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사도행전 11:1-18)

Posted on 9월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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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사도행전 11:1-18)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본문: 사도행전 11:1-18
9/27/2020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가 예루살렘 교회에게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Circumcised believers)의 비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1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8장 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유대인들과 오랫동안 원수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제 복음이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다는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인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뉴스였을것입니다.
이미 빌립 집사를 통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이 전해진 적은 있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통치 국가인 로마 장교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집단적으로 복음이 전해진 사건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복음이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졌고,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 또한 사도들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유대인 성도들이었습니다.
2-3절 말씀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례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할례받은 유대인 남자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합니다.
할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표식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임을 외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할례의 징표였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99세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제정하시면서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0-11)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의 표징으로서 유대인 남자 아이들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중요한 명령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는데요, 출 4장 24절에 보면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앞 뒤 설명없이 갑자기 하나님께서 길을 가던 모세를 죽이려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언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앞두고 택하신 지도자 모세를 죽이려 하셨을까요?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 17:25-26)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치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실려고 했고, 이를 눈치 챈 십보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죽임을 면하게 됩니다. 그만큼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만큼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또한 할례는 ‘이방인 개종자들’(Proselytes, Converts)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God-fearers)을 구분하는 표식이기도 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정식 유대교 개종자가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했고, 율법에 기록된 음식법들을 준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꺼리는 이방인들은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그룹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할례 문제는 유대교 내에서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 내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아야하고 구약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들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결국 사도행전 15장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기독교 최초의 종교 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Jerusalem Council)의 주요 안건이 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 문제는 잘 해결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은 베드로를 향해 그가 ‘무할례자’ 즉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한 것을 두고 비난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재의 근원을 할례에 두는 할례자들 입장에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와 교제한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은 할례자들에게는 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은 이유중 하나가 바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유대인들에게는 음식을 함께 한다는 의미는 그 사람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고, 궁극적으로는 일상 식사나 만찬을 마지막때 하나님 나라의 만찬과 연결시켰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는 것은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 만찬에 초대하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부분은 할례자들의 비난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입니다.
할례자들의 비난에 직면한 베드로는 자신과 고넬료에게 나타난 환상을 중심으로 자초지종을 차례로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10장의 내용과 다른 것은 베드로 자신에게 나타난 환상을 먼저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다음, 고넬료를 통해 전해들은 환상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비난에 직면하게 된 베드로의 태도는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기 이전의 베드로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임을 보게됩니다.
할례자들의 비난에 대해 그는 변명하거나 감정적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도 보면 예루살렘 교회내에서 구제 문제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간에 불평과 다툼이 일어났을 때, 열두 사도의 제안으로 그 문제가 지혜롭게 그 문제를 해결되었고, 그 결과 초대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전 언급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할례 문제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을 때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의 모임에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의 주도로 은혜롭게 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각기 다른 의견으로 인해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갈등과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거나, 자신의 의견만 관철할려는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문제에 포커스하기 보다, 사람을 point out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주인되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진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기도 보다 성령 보다 앞서지 않는 것, 나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바로 눈 앞의 문제를 보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big picture’를 보는 것, 개인의 생각보다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법칙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환상의 의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9)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받기로 하셨는데 네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전통과 관습, 지식과 편견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동일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그만큼 베드로가 과거의 전통과 형식에 강하게 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깨뜨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편견과 아집을 꺾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욥바에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하게 하시고, 보자기 환상을 통해 보여 주시고 (3번씩이나), 성령께서 친히 음성을 들려 주시기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의심 말고 함께 가라고 명하십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난 이후 베드로에게 전한 말 중에 행 10장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성령께서는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와서 구원을 가져다 줄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임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6명의 일행과 함께 먼 길을 걸어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오면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고넬료의 집에 들어 갔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넬료의 겸손한 태도와 고넬료가 전한 환상의 내용를 통해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일행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고넬료가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해 들은 말 중에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이 말씀은 너무나 명확하게 베드로를 통해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이었기에 그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음을 증거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일원이 됨을 선언하는 사건이었지만,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이루었음을 확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도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때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며,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도행전 1:5 말씀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이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그는 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마지막 날에 남녀 노소 누구에게나 성령을 부어주리라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됨을 그는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 교제 한 것으로 인해 비난하는 할례자들에게 전한 베드로의 선교 보고는 그들의 입을 막는 강력한 간증이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의 구원 사건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하나님의 선교 프로젝트였다는 의미입니다.
17절 말씀은 베드로의 선교 보고의 정점을 찍는 구절입니다.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불과 얼마전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120명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임하였던 성령이 동일하게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짐을 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로마 황제와 당국자들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핍박한 대표적인 로마 황제가 바로 네로 황제(A.D. 54-68)입니다. 사도 바울도 네로 황제가 다스릴 때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서기 64년에 로마 시내에 대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시는 14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화재 후에 온전히 남아 있게 된 구역은 4개 구역 밖에 없을 정도로 로마 시내 대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어려움에 처한 로마 시민들에게 구호품을 보내어 주고, 신들에게 속죄 의식을 치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네로 황제가 자신의 새 궁전인 황금 궁전을 지을 새 대지를 마련하기 위해 고의로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네로는 이 소문에서 벗어나기위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에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대중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해 근친 상간, 영아 살해등의 소문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을 비참한 방식으로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역사를 기술한 ‘연대기’ (Annals)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방화죄라기 보다는 인류 적대죄를 선고 받았다. 그들은 살해 당할 때 놀림감이 되었다. 그들은 야수의 모피를 뒤짚어 쓴 채 개에게 물리고 찢겨서 죽었다. 어떤 때는 십자가에 붙잡아 매고, 혹은 불에 타기 쉽게 만들어 놓고 해가 지고 나면 야간의 등불 대신 불 태웠다.”
네로 황제를 비롯한 로마의 여러 황제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더욱 확장되어 갔고, 결국 A.D. 313 콘스탄티누스 황제때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게 되었고, 로마 당국이 몰수하였던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다시 돌려 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담대한 선포는 Covid-19로 인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전염병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코로나 19와 같은 신종 바이러스가 어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동이 제한되고 모임이 금지되고 일상이 뒤바뀐 상황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멈추고 있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Covid-19 이후 시대에는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모으는 교회’에서 ‘흩뿌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신인류를 흔히 ‘Digital Nomad’ (디지털 유목민)이라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은 ‘Spiritual Pilgrim’ (영적 순례자)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 제단의 불씨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은 할례자들의 태도의 변화입니다.
베드로의 담대한 증거를 전해들은 할례자들은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8)라고 응답합니다.
그들의 태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전통의 잣대로 베드로를 비난하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임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유의 주재가 되신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은 민족과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뛰어 넘어 전 인류에게 미칩니다.
할례자들의 태도의 변화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신들의 편견과 전통보다 더 존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나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더 높은 권위를 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방인 고넬료의 구원에 대한 내용의 마지막 부분, 즉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한 내용을 살펴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매여있던 베드로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목도하고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은 일로 베드로를 비난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선교 프로젝트였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막는 자가 아니라,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는 일꾼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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