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축하 주일 예배 –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이사야 9:1-6, 요한복음 3:16)

Posted on 12월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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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date 2020-12-20
sermon manager 박성환 목사

성탄 축하 주일 예배 –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이사야 9:1-6, 요한복음 3:16)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 본문: 이사야 9:1-6, 요한복음 3:16
12/20/2020 성탄 축하 주일 예배

함께 시청한 체코에서 제작한 ‘The Most (Bridge)’(다리) 라는 단편 영화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찢어지는 고통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처럼 기쁘고 즐거운 날, 이처럼 무거운 내용의 영화를 소개해 드리는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 of great joy), 즉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오신 날은 우리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날이지만, 하늘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내어주어야만 했던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귀한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탄절 주일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흑암의 권세 아래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함께 봉독한 이사야서 본문 말씀의 배경은 B.C. 720년경 남 유다 아하스왕 시대의 일입니다.

아하스는 우상을 섬기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따라 행했던 왕이었습니다 . 이에 하나님은 아하스와 유다를 징계하셔서,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공격하여 많은 무리가 사로잡히고 용사 12만명이 하루만에 살육당합니다. 아하스는 두려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앗수르가 적으로 돌변해 아하스와 유다를 침략합니다. 이에 유다 백성들은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리게 되어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8:21)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 뿐인 참담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8:22)

그런데 이사야 9장은 소망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어 성경 NIV 는 9:1 “Nevertheless”로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의 힘을 신뢰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입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을 것이다(1절).
전에 멸시받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후에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1절).
흑암에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칠 것이다(2절).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실 것이다(4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흑암의 고통 가운데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구원자)를 그 땅에 보내시어 흑암에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될것이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 1:9)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택하신 백성들을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기 위해(골 1:13)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낮은 자리에 오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약속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는 그 어느 때보다고 어둠이 온 세상을 가득 덮고 있었던 암울한 한 해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 빼앗긴 자유로 인한 불편함, 무엇보다도 영적인 곤고함과 갈급함.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흑암의 고통 아래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탄생 소식은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던 것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자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이 회복되며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하고 있는 모든 멍에는 벗겨질 줄 믿습니다.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고백처럼 “돋는 해(메시아)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눅 1:78-79)

둘째는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불길이 자신을 집어 삼킬 때에도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은 희생하고 아이를 가슴에 품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자신의 피붙이를 위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종종 있습니다. 또한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을 우리는 ‘의인’이라 부르며 그의 고귀한 희생을 칭송합니다.

2001년 1월 26일 저녁 7시15분, 도쿄의 아카몬카이 일본어 학교에 유학중이던 이수현(당시 26살·고려대 무역학과 휴학)씨는 신오쿠보 역 구내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선로에 떨어지는 것을 본 그는 곧장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씨와 함께 뛰어든 일본인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당시 47살) 등 셋은 안타깝게도 선로를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10년동안, 그가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그날에 추모제가 일본 현지에서 열렸으며, 그가 죽은 신오쿠보 역과, 그가 재학하던 고려대학교 세종 캠퍼스에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을 ‘의인’이라 칭하고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추모하는데, 하나님은 죄로 인해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 그의 하나 뿐인 아들,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롬 8:32)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본 것처럼 수 많은 열차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과, 아들을 잃고 비통해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새 찬송가 294장은 일본인 ‘미타니’라는 분이 작사한 곡입니다. 1-2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1.하나님은 외아들을 주시는데까지 세상 사람 사랑하니 참 사랑이로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2.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우리 원수같이 대적하나 사랑하여 주네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우리, 원수같이 대적하던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죄악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평민인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의 특권과 지위를 포기하는 것도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어찌 온 세상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름을 ‘우유’)을 너무 사랑해서, ‘우유’랑 대화하고 싶어서 1년간만 ‘개’로 변해서 ‘우유’와 친밀하게 소통하며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우유’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어찌 동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더 파격적인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같은 피조물에서 다른(하급 동물) 피조물로의 변이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재가 되신 그 분은 피조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황실에서 나신 것도 아니요, 엄청난 부를 누리며 권력을 행사하던 헤롯 가문에서 나신 것도 아니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명예를 누리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의 가정에서 태어 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이름없는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호텔이나 근사한 여관에서가 아니라 냄새나고 더러운 말 구유(말 먹이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를 드린 사람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가난한 목동들이었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기 위해 별을 보고 수 만리 길을 걸어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며 예물을 드린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 wise men,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 아이 중 두 살 아래 있는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온 세상의 환영을 받기는 커녕,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이 자행되는 고통의 시기에 아기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급히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낮아지는 삶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세상으로 오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임하셨습니다.

서른 살이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고(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함), 이후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고,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어부들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유명한 학교를 다닌 적도 없으시고,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 안수를 받으신 적도 없으시고, 박사 학위같은 명예로운 졸업장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였던 주 대상은 이스라엘의 평범한 백성들이었고, 세리와 창기를 비롯해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명예와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으셨고, 머리 둘 곳도 없는 나그네 처럼 순회 전도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낮은 자리에 임할 것을, 섬김의 삶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너희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그리스도인의 삶은 밀알처럼 썩어지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가르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흉악한 범죄자들의 형틀인 십자가를 지셨고, 로마 군병들의 채찍에 맞으시고 침밷음을 당하시고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여섯 시간의 기나긴 고통을 온 몸으로 다 겪으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나님께서 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탄절 주일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우리도 본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 주일에 우리는 ‘The Most’ 영상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약속으로,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참 빛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버리시고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저와 성도님들 모두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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