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천사의 얼굴 (사도행전 6:8-15)

Posted on 6월 14, 2020

Exemple
sermon date 2020-06-14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주일설교 – 천사의 얼굴 (사도행전 6:8-15)

“천사의 얼굴”
•본문: 행 6:8-15
6/14/2020

한국의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던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의 한 마을에 사람 얼굴 형상을 한 높이 30미터가 넘는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얼굴 표정이 자애롭고 숭고하면서도 다정스러워 이 큰바위 얼굴에 경외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장차 이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그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주인공 꼬마 어니스트도 어릴 때 부터 이 얘기를 듣고 언젠가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안을 가져다 줄 큰 바위 얼굴을 만나게 될 날을 고대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하게 돈을 많이 번 사람이 고향을 찾아 마을로 오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드디어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큰 바위 얼굴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수전노에 불과한 사람임을 깨닫고 모두들 실망했습니다.

어니스트가 청년이 되었을 때 전쟁터에서 무수한 승리를 거둔 유명한 장군이 그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서야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났다고 환호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니스트가 보기에는 그의 얼굴에는 군인다운 결의와 강인함이 확고하게 배어 있었지만, 큰 바위 얼굴이 주는 온화함과 자비로움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났을 때 어니스트는 마을에서 설교하는 설교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청결한 마음과 맑은 사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말보다는 덕행으로 어른들에게 항상 칭찬을 받았습니다.
몇 년 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유명한 정치인이 나타났지만 그 역시 큰 바위 얼굴이 가지고 있는 장엄함과 위풍당당함, 얼굴 깊숙히 흐르는 사랑이 부족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니스트는 노년이 되었습니다. 그의 백발에는 지혜가 심어져 있었고 얼굴에 패인 주름에는 슬기로운 경험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마을을 방문한 유명한 시인으로 부터 ‘오랫동안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은 다름아닌 어니스트입니다 어니스트야 말로 틀림없는 큰 바위 얼굴입니다’라는 말을 마을 사람들이 듣게 됩니다. 큰 바위 얼굴과 어니스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관찰한 사람들은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서 속히 큰 바위 얼굴과 꼭닮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나타나길 빌었습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바라는 ‘큰 바위 얼굴’-지혜와 명철과 장엄함과 위풍당당함을 지닌-은 멀리 있지 않고 성실과 겸손, 청결한 마음과 덕스러운 행동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는 교훈적인 소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 첫번째로 기록된 스데반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 정도가 아니라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 부터 몇주간 스데반에 대해서 묵상하며 배우기를 원하는데, 오늘은 스데반 시리즈의 첫 시간으로 ‘천사의 얼굴’을 지닌 스데반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
먼저 스데반의 이름은 지난 주 본문 6:5에 처음 등장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택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명의 택함받은 집사 중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누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장까지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복음 전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9장에 사도 바울이 등장하기 이전 삽입장처럼 여겨지는 6-8장 세 장에 걸쳐서 선택받은 일곱 집사중에 두 집사의 사역과 순교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입니다.
사실 스데반과 빌립 집사외 다른 사람들의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누가는 두 사람의 사역과 헌신을 전해줌으로 초대 교회에 존재했던 7명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7명의 집사들은 모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6:3)들이었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6:5)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스데반을 설명할 때 다시 한번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의미하는 헬라어 ‘카리스'(charis)는 사람을 끄는 매력 또는 아름다움(잠 1:9), 친절한 혹은 호의적인 태도(눅 4:22), 어떤 친절에 대한 감사를 의미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좋아했으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상이나 호의를 기대하지 않는 관용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어를 ‘선물’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곧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속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란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즉 구속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사용되었고 특별히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롬 5:8). 은혜는 죄인에게도 배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엡 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게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은혜는 도무지 받을 조건이 되지 않는 죄인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호의요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은혜”가 늘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은혜” 뿐만 아니라 “권능”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권능”은 헬라어 ‘두나미스’인데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이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구제 사역과 복음 전파를 위해 세움 받았던 일곱 집사들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권능”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능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게” (6:8)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이미 동일하게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3),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행 5:12)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스데반과 사도들에게 임한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큰 기사와 표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와 능력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들과 표적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에 역사하신 놀라운 일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반복된다고는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선교지에서) 기도할 때 불치의 병이 낫기도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 때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 하늘에서 부어지는 평강을 누리기도 합니다.
물질적으로 궁핍할 때 하나님께 필요를 정직하게 아뢸 때 하나님께서 필요에 맞게 채우시기도 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심을 체험합니다.

이 모든것들을 통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지혜와 성령으로 증거함
스데반이 민간에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 반대하는 무리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6:9)
개역 개정 성경의 번역으로 보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통칭하여 자유민들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원 의미는 자유민(freemen)들의 그룹과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그룹으로 각각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유민들은 BC 63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했을 때 로마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자들과 그 후손으로 짐작됩니다. 로마 출신 헬라계 유대인들입니다.

구레네는 현재 리비아,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길리기아는 터키 남부, 아시아는 현재 터키 동부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같은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고 논쟁을 시작합니다. 자료에 보니까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히브리파 유대인들 보다 오히려 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집과 친척들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재정착한 그들은 본토 유대인들보다 더 애국심도 강했고 유대 율법과 히브리 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 지역에서 헬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울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유대 율법에 정통하고 목숨을 다해 율법을 준행하고자 했던 젊은 유대 청년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하여 스데반의 주장을 꺾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였기” (6:10)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분은 전도자(사역자)들 안에 살아 계신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지혜와 나의 능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친히 할 말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성령께서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할 말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께서 전해 주신 모든 말씀들이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두번째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하기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고 했는데, 이 세상의 어떤 탁월한 지혜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 보다 낫지 못하다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 지혜가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대적자들과의 논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헬라의 학문, 특히 수사학과 논리학,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소위 말로는 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소유하고 있었던 지혜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과 언어의 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지혜’였기에 다수의 헬라파 유대인 무리들은 스데반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헤쳐 나갈 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야고보서에 기록된 하늘로 부터 나오는 지혜, 신령한 지혜를 더욱 간절히 구할 때라고 믿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

• 천사의 얼굴을 지닌 스데반
헬라파 유대인들이 논쟁에서 스데반을 당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여 스데반을 곤경에 빠뜨릴려고 합니다.

첫번째로 그들이 사용한 비열한 방법은; 11절에 보면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헬. Hypoballo, ‘은밀히 던지다’, 영. ‘secretly persuaded) 돈으로 사람들을 사서 거짓 증언하게끔 하였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 blasphemy)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거짓으로 증언하게 합니다.

두번째로 그들이 사용한 비열한 방법은; 12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서기관들, 일반 다수의 백성들을 충동시켜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악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기도 하고 거짓된 정보를 흘려서 사람들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원수되었던 사람들조차도 하나가 되어 대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과 빌라도는 원래 원수처럼 여기던 사이였지만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마음을 합하는 것을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그들이 매수하였던 거짓 증인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13-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스데반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6:14)

유대인들, 특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거짓증인들이 펼친 주장은 스데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죄는 당시 로마 식민지 당국도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헤드린의 결정에 따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죄목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증언은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행 7장의 긴 스데반의 설교문에서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스데반의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신성 모독으로 고발한 두 가지 ‘성전 모독’과 ‘율법을 깨뜨림’에 대한 반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서의 내용들을 전하였는데, 그 내용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을 인용한 것을 가지고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이 성전을 허무는 자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겠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 (요 2:21)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일점 일획도 어겨서는 안되는 신성 불가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주장하였다고 증언합니다. 한마디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스데반을 ‘신성 모독죄’라는 올가미에 덮어 씌워 죽일려는 계략임에 분명합니다.

이제 스데반의 목숨은 백척간두,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불안해 하거나 비굴한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빌라도 앞에서 선 예수님처럼 평온하고 온유한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15절에 놀라운 기록을 읽게 됩니다. “공회중에 않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천사의 얼굴”은 쉽게 말하면 인간의 모습이 아닌 천상의 얼굴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곤경에 처했을 때 불안함과 초조함, 피곤함과 절망감이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스데반 집사의 얼굴은 신비함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얼굴은 신령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머리 위에는 오묘한 광채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높은 산(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하기를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2)고 되어있습니다.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신비로운 경험을 한 인물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이후 백성들 가운데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 34:29) 마친가지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게 된것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스데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 얼굴 가운데,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 며칠간 금식한 선배들과 간사님들을 보았을 때 그 얼굴이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광채가 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입니까? 아니면 세상 풍파에 찌들린 피곤한 얼굴입니까?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에 등장하는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언젠가 나타날 자비롭고 사랑이 가득하고 덕스러운 얼굴을 한 그 한 사람을 바라보며 기다릴 때 어느 순간 그 자신이 ‘큰바위 얼굴’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자비롭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늘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고,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닮기를 원할 때,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 갈 줄 믿습니다.

새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내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다함께 부르기)

찬송가의 가사처럼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형상(image)이 나의 얼굴과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 교회 일곱 집사중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았던 스데반 집사님처럼,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고, 지혜와 성령으로 증거하며, 천사의 얼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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