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다비다야 일어나라 (사도행전 9:32-43)

Posted on 9월 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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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 다비다야 일어나라 (사도행전 9:32-43)

“다비다야 일어나라”
•본문: 사도행전 9:32-43
9/6/2020 주일 낮 예배

사도 행전에는 초대 교회의 시작과 부흥을 이끌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입니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사도 행전을 구분한다면 행 1장에서 12장까지는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한 유대인과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복음 전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13장부터 28장까지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한 이방 선교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사역은 행 5장까지 기록되어 있다가 6장에서9장 전반부까지는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6장부터 9장 전반부에는 스데반의 순교와 빌립 집사의 전도, 그리고 사울의 회심 사건이 서술되어 있고, 9장 후반부부터 다시 베드로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가 행한 두 가지 치유와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첫번째 기적은 룻다에서 중풍 병자 애니아라는 성도를 고친 사건입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약 시대에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인 ‘롯’으로 불리웠던 곳입니다. 룻다는 당시에 상당히 큰 도시였으며 애굽과 수리아를 이어주고 욥바와 예루살렘을 이어주는 대로의 교차지점으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도시였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혼자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룻다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게 된 것 같습니다.

거기서 그는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중풍병으로 8년간이나 고생하는 자였습니다.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해라”라는 구절로 보아 중풍병의 정도가 심해 침상에서만 생활해야 했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거동을 전혀 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침상에 누워있는 애니아를 향해 외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베드로의 선포는 담대함과 확신에 가득찬 치유의 선포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애나아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중풍 병자 애니아를 일으켰습니다.

행 3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최초의 치유 사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나 걸으라!” (행 3:6)고 담대히 외쳤을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행 3: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부인한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이전처럼 평범한 어부의 삶의 돌아간 나약한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같이 강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는 초대 교회의 리더가 되었고, 복음 전파의 최전선에서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오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중풍병자를 고친 베드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모든 기적들을 행한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삼아 친히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초대 교회때 베드로와 함께 하신 주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셨고 중풍 병자를 고치셨고 맹인을 눈뜨게 하셨고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하시는 긍휼하심의 사역이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사 53:4, 마 8:17에서 인용)

우리의 육신의 연약한 부분을 주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보에 적은 말라기 4:2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치유의 광선을 발하셔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그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9:35)

치유의 기적은 기적을 행한 베드로의 초자연적 능력을 자랑함도 아니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인기를 모으기 위함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의 목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0-31)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 또한 이 말씀과 같이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며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 기적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린 사건입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61KM, 룻다로 부터는 서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당시 유다의 주요 항구 도시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니느웨로 가지 않고 멀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탔던 항구가 바로 욥바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비드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내용이 36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그는 “여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최초의 ‘여제자’ 다비다. 그의 헬라식 이름은 “도르가”였습니다.

원 의미는 ‘가젤’(영양, 사슴)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한 여제자였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됨의 표식처럼 행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섬기며 이웃을 돌아보았습니다. 성도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은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거리가 되었습니다.

행 2장 마지막 구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2:4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착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는 성도들을 돌보며 사랑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물질을 나누어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가족이 함께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일찍 과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큰 부자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과부로서 자신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36절 말씀에 보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했는데, 몇번 선행과 구제를 행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자신의 물질을 나누고 베푸는 삶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말씀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 11:24-25)고 하셨습니다.

구제하는 성도의 삶은 결코 가난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제하는 자, 다른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의 삶은 풍성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제자 다비다는 성경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는 성도였습니다.

그가 죽게 되었을 때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다” (9:39)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르가는 자신 보다 더 어려운 과부들을 많이 도왔는데 그들의 속옷과 겉옷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당시 겉옷은 값비싼 의복이었기에 상당한 지출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르가의 사랑을 받은 수 많은 과부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통하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 석자를 남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바라십니까?

인자하고 사랑이 많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베푸며 살았는 사람으로 기억될지,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며 자신과 가족들만 위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기억될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1888년, 어느날 아침 신문에 다름과 같은 기사가 난 것을 노벨이 읽게 됩니다.
“죽음의 상인이 사망하다….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

멀쩡히 살아있던 노벨이 어떻게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읽게 되었느냐 하면, 어느 신문사가 노벨의 형 루드비그 노벨의 죽음을 알프레드 노벨의 죽음으로 혼동해 잘못된 기사를 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공헌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노벨상으로 유명한 노벨은 생전에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이나 건설 현장에 폭넓게 쓰인 동시에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폭탄으로도 사용됐기 때문이죠. 다이너마이트로 막대한 부를 쌓은 노벨이 이런 비난을 받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노벨은 죽기 1년 전에 유언장을 작성하고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노벨상 제정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자신을 ‘죽음의 상인’이라고 표현한 부고 기사를 보고 충격받은 노벨이 죄책감을 덜기 위해 노벨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사망기사 하나가 노벨 개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도르가처럼 많은 선행과 구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바의 여제자 도르가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시체를 씻어 다락에 안치해 두었습니다.

시체를 씻는 행위는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 행하는 장례 관습이었습니다.

시체를 다락에 둔 것은 아마도 성도들이 다비다가 다시 살 것을 믿고 그렇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당시에는 장례가 지체되는 경우 시신을 다락에 두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욥바에 있는 성도들이 베드로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룻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에게 오기를 청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베드로가 룻다에서 중병병자 애니아를 고친 이야기를 전해듣고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릴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소망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데리러 온 두사람과 함께 욥바에 있는 도르가의 집에 도착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지체하지 않고 시신이 놓인 다락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Tabitha, get up!)

베드로의 외침을 듣고 죽은 시체가 눈을 뜨게 되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서 그곳에 모인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자,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3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 그 사건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세 곳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든 장면을 똑똑히 목격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외치십니다.

달리다 쿰” (Talitha, Cumi, 아람어로 “내가 네가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

예수님의 선언을 듣고 12살난 소녀가 일어나서 걷자 사람들이 크게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현장에서 놀라운 기적을 목격했던 베드로는 이제 시체 앞에서 능력의 예수님께 기도한 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비다야 일어나라’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죽었던 다비다가 일어나는 기적을 목도하게 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는 아람어로 ‘Tabitha, Cumi’ (다비다 쿰)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인 ‘달리다 굼’과 철자 & 발음도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기억한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비다 쿰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라고 하였는데,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룻다에서 중풍 병자 애니아를 고친 것 또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는 사건과 흡사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친구들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불치병 환자였던 그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현장을 목격한 베드로는 중풍병자 애니아에게 동일하게 선포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러자 애니아는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과 차이는 베드로는 전능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것이 차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Jesus heals you)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의 기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1.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였을 때 8년동안 침상에 누어있던 중풍병자 애니아가 일어나게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기도하고 담대하게 선포하였을 때 죽은 시체였던 여제자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유대 지역에 있는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모든 자를 살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수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고, 3명의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므로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되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권자이시며,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소멸과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 일컬어지는 고전 15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4-55)

우리 모두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정복하게 되었고,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온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은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었고, 복음이 유대를 넘어 본격적으로 이방인 지역으로 전파되도록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심으로 중풍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모든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다 쿰

과거의 상처와 분노와 마음의 고통, 그리고 만성적인 육체의 질병과 불치의 병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병든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리에서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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