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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있는 자의

  • 본문: 엡 5:15-21

12/31/2020  송구 영신 예배

전례없는 팬데믹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서 지혜 있는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3가지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이전에서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 가운데서 마땅히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3장에는 세상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하나님의 지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므로 시기와 다툼과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 “오직 위로부터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지혜로운 자의 삶”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세월을 아끼는 입니다.

왜 지혜로운 자는 세월을 아껴야 합니까? 이 이유는 때가 악하기(days are evil)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다’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시간을 구속하라’ ‘시간을 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간을 그것의 악한 속박에서 속량하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 (NIV)에는 ‘주어진 기회들을 최선을 다해 활용(선용)하다’(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돈은 잃어버리면 다시 벌면 되고, 직업이나 집도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시간은 지나가버리면 다시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헬라어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개 있습니다. ‘카이로스’(각자에게 주어진 기회, 의미있는 시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나타난 의미있는 특정 시간), ‘크로노스’(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흘러가는 시간, 물리적인 시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 신은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는 기회임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얼굴 생김새가 앞머리는 머리가 무성하여 잡을 수 있으나 뒷머리는 대머리여서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과 기회,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였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누렸는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애썼는지, 이웃을 돌아보며 섬기기에 노력했는지 자신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두번째로는 지혜로운 자의 삶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허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택하신 목적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 교회를 향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너희는 이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한 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자의 삶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술취함과 대비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술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살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에베소서 강해집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구절을 원어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1. 명령법: 선택이 아니라 의무
  2. 복수형: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명령
  3. 수동태: 성령에 의해 채워지는 것, ‘성령이 너희를 채우게 하라’(NEB)
  4. 현재시제: 헬라어에는 두 가지 종류의 명령법, 부정 과거 명령(하나의 행동을 말하는 것,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요 2:7) 한 번의 행동), 현재 명령(계속되는 행동을 의미), 본문은 현재 명령형, 즉 지속적으로 계속 성령으로 채워져야 함을 의미함.

그리고 18-21절을 원어로 보면 두 가지의 명령과 이를 뒷받침하는 4개의 분사형으로 되어있슴.

명령: 술취하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분사형: 1)서로 화답하며(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 성도의 거룩한 교제, 영적인 교제

                2)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너희의 마음으로->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주께’ 드리는 예배

                3)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의

                 생활(불평대신)

                 4)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친절함을 가지고 서로에게 복종함. 자신의 의와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의 4가지 특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과 거룩한 교제를 나누고, 마음을 다하여 주께 예배 드리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도들끼리 피차 복종하는 삶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2021년은 ‘신축년’(흰 소의 해)라고 합니다. 새해 인사를 ‘복 많이 받으 소~’라고 한다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해동안 지혜로운 자로서, 시간을 아껴서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며,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서로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신령한 예배를 드리며/하나님께 감사하며/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함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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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5/13/2020

지금 한국에서 자가 격리중입니다. 지난 주 미국에서 입국할 때 보다는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혼자 생활하면서 코로나가 바꾼 생활의 단면들을 경험합니다. 24시간 뉴스채널의 보도 대부분은 코로나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최근 잠잠해지던 코로나 상황이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120여명이 넘는 신규 확진자가 생겨 아이들 학교 개학도 다시 연기되었습니다. 낮에 몸이 피곤하여 좀 쉴려고 누우면 30분이 멀다하고 휴대폰에서 경보(alert)메시지가 떠는데 집 근처(16KM이내)에서 발생한 신규 확진자 관련 정보입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경제 활동이 다시 재개되었지만 여전히 바이러스의 위험 가운데 불편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만 14일간의 격리 생활중 7일째입니다. 거의 절반을 보내었습니다. 가족의 배려로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밥을 해먹고 간식도 챙겨먹고 몸이 힘들면 쉬기도 합니다. 5분거리에 사는 가족이 수시로 반찬을 만들어 보내주어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터에 옥상에서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에 두번씩 옥상에 올라가 심호흡을 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40여미터 되는 거리를 10여차례 반복해서 걷습니다. 숙소와 30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격리 원칙에 위반될까바, 다른 사람들과 만날까봐 아침 일찍 아니면 밤 늦게 올라가서 15분 가량 숙제하듯이 운동하고 내려 옵니다.

일생중에 처음 경험하는 감방 생활 같은, 그것도 독방 수감 생활 같은 경험이 낯설고 불편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세상과의 만남이 차단되어 빼앗긴 자유로 인해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강제적으로나마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해주심을 또한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중에 급작스럽게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지난 주말 몸에 이상이 와서입니다. 가슴통증과 불규칙한 심장박동으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는 출국전, 그리고 한국 도착해서, 모두 두번씩이나 병원 응급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심장 부분 검사 결과는 이상 없는 것으로 나와서 감사했습니다. 다음 주 격리 해지가 되는 다음날 심혈관계 전문의와의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저는 작년까지, 정확히 말씀드리면 만 52세가 될 때 까지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때 운동을 많이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나름 건강 관리를 잘 해왔고 몸에 별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자만했던 것이지요. 하이킹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근처 산으로 등산을 다녔고,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테니스를 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한국에서 우연히-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건강 검진 중에 발견한 몸의 이상으로 인해 저의 교만이 꺾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몸은 영속성의 존재가 아니라 내구 연한이 정해진 소모품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비공들의 구호처럼 ‘닦고 조이고 기름치지’ 않으면 그나마 건강해도 80-90인 인생의 호흡이 더 짧아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시편 46장 10절 말씀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잠잠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와 유사한 말씀이 출애굽기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 14:13)

앞에는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펼쳐져 있고 뒤로는 용맹한 애굽 군대가 추격하여 오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만히 서서 내가(하나님께서) 행하는 구원을 보라”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들만 바라보고 있으면 두려울 수 밖에 없고 낙심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 구원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잠잠히 있어’라는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내힘과 지혜를 버리고 조용히, 잠잠히 전능자의 손길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되심을 보게 됩니다.

“잠잠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안에서 힘을 얻고 전능자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는 자가 누리는 은혜를 덧입기를 원합니다.

기도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종 박성환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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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산에 오를자가 누구인가?”

  • 본문: 시편 24편

4/29/2020 수요 예배

오늘 본문의 시편은 시편 15편과 한쌍을 이루는 시로서,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로 묘사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먼저 배경을 살펴보면 시편 24편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을 때(참조 삼하 6장), 혹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적은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는 오랫동안 이 시편을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예루살렘 성소로 들어가시는 승천 기념시로 사용해왔습니다.

  •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 (1-2)

1-2절에서 다윗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짝을 이루며 우주 전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호와의 것(소유)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분의 다스리심을 받습니다.

2절은 원어로 보면 ‘왜냐하면 그는’(키-후)로 시작하는데, 1절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세우시고, 강들을 건설하셨습니다. 혼돈을 상징하는 바다와 강위에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번주에 여행 다큐멘터리 한편을 보았는데 ‘물의 도시’로 알려진 이태리 베네치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수백개의 작은 섬들이 연결된 도시인데 놀라운 것은 수백년 전에 물 속에 수만개의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집과 집 사이로 작은 물길이 나있고 그 사이로 배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고대 베네치아 인들의 지혜와 강인한 생존력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작은 도시를 보면서도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데, 창조주 하나님은 혼돈이 가득한 흑암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질서정연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운행하고 계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케됩니다.

  • 참된 예배자의 자격 (3-6)

 3-6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자들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5편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마음에게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진실하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손이 깨끗한 자’입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의미는 외적인 행동이 올바르고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인데 그것은 의로운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이는 외적인 행위와 함께 내적인 생각이 모두 강조된 표현입니다. 이처럼 외적인 태도와 내면적인 삶이 일치될 때,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게”됩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는 자는 우상 숭배하는 자이며, 거짓 맹세하는 자는 위증하는 자,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율법입니다. (출 20:16)

참된 예배자는, 시편 15편과 24편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청결하며 진실하며 외적인 삶의 모습이 공의롭고 올바른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주에 한국의 뉴스를 보니까 대형 금융 사기 사건의 주범들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의 한명이 훔친 수억원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였는데 일부는 개인 생활비로 사용하였고, 그 일부는 교회에 헌금을 하였다는 보도를 접하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돈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헌금 행위’가 하나님께 헌금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 이름을 낼려고 교회라는 ‘종교 기관’에 기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 돈을 받지 않으시겠지요. 오히려 하나님은 그 사람의 깨끗지 못한 손과 진실하지 못한 마음을 책망하지 않으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된 예배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어떠한 복을 누리게 됩니까?

5절에 보면 그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게 되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다”라고 말씀합니다.

6절에 “이는” 지시 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시온 산에 올라가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며 “야곱의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찾다’ ‘구하다’ 이 동사는 모두 예배와 관련된 용어로, 성전 방문, 예배, 하나님의 뜻을 구함, 하나님의 임재 요청에 사용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예배자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찾고 구하는 자에게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코로나 19로 하루 하루의 삶이 단조롭고 지루한 시간의 연속일지라도, 일상의 작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며, 하나님을 찾고 구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을 다해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서 큰 도전과 은혜를 받게 되는 부분은,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 중에서 소수의 왕들만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통치 기간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 땅에는 평화가 임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많은 왕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했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섬기되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하는가?’

  •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7-10)

이 단락에서는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이 마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영광스럽게 돌아오는 전사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시온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전쟁후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 성소로 다시 옮겨 온것을 연상케합니다.

‘영광의 왕’이라는 표현이 무려 5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7-8절과 9-10절은 유사하게 쌍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문들을 향하여 ‘머리를 들어라’라고 명령합니다.

8절, 10절에는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라는 질문이 먼저 나오고 그 대답으로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대답합니다.

전쟁에 능하시며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영광의 왕이시며, 이스라엘 공동체의 왕이신 것입니다.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새찬송가 67)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1.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그 크신 사랑 늘 찬송하라

예부터 영원히 참 방패시니, 그 영광의 주를 다 찬송하라

2. 능력과 은혜 다 찬송하라 그 옷은 햇빛 그 집은 궁창

큰 우뢰소리로 주 노하시고 폭풍의 날개로 달려가신다.

3. 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이 땅 다 주의 조화

그 힘찬 명령에 터 잡히나니 저 푸른 바다는 옷자락이라.

4.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온 백성 지으신 만왕이시니 그 자비 영원히 변함없어라.

이 찬송가는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의 동생 미카엘 하이든이 작곡하였고, 인도 동인도회사의 임원이었다가 나중에 인도 뭄바이의 총독이 된 로버트 그랜트가 작사하였습니다. 그랜트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인도 선교에 사용하였고 선교사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그는 시를 잘 썼는데 인도인들과 함께 부를 수 있는 여러 편의 찬송을 지었습니다. 그 찬송시 대부분은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졌지만 이 찬송가는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고백처럼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인 우리가 날마다 온 백성 지으신 만왕의 왕, 영광의 왕께 경배하며 그 크신 사랑을 늘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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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본문: 시편 23:6 하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4/22/2020 수요 예배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그의 대표적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의 마지막 장면을 탈고하면서 열일곱번을 고쳐 썼다는 일화는 문학사에 있어서 유명한 일화중 하나입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다윗이 시편 23편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구절로 시편을 마무리할까 모르긴해도 기도하면서 고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을 찬양한 이후 마지막 구절인 6절에서 평생에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과 인자하심(lovingkindness)을 노래하면서 위대한 시편의 마지막 구절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시 23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고백이요 다짐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때문에 미국에서 만든 영화에 보면 장례식때 장례식을 인도하는 목사나 사제가 설교중에 가장 즐겨 인용하였던 성경 본문이 시 23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관에 누인 고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평안히 안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에 이 구절을 많이 읽고 나누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의 집”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1차적으로는 그곳은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믿었던 ‘성소’ ‘성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막’(성소, 회막) 건립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디자인과 건축 재료에 대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광야 시대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야영을 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야영을 하였고 진군할 때에도 2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가운데 성막이 자리하였습니다.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동물의 희생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고, 지성소에서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영광이 드러나는 성막의 정신은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 소위 솔로몬 성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 당시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은 하나님의 언약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전에 있었던 간이식 성막 같은 곳에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법궤가 휘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 7:2)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사모하는 자였기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물리적인 예배 처소로서 ‘성전’을 건축하려는 열망이 컸으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 솔로몬 왕으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시 23:6 에서 다윗이 머물기를 소원하였던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성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시 84편은 성전에서 예배를 섬겼던 레위 지파중 고라 자손이 기록한 시편인데, 주님께서 거하시는 장막에서 거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84:1-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거룩하게 여겼던 하나님의 성전이 이방 족속들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되었고 디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 가운데서 늘 성전의 회복을 갈망하며 살았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훼파된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스룹바벨 총독의 리더십과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무너져 내린 성전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전부요 목숨보다도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다윗이 사모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임을 알수 있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성막이나 성전은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장막을 치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성전 의식에 빠져 있던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기도와 묵상으로, 그 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대화하는 교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을것이라 짐작됩니다. 수 많은 양들과 함께 들에서 보내면서 대화 상대는 하나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천둥번개가 치고 급류가 계곡을 휘감아 돌때, 한 밤중에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었을 것이고, 한 낮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누워 구름 한점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즉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입니다.

목동 다윗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친구였고, 지혜와 가르침을 받는 스승이었고, 때로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윗은 성경의 인물들 중에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진솔할 수 있었던 것은 수 많은 날들을 들판에서 광야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로 사소한 외출 조차도 꺼려지는 시간을 보내면서 저의 생활은 더욱 단순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고 사무실에서 성경 읽기와 기도, 독서, 설교 준비로 주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과 저녁 먹으로 집에 갔다가 이후 산책을 하고 사무실에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합니다.

코로나 19 이전에도 하루에 한번 정도는 교회 옆에 위치한 Roubidoux공원을 산책하였는데 요즈음은 하루 두번 정도는 산책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산책을 하면서 이런 기도가 절로 모르게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수십 에이커되는 정원을 예비해 두시고 날마다 누리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계곡과 강물, Spring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수천마리의 새들의 노랫소리를 늘 들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산책을 하면서 다윗처럼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시편을 암송하기도 하고 찬양을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다윗은 기도와 말씀 묵상, 찬양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경험하였기에 그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노래한 ‘하나님의 집’은 장례식때에 많이 선포되는 말씀처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그 분의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거하게 될 천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forever) 살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의 집,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이땅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다 이 땅에서는 핍박과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의 길을 다 걸어간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어린 양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흰 예복을 입고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며 주님의 얼굴을 가까이서 뵈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할 ‘하나님의 집’에는 고통과 눈물, 질병, 시기와 질투는 없을 것이며, 기쁨과 감사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번 주에 읽은 책 중에 필립 얀시의 ‘하나님 제게 이러세요?’(원 제목: The Question that Never goes away)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저자는 동부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끔찍한 총기 사고로 어린 자녀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선물한 책, 성공회 사제 존 클레이풀의 ‘Tracks of a Fellow Struggler’(같은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 지나온 길)이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존 클레이풀은 백혈병을 앓던 여덟 살 짜리 딸을 살리기 위해 18개월 동안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습니다. 최고의 의사를 찾아갔고, 유명한 신유 은사자들의 안수를 받게 했으며, 친구들과 교구의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딸은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사랑하는 딸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선물 받은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감사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인생의 지극히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리고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감사’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만약 성공회 사제 존이 이별의 고통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없었다면 이러한 고백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물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의 소유물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언젠가 어떤 의사가 내게 말했듯이 모든 생명은 ‘대출받은 것’이므로 언젠가 ‘빌려준 분’에게 되돌아 가기 마련이다.”

미래에 약속으로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나그네처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밝히는 작은 촛불로서, 짠맛을 잃어가는 세상속에서 녹아지는 소금처럼 살아가는 삶, 아침 안개와도 같은 이 생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본향을 전해주는 삶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국 백성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 찬양과 감사, 기쁨과 섬김을 이 땅에서 실천하며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23편을 기록한 다윗처럼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인도자, 공급자, 보호자되심을 믿고 감사하며, 성령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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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내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 본문: 23:6 a

4/15/2020 수요 예배

켄 가이어(Ken Gire) 목사님의 책 “폭풍 속의 주님” (At Peace in the Storm)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동북부에 인생 풍파를 겪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한 카운셀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생명줄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인사를 나눈 뒤 내담자에게 소파를 권하고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언제가 똑같은 형식으로 상담을 시작합니다. 절대 먼저 내담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의 깊은 트라우마나 가정 환경을 파헤치지 않습니다. 교회에 꾸준히 참석하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카운셀러는 도움을 청하는 내담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 느꼈습니까?

이 현명한 카운셀러가 내담자에게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묻는 것은 신실한 하나님이 곧 우리 영혼의 피난처이자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난 날에 받은 하나님의 위로를 떠올리고 포착함으로 든든한 반석 위에 견고하게 자리하게 됩니다.

예기치 않은 인생의 풍랑 앞에서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 잡히게 되는것은 우리를 삼킬 듯 넘실대는 거친 파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파도 넘어 계시는 “말씀만으로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믿음의 안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가택 연금 당한 듯한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환경에 눌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소생케되며 날마다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웨인즈빌 침례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23편을 마무리하는 엔딩 구절입니다.

23:1-5에서 선하신 목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보호자이시며 공급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회복자시며 공의로운 분이시며 삶의 인도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 때에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푸시는 보호자, 보복자되시며 기름으로 머리에 부으시고 내 잔을 가득채우시는 참 좋으신 나의 주인되십니다.

그리고 6절 말씀으로 시편 23편을 마무리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자비로운 두 가지 성품을 노래하면서 그의 인생을 복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 찬양합니다.

‘선하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에 ‘토브’라고 기록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후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중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4, 12, 18, 21, 31)

성경에서 말하는 ‘선’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고 건강한 상태를 ‘좋은 것’ ‘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롬 8:28) ‘모든 것’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일’도 있고 ‘좋지 않은 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면 그것은 ‘선한 일’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working together) 하나님의 ‘선’(goodness)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 -최근의 코로나 19를 포함하여- 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현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성도들과 자주 만날 수 없음으로 인해 경험하는 외로움과 소외됨을 통해 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코이노니아’(교제)의 가치를 알게 되고, 이동의 제한과 활동의 자유롭지 못함을 통해 일상 생활에서 누렸던 작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갖게됩니다.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으나, 이 어려움의 시간을 지혜롭게 이겨 나갈 때 나중에 이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lovingkindness) 찬양합니다.

‘인자하심’의 히브리어 원어는 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인 ‘헤세드’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여러가지 단어로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인자하심, 긍휼(mercy), 사랑(love), 변치않는 사랑(unfailing love, steadfast love)등 등. 그런데 하나님의 ‘헤세드’는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긍휼과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 백성들의 언약 관계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언약적 사랑’(covenantal love)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로운 행동을 행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조건적 사랑’ (conditional love)이 아니라, 그 백성의 무지함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으로 인해 언약 백성에게 부어지는 ‘무조건적 사랑’ (unconditional love)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 가운데 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교만하기도 했고, 음란하기도 했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하신 약속 – “집과 나라가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 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이 땅에 오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although, nevertheless)의 사랑입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의로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먼 사랑’- 어떤 사람은 직설적인 표현으로 ‘crazy love’라고 함- 때문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또 다시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의지하며 살아 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Have mercy on me),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Pour out your grace and abundant love)

이러한 기도가 날마다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Surely goodness and mercy sha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과거에 그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원수의 위협과 공격 가운데서도 늘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뿐 아니라, 그의 미래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함께 하실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리니”에서 동사 “따르리니”(follow)는 히브리어 원어 ‘라다프’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원래 원수들이 해를 가하기 위해 집요하게 쫓아가는 것(pursue after)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시편 23:6 상반절 구절을 직역하면 “진실로 선과 인자가 나의 모든 생명의 날들 동안에 나를 추적하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보살폈는가하면, 마치 원수가 그를 죽일려고 집요하게 쫓아오는 것처럼,  그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를추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날개로 그를 덮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하나님을 ‘추적자 하나님’ (God the Chaser)이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의 평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남은 인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함께 할 것을 믿고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또 다른 시편의 권면처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오늘 하루,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누리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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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여섯 시간

4/10/2020 성 금요일 오후에

고난 주간인 이번 주에 읽은 책 중의 한 권은 세계적인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의 신간인 ‘부활의 주와 함께 살라’(생명의 말씀사)입니다. 그런데 원 제목은 ‘Six Hours One Friday’ (한 금요일의 여섯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금요일의 여섯 시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경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기도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의 책에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신이 십자가에 달렸다. 우주의 창조주가 처형되었다. 그의 뺨에는 침과 피가 엉겨 붙었고, 가시가 그의 두피를 찔렀다. 극심한 고통에 폐가 비명을 질렸다. 그러나 그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2,000년 동안 해독되고 분석되고 토론되어 온 그 여섯 시간. 당신은 그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여섯 시간은 여느 때의 평범한 여섯 시간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위대한 항해자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닻을 내릴 지점을 알려 주려고 깊은 물속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그 어떤 허리케인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말이다.

실수로 캄캄해진 인생에게 그 금요일은 용서를 의미한다. 인생의 허무함으로 좌절한 가슴에게 그 금요일은 목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죽음의 터널을 들여다보는 영혼에게 그 금요일은 구원을 의미한다.

당신에게는 그 금요일의 여섯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 주님의 그 금요일의 여섯 시간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고 죄의 형벌로 영원히 고통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의 죄를 담당했으니 너는 의롭게 되었다, 자유케 되었다’라고 선언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박성환)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박성환)죄악을 그에게(예수님)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또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온 세상을 위하여 내어 주신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온 몸으로 경험케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과 함께 구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풍성한 삶으로 나를 초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박성환)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박성환)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여섯 시간은 나 자신을 위한 삶,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이웃을 위한 삶, 이타적이고 타인 중심적인 삶으로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메세지를 듣는 시간입니다.

그가 우리를(박성환)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박성환)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박성환)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하여 생명을 연장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욕주에서는 하루에도 7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이야기는 생명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갈 때 조차도 그들의 곁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몇명 간호사들이 전화로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환자들에게 전하도록 배려한다는 보도는 더욱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 아내, 부모의 이 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없고, 심지어 장례식도 치루어 줄 수 없는 상황은 우리 시대가 지금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입니다.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몸소 육신으로 다 겪으셨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당하신 영적 고통 또한 다 경험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자의 고통, 외면받고 배신받은 자의 고통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홀로 고통중에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환자실의 형제 자매들에게, 가족을 잃고 슬픔 가운데 있는 유가족들에게 골고다 언덕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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