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그리스도의 십자가 (로마서 5:8)

Posted on 4월 4, 2020

Exemple
sermon date 2020-04-05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Sermon Location Waynesville

주일설교 – 그리스도의 십자가 (로마서 5:8)

본문: 로마서 5:8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로마인들의 사형 집행 형틀중에 하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세계의 변두리에 살던 ‘야만인’들이 고안하여, 이 후에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십자가형은 지금까지 시행된 모든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거기에 달린 사람은 여러날 죽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로마인이 이 처형 방법을 택했을 때, 그들은 살인, 반란 혹은 무장 강도를 한 범죄자, 그중에서도 노예나 외국인 혹은 사람 취급을 못 받은 사람들에게만 이 형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은 오직 극단적인 국가 반역죄를 범했을 경우에만 십가가 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역사가 ‘키케로’는 십자형을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지셨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녹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 (요일 2:2)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되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만난 “Grace Point”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악을 묵과하실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 댓가는 사망입니다.
하지만 불순종한 인간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종의 형제를 가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천국 가는 길을, 영생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치욕과 수치의 사형틀 십자가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로움과, 자애로운 아버지의 애끓는 사랑이 겹쳐져 있는 “Cross Point”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아들의 순종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인생의 목표는 한 가지였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마 20:28)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죽기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어느 누구가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썩기 위해 존재한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 중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얻게 하기 위해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한방울 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바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이었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미션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도 피하고 싶은 ‘고난의 잔’이었습니다. 십자가 지시기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3번씩이나 동일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히 12:2하)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 더 큰 기쁨을 바라보심으로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구원얻어 영생의 선물을 받는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러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의 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두 뜻”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에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늘 갈등하고 있습니다. “좁은 길” “생명의 길” 과 “넓은 길” “사망의 길” 두 갈래 길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흔들림없이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그 길을 걸어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매일 두 갈래 길에서 좁은 길, 생명의 길, 순종의 길을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예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과 겸손”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 희생과 겸손”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절정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성육신)은 세상의 권력을 가진 왕실이나 권세가의 상속자로 태어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변두리 이름없는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육신의 아버지 또한 나사렛의 목수였기에 노동자 계층에 속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유명한 랍비들에게서 종교 교육을 받으신 적도 없으셨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그가 선택한 제자들 대부분 변방 출신의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그가 즐겨 어울리었던 무리들은 세리와 창기들처럼 당시 죄인을 대표하는 그룹들이었기에 그에게는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그는 ‘미치광이’ ‘거짓 선지자’ 취급을 당했으며, 그가 선택한 열 두명의 제자들 중 한명인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로마 당국자들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신” (사 53:2) 예수님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사 53:3)

구원자, 메시야가 그 땅에 왔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고난과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되어 썪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에 고난의 잔을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유월절 만찬 이후,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4-15)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 처럼 너희들도 서로 섬기라, 허리를 동이고 겸손함으로 섬기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바로 스승되신 예수님처럼 희생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을 때,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 일이 결코 예수님께 미치지 않을 것입키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3) 이 말씀을 하시고 연이어 하신 말씀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에 죽으신 후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입증하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베드로의 생각은 사탄의 생각이었고 사람의 생각임을 강력히 꾸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예수님을 따라 올려고 하면 – 제자가 될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된 자리에 앉으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는 삶없이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 갈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높아질려고 하고, 인정받을려고하고, 더 많은것을 누릴려고 하는 내 자아를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아를 다듬고 교정시켜라가 아니라 부인해라,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시 십자가는 치욕과 고통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십자가를 지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지기 싫지만, 힘이 들고 쓰러질 수 없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우리는 지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희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살아 꿈틀거리는 자아가 있다면 부인하고 버려야 할 자아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묻은 십자가는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해 몸 버려 피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Grace Point”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아들의 순종의 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희생과 겸손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저와 우리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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