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설교 I”
• 본문: 행 7:1-16
6/21/2020 주일 예배
우리는 지난주에 스데반 시리즈의 첫번째 내용으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한 스데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스데반 시리즈의 두번째 시간으로 스데반이 공회원들과 백성의 무리 앞에서 전한 긴 설교의 첫부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7장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장으로 60절 까지 구성 되어 있는데요, 53절 까지가 스데반이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은 ‘설교의 책’이라 할 만큼 많은 설교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20여편의 설교문을 발견할 수 있는데 베드로의 설교문이 7개, 바울의 설교문이 11개이며, 그외 오늘 본문이 포함된 스데반의 설교와 야고보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왜 이렇게 긴 설교-구약의 주요 인물들이 포함된-를 하는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스데반은 이 설교로 인해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기에 설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나 성경 학자들의 도움없이 이 내용을 읽으면 설교의 핵심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스데반 설교의 핵심과 긴 설교의 첫번째 섹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 설교의 개요입니다.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2-8)
• 요셉을 통한 구원 (9-16)
• 모세를 통한 구원 (17-34)
• 이스라엘의 배교 (35-40)
• 메시아를 거부함 (51-53)
스데반은 유대교 공회원들 앞에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부터 시작해서 솔로몬 성전 건축까지 긴 유대 민족의 역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스데반이 구약을 인용하는 것은 기독교도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구약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며 구약 성경을 복음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 진리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스데반은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하여 고발당한 상태입니다. 스데반은 그러한 그들의 주장에 대한 답변이요 반론으로써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 학자들은 스데반의 이러한 변증론을 ‘역사를 통한 변증’라고 일컫습니다.
역사를 통한 변증은 논리적인 변증과는 다릅니다. 역사적 변증은 청중을 모두 변증의 ‘청자’(audience)가 아닌 ‘참여자’(participant)로 끌어들입니다. 따라서 청중은 스데반과 동일하게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자기의 반대자들이 말한 역사보다 더 넓은 시야로 청중을 끌어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이전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유수, 이후 선지자들 시대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가 어떤 특정한 땅이나 어떤 물리적인 건물에 제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도, 불순종함으로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한 이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도, 메시아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함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니며 성전을 모독하지 않았음을 논박하고 있습니다.”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2-8)
스데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스토리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이전 메소보다미아 우르에 있을 때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영광의 하나님은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로 가야 하는 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 하나님이 이끄시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펼쳐진 여정은 요즈음으로 하면 구글 Map이나 GPS 를 따라 가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는 믿음의 여정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우르를 떠나) 하란이라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 데라는 죽고 조카 롯과 함께 오랜 여행끝에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게 됩니다.
5절 말씀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 그에게는 자식도 없었고 머물 땅도 없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기록하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는데, 자식도 없이 어떻게 민족을 이룰 수 있겠으며, 나그네 처럼 떠도는 가족이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안정된 고향과 친척, 가족을 떠나 타지로 이주하여 정착한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한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머나먼 광야길을 이동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과도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 (창 12:4)
아브람은 무엇을 따라 갔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나의 뜻, 나의 계획,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결정하고 움직이는 삶이 믿음의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부양할 가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는 75세라고 했으니 육신적으로도 연약하고 긴 여행을 감당할 만큼 여력도 되지 않고, 더군다나 나이많은 아내 사래를 통해 후손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처지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인간의 방법과 계획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게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함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모험, adventure 입니다. 만약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자만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모험을 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길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브라함에 해당하는 구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8-12)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1) 순종하였고 2)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3) 약속의 땅에 거류할 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땅)가 있는 성을 바랐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아 태가 막힌 사래도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은 약속하신 이를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지 잘 말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아갔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아브라함이 거주하게 될 가나안 땅에서는 그에게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약 어느날 많은 토지를 소유한 소위 ‘땅부자’가 찾아와서 내가 당신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땅 중에 10에이커를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라고 하면 우리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지의 소유권이 명시된 타이틀과 함께 증여 계약서 같은 것에 사인해서 주면 이야기가 달라 지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그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땅 문서같은것을 보여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그의 책 ‘사도행전’ 설교집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삶은 ‘현금’을 쥐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어음’을 받아 사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장 쓸수 있는 현금이 아니라 어음을 발행한 주체를 신뢰하여 나중에 필요할 때 언제든 현금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약속 어음’과도 같은 것이 믿음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약속 어음을 발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온전한 믿음만 있다면 부도날 위험이 전혀 없는 확실한 어음인 것이지요. 참 탁월한 비유인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NIV 해설 성경에는 행 7장 스데반의 설교를 ‘땅’(2-36) ‘율법’(37-43) ‘성전’(44-50)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구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본을 보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와 그의 후손을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성(땅)을 바라보며 일평생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제일 먼저 한 것은 그 땅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즉 예배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6-8)
성경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내가 네게 보일 땅’ ‘네가 지금 사는 이땅’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 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땅’을 가나안 땅이라고 믿었고, 나중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의 자리라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 요셉을 통한 구원 (9-16)
스데반의 설교에서 등장하는 두 번째 역사적 인물은 요셉입니다.
6-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 땅의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4백년 동안 괴롭게 할것인데, 내가 그 종 삼는 나라를 심판하여 그들이 나와서 이 곳 (가나안 땅)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창세기 후반부와 출애굽기에 1장에 보면 기근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에 온 야곱의 자식들과 야곱이 총리 대신이 된 요셉의 배려로 애굽에 정착하게 되어 이후 400년을 노예로 지내게 되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스토리는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종 요셉의 삶을 요약하면서 그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9)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셨고 애굽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10)
하나님은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형들의 시기에 의해 깊은 웅덩이에 빠졌을 때도 함께 하셨고, 애굽 상인들의 의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 집의 노예로 팔려 갈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노예의 신분으로 충성되이 그 집안을 섬길 때도 함께 하셨고, 보디발 아내의 무고한 고발로 옥에 갖혔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바로를 섬기는 고관의 꿈을 잘 해석하여 옥에서 나오게 하실 때도 함께 하셨고,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애굽의 총리 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하실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굴곡진 인생의 모퉁이 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늘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는 여호와 앞에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요셉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 11:22)
요셉은 죽음을 앞둔 임종 시점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4백년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하십니다.
또 요셉은 자신이 죽은 이후 자기 뼈(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합니다. 그의 명령은 나중에 모세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4백년 이후 모세는 요셉의 맹세를 성취하기 위해 그의 해골을 메고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갑니다. (출 13:19) 요셉의 뼈는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 산 밭에 장사됩니다.
요셉의 생애를 서술 할 때도 땅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 되어 종살이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요셉을 통해 성취되는데,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그릇이었습니다.
형들을 만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을 때 말한 요셉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를 애굽에 먼저 보내어 큰 구원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7-8)
전 세계적인 기근으로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야곱과 그의 자녀들을 살려 주시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을 그들 먼저 애굽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만하지도 않았고 형들에게 복수할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했고 아버지 야곱과 형들의 가족을 모두 애곱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릴 때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고 무려 4백년 동안이나 그들은 고통 가운데 노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애굽 땅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땅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우상들로 가득한 애굽 땅은 죄악의 땅이었고 심판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죄악의 땅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부르셔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처소가 아무리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고 즐거움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가 아니라면, 그곳은 죄악과 심판의 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롯이 보기에는 기름지고 평온하게 보였던 소돔과 고모라 처럼, 인간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번영하고 행복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땅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죄악으로 인해 심판 받을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의 평안함과 화려함에 집착하게 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은 이 땅에서 행복을 구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이요 나그네임을 알았기에 그들이 돌아갈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한 성’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오늘 스데반의 설교에 등장하는 두 사람, 아브라함과 요셉 모두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실 ‘그 땅’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곳,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곳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웨인즈빌 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만 예배하며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는 도구되는 삶을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