의식법등)들을 덧붙일려고 시도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데 그들은 율법의 행위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도 이와같은 오류에 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선한 행위들, 공적들, 전통들, 불필요한 절차와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건물을 화려하게 짓기 위해 헌금을 강요하고, 직분을 받을 때 교회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해야하고, 목회자들은 총회나 기관의 감투를 얻기 위해 로비를 하고, 강대상, 성가대 가운, 직분 호칭등 비본질적인 문제로 논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미국 보수적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인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님은 그의 책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Our Sufficient in Christ)라는 책에서 오늘날 21세기 교회내에 침투하고 있는 신 영지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은 심리학, 실용주의, 신비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오늘날의 신 영지주의는 1세기의 영지주의보다 더 광범위한 위협이 되고 있다. 더구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영지주의 이단에 단결해서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분성을 지적함으로써 영지주의에 맞섰다 (골 2: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답이다.”

바리새파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듣고 나서 사도와 장로들이 따로 모여 많은 변론을 하게 됩니다. 별도의 회의 이후 네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전체 회중에게 정리된 의견을 제시합니다.

먼저는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10여년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고넬료와 가족들에게 보내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이방인 가족이 구원을 선물로 받고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된 사건을 염두해 두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않으셨느니라”(8-9)고 말합니다.

유대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성가시고 부담스러운 짐)를 제자들의 목에 두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1)고 선언합니다.

베드로에 이어 바나바와 바울이 간단히 증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면,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을 통해 안디옥 교회와 이방인 지역(구브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증거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차별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으셨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어나 말한 사람은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 역할을 맡은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육신의 어머니를 둔 형제)입니다. 야고보도 처음에는 다른 예수님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요 7:5) 하지만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고전 15:7) 그는 변화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를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습니다. (갈 2:9) 그는 의로운 삶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남다르기로 유명해서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라고 불리웠으며,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습관으로 인해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는 야고보서를 기록하였고 주후 6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베드로의 증언을 적극 지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백성’은 이방인을 지칭하는헬라어 ‘에드네’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단어인 ‘라오스’(히. 암)를 의도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야고보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히브리 백성들과 동일하게 자기 이름을 위할 ‘하나님의 백성’(라오스)로 선택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는 구약 아모스 9:11-12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하고 그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칠 것이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다윗의 씨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의 백성이 세워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이방인들이 주를 찾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이 그의 새로운 공동체에 포함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 열방이 주께 돌아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 약속이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며, 이방인 지역에 교회가 세워짐으로 그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분열시킬만한 큰 논쟁과 다툼이 영적 지도자들의 간증과 증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주장으로 인해 해결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내의 갈등과 분쟁해결의 중요한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각자의 주장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즉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초대 교회 본부와 같았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경험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지 않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베드로도 고넬료 구원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증거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였고, 야고보도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목적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뜻과 주장을 관철시킬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불화하고 교회내에 분쟁의 씨앗을 심을때가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자신의 인격과 가치관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초대 교회 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의 의도에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문제의 해결
회의의 의장인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행의 멍에를 지우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정리하면서 이방인 형제들에게 몇가지 제안을 합니다. 19절에 ‘내 의견에는’ (NIV, It is my judgment)
헬라어 ‘krino’는 단지 ‘의견을 표명하다’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확신하다’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확신하기를 이방인 형제들이 유대인 형제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들이 꺼리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행위(고전 8:7-13)와 목매어 죽인 동물을 먹는 것(피 있는 채로 먹지 못하게 함, 창 9:4)과 피를 먹는 것(레 19:10-12)을 금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음식법을 존중하여 함께 지킬 것을 강조하고, 이방인들 특히 헬라인들이 쉽게 범하는 여러 종류의 성적인 범죄를 멀리할 것을 강하게 설득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음행을 제외한 세가지 유대인들의 음식법을 존중하여 지킬 것을 강조한 것은 필수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된 유대인들의 양심에 대한 양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 형제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여 양보할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지만, 음식법에 대한 이방인 형제들의 양보는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와의 교제가 막히지 않기 위함입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하면 안되지만 ‘교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어떤 이민 교회는 교회당을 새로 짓다가 큰 분쟁이 일어나 둘로 쪼개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는데 예배당 카페트 색깔을 파란색으로 하느냐 붉은색으로 하느냐하는 하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17세기 독일의 신학자 루퍼투스 멜레니우스는 유럽의 30년 전쟁이 일어나 온 대륙이 피로 물들었을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In essentials unity, non-essentials liberty, all things in charity).

초대 교회는 이 중요한 원칙에 따라서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원칙을 따라서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고수하되,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의 확신 가운데 제시한 제안은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의 동의를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만장일치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확실하게 이방인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교회 영적 지도자 중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대표로 선택하여 그들 편에 편지를 보냅니다.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 도착한 그들이 성도들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을 때 “읽고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3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성령 안에서 해결되자 성도들이 위로를 받고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독교 최초의 종교 회의라 할 수있는 예루살렘 회의의 이슈와 그 해결책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안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분별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의 인도를 따라서 함께 논의를 거쳐 해결책을 찾아야합니다. 개인의 주장만 관철하기 보다 성경적인 근거를 찾고,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진리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하며,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융통성(flexible)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 지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며, 성도의 수가 날마다 늘어가는 역사가 일어 날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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