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본문: 시편 23:6 하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4/22/2020 수요 예배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그의 대표적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의 마지막 장면을 탈고하면서 열일곱번을 고쳐 썼다는 일화는 문학사에 있어서 유명한 일화중 하나입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다윗이 시편 23편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구절로 시편을 마무리할까 모르긴해도 기도하면서 고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을 찬양한 이후 마지막 구절인 6절에서 평생에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과 인자하심(lovingkindness)을 노래하면서 위대한 시편의 마지막 구절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시 23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고백이요 다짐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때문에 미국에서 만든 영화에 보면 장례식때 장례식을 인도하는 목사나 사제가 설교중에 가장 즐겨 인용하였던 성경 본문이 시 23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관에 누인 고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평안히 안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에 이 구절을 많이 읽고 나누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의 집”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1차적으로는 그곳은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믿었던 ‘성소’ ‘성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막’(성소, 회막) 건립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디자인과 건축 재료에 대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광야 시대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야영을 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야영을 하였고 진군할 때에도 2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가운데 성막이 자리하였습니다.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동물의 희생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고, 지성소에서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영광이 드러나는 성막의 정신은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 소위 솔로몬 성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 당시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은 하나님의 언약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전에 있었던 간이식 성막 같은 곳에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법궤가 휘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 7:2)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사모하는 자였기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물리적인 예배 처소로서 ‘성전’을 건축하려는 열망이 컸으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 솔로몬 왕으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시 23:6 에서 다윗이 머물기를 소원하였던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성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시 84편은 성전에서 예배를 섬겼던 레위 지파중 고라 자손이 기록한 시편인데, 주님께서 거하시는 장막에서 거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84:1-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거룩하게 여겼던 하나님의 성전이 이방 족속들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되었고 디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 가운데서 늘 성전의 회복을 갈망하며 살았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훼파된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스룹바벨 총독의 리더십과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무너져 내린 성전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전부요 목숨보다도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다윗이 사모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임을 알수 있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성막이나 성전은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장막을 치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성전 의식에 빠져 있던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기도와 묵상으로, 그 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대화하는 교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을것이라 짐작됩니다. 수 많은 양들과 함께 들에서 보내면서 대화 상대는 하나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천둥번개가 치고 급류가 계곡을 휘감아 돌때, 한 밤중에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었을 것이고, 한 낮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누워 구름 한점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즉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입니다.

목동 다윗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친구였고, 지혜와 가르침을 받는 스승이었고, 때로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윗은 성경의 인물들 중에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진솔할 수 있었던 것은 수 많은 날들을 들판에서 광야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로 사소한 외출 조차도 꺼려지는 시간을 보내면서 저의 생활은 더욱 단순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고 사무실에서 성경 읽기와 기도, 독서, 설교 준비로 주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과 저녁 먹으로 집에 갔다가 이후 산책을 하고 사무실에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합니다.

코로나 19 이전에도 하루에 한번 정도는 교회 옆에 위치한 Roubidoux공원을 산책하였는데 요즈음은 하루 두번 정도는 산책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산책을 하면서 이런 기도가 절로 모르게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수십 에이커되는 정원을 예비해 두시고 날마다 누리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계곡과 강물, Spring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수천마리의 새들의 노랫소리를 늘 들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산책을 하면서 다윗처럼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시편을 암송하기도 하고 찬양을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다윗은 기도와 말씀 묵상, 찬양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경험하였기에 그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노래한 ‘하나님의 집’은 장례식때에 많이 선포되는 말씀처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그 분의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거하게 될 천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forever) 살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의 집,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이땅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다 이 땅에서는 핍박과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의 길을 다 걸어간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어린 양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흰 예복을 입고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며 주님의 얼굴을 가까이서 뵈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할 ‘하나님의 집’에는 고통과 눈물, 질병, 시기와 질투는 없을 것이며, 기쁨과 감사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번 주에 읽은 책 중에 필립 얀시의 ‘하나님 제게 이러세요?’(원 제목: The Question that Never goes away)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저자는 동부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끔찍한 총기 사고로 어린 자녀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선물한 책, 성공회 사제 존 클레이풀의 ‘Tracks of a Fellow Struggler’(같은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 지나온 길)이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존 클레이풀은 백혈병을 앓던 여덟 살 짜리 딸을 살리기 위해 18개월 동안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습니다. 최고의 의사를 찾아갔고, 유명한 신유 은사자들의 안수를 받게 했으며, 친구들과 교구의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딸은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사랑하는 딸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선물 받은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감사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인생의 지극히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리고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감사’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만약 성공회 사제 존이 이별의 고통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없었다면 이러한 고백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물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의 소유물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언젠가 어떤 의사가 내게 말했듯이 모든 생명은 ‘대출받은 것’이므로 언젠가 ‘빌려준 분’에게 되돌아 가기 마련이다.”

미래에 약속으로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나그네처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밝히는 작은 촛불로서, 짠맛을 잃어가는 세상속에서 녹아지는 소금처럼 살아가는 삶, 아침 안개와도 같은 이 생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본향을 전해주는 삶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국 백성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 찬양과 감사, 기쁨과 섬김을 이 땅에서 실천하며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23편을 기록한 다윗처럼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인도자, 공급자, 보호자되심을 믿고 감사하며, 성령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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